향기를 머금고 그것을 다른 이에게 느끼게 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무등회 맑은 님들이 그런 분들인데 실제로 무슨 모임이 결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잘 지내고 있고, 맑고 고운 일에는 언제라도 ‘조직의 쓴맛(?)’을 보여주는, 시인이신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사랑하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광주 사람들의 모임이다. 더욱이나 흥미로운 것은 불자와 가톨릭 신자 그리고 개신교 신자가 맑고 고운 시를 사랑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일에 열린 가슴으로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행사 때문에 광주에 갔다가 이분들과 함께 보성 대원사에 간 일이 있다. 가톨릭교회 공동체의 초청으로 이루어진 강의나 공연을 마치고 나서도, 근처에 잘 아는 스님이 계시면 잠은 절에 가서 자는 일이 종종 있다. 소리에 대한 병증에 가까운 예민함으로 늘 수면장애가 있는 내게 절집에서의 숙면은 보약 이상의 것이어서 기회가 주어지면 결코 놓치고 싶지 않다. 티벳불교를 사랑하여 절 안에 티벳불교 박물관을 세우고 계신 현장 스님을 뵙고 차를 마시면서 스님께서 티벳에서 직접 가져오신 티벳불교 유물들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구경하다가 내가 말했다.

“스님. 저는 불교와 참 인연이 많은가 봐요. 가깝게 지내는 스님도 여러 분이지만 왠지 절에 오면 낯선 느낌이 없고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런 저를 보고 노래를 만들고 부르다 출가한 후배 스님께서 농담 삼아 ‘형은 전생에 스님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절집음식이 편안하고 절에서 잠을 자는 일이 익숙할 거예요.’라고 하길래 ‘절집음식을 먹는 일과 절에서 자는 일이 편안한 것은 사실인데, 아마 유럽에서 수도승이었나 보다’라고 했지요. 제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분들 중에 베트남 출신의 틱냩한 스님과 티벳의 달라이 라마 그리고 숭산 큰스님이 있어요. 저는 텔리비젼을 다큐멘타리나 꼭 보고 싶은 영화 그리고 예술에 관한 것만을 가려 보는 셈인데 세 분에 관한 프로그램들을 세 번 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보게 되었어요. 작년 정초에 우리나라 언론 기자가 인도의 다람살라(티벳 임시정부가 있는)에 가서 달라이 라마와 인터뷰를 했지요.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시느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첫째는 『자기 존재에 대한 책임』이고 둘째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하시면서 세 번째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 주셨는데 너무 깊이 새기려고 애를 쓰다가 그만 까먹었어요.”라고 했더니

“아 그거요. 저도 그 프로그램을 보았는데 세 번째는『수행(修行)』이라고 하셨어요. 그러니까 자기를 닦고, 닦은 것을 행(行)하는 것 즉 살아내는 것을 말하지요.”

라고 명쾌하게 말해주신 맑은 님은 광주 시내에서 오랜 동안「베토벤」이라는 향내 나는 음악감상실을 가톨릭 신자인 친구와 하루씩 교대로 운영해 오신 정옥 보살이었다.

차를 마신 후에 절집 마당에 있는 연못에 가서 은은한 달빛을 받으며 이제 막 피어나려 기지개를 켜고 있는 연꽃들을 볼 수 있었고 완공을 앞두고 있는 티벳박물관과 그 건물을 투영하고 있는 작은 못을 지나서 밤이슬이 내리려 하는 풀밭에 앉아 고요하게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 딱 어울리는 클래식기타 반주와 함께.


호수가 산을 다 품을 수 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아서이다.
우리가 주님을 안을 수 있는 것은
가슴이 넓어서가 아니라 영혼이 맑아서이다.
오! 주님 내 영혼 맑게 하소서. (유경환 시/김정식 곡 「호수」전문)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스님의 방으로 돌아왔고, 잠시 후 맑은 님들은 모두 삶터로 돌아갔다. 스님은 정감과 따뜻함이 배인 작고 낮은 음성으로 이것 저것 내 잠자리를 챙겨 주셨고 나는 오랜만에 늘 가슴 깊은 곳에서 바랬던 고요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나 자주 이 고요함을 동경했었던가. 십 수 년 전 파리에서 종교음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 남프랑스 시골에 있는 생 마땡 수도원에서 그레고리안 전수를 위해 며칠을 지낸 적이 있었다. 속세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고 공부시간과 기도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대침묵이었다. 어느 날 새벽 미사가 끝날 즈음 곁에 있던 프랑스인 도미니꼬 수사가 눈짓과 손짓으로 가리켜 주는 곳을 보았는데 헛간을 개조하여 사용하는 성당의 좁은 문을 통해 아침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밖으로 뛰쳐나가 보았더니 남프랑스 특유의 아침노을이 장관이었다. 문득 눈물이 솟아나면서 또 한 번 ‘고요함의 동경’이 물밀듯이 밀려 와 감당하기 어려웠다. 훗날 아내에게 얘기했더니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요. 함께 살면서 문득문득 당신이 얼마나 그런 삶을 동경하고 있는지 자주 느껴요. 그래서 당신이 자신의 삶의 깊이를 위해 그런 고요한 삶을 얼마 동안 살고 싶다면 나는 언제라도 돕고 배려해 주겠어요.”라고 기쁘게 말한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니 스님께서 방문 앞에서 벌써 기다리고 계셨다. 40여분 동안 절집 뒷산을 돌아오면서 특유의 작고 낮고 느린(한 마디로 고요한) 음성으로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대원사의 역사를 들려주시면서, 가끔씩 큰 나무 사이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석조물 위로 언뜻 보이는 절 주변의 풍광을 놓치지 않으시고 귀뜸해 주셨다. 특별히 태아를 주제로 한 돌무더기와 수석을 통해 생명존중을 일깨워 주는 것, 부모님께 드리는 효를 기억하는 누각, 산신 중의 하나로 여겨지는 성모산신각 등이 독특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어제 밤에 함께 했던 연못을 둘러보시면서, 이 연못 둘레에 앉아 불가에서는 잘 알려진 절집노래 가수인 내 후배 스님의 노래와 내 노래를 함께 들을 수 있는 연주회를 마련하시고 싶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연못 한 가운데 자그마한 동산이 있어서 노래하기에 참 좋을 듯 싶었다. 티벳 박물관 앞에 있는 못을 지날 때 여린 바람결이 지나가고 있어서 투영된 박물관의 모습이 일렁거리자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맑기만 해서는 산을 다 품을 수 없어. 흔들림이 없어야지...”

이 고요한 한 마디가 내 가슴을 파고 들었다.
아! 수행(修行).
맑아진 마음도 흔들린다면 아무 것도 품을 수 없게 된다. 그 맑음을 지켜갈 수 있으려면 닦아야 하고, 또한 닦은 것을 잘 살아내야 한다. 가끔씩 나와 내 노래를 사랑하는 이들에게서 애정 담긴 충고를 듣게 되는데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다.

“김정식 씨의 몫은 맑고 고운 노래예요. 명동 길가에서 거친 노래를 부르고 인권이나 환경을 위한 대사회적인 노래를 부르는 일은 다른 사람의 몫이니 그 쪽에 맡기고 김정식 씨는 자기다운 노래를 불러요. 얼마나 많은 이웃들이 김정식 씨의 맑고 고운 노래를 들으면서 지친 삶의 위로를 받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지 모르지 않지요?”

모르지 않지만 늘 가슴 깊은 곳에서 ‘맑고 고운 노래만 부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맑고 곱지는 않을지라도 내가 두 발 딛고 사는 이 땅 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르는 채 살아갈 수는 없어서 노래를 통해 그것을 알리고 나누는 일 또한 하느님의 기쁜소식(福音)을 전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 오던 터였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알게 모르게 이분법적이고 획일화된 사고에 길들여져 왔다. 그래서 맑고 고운 것과 거친 것은 정 반대의 개념일 뿐 함께 존재할 수 없다고 못 박아 두었는지도 모른다. 세리였던 자캐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 그리고 가련한 두 자매 마리아와 마르타의 죽은 오빠 나자로에게 보여준 자비로움과, 성전 앞에서 환전상들을 내치신 분노는 모두 다 우리가 따르고 본받으며 더 나아가 살아내야 할 예수의 모습이다. 나 또한 예수를 닮아 맑음으로 모든 이웃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어지러운 세상의 흔들림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닦고, 닦은 것을 살아내는 일 또한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리하여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지만 그 파문이 잘 가라앉으면 더욱 잔잔해진다는 루이제 린제의 역설처럼 동경(憧憬)으로 맑아진 가슴에 수행(修行)을 통해 내면의 깊은 고요를 얻고 싶다.

용서는 사랑의 기본이고 사랑의 완성은 정의(正義)입니다.
문득 맑은 님께서 전해준 이 말이 생각난다. 

/ 김정식 2008-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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