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라는 새로운 문화공간이 생긴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우리 삶과 정신에 미치는 영향력과 파괴력은 실로 엄청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는 정보도 사이버 공간을 넘나드는 동안 기정 사실인양 둔갑을 하게 되며, 공공성에 대한 무작정식 신뢰에 판단을 맡긴 채 모두들 별다른 여과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정보제공자의 익명성이나 불확실성을 문제 삼지 않는 이러한 무한신뢰를 바탕으로 사이버 공간에서는 이른바 눈부신 감동을 주어 네티즌의 눈길과 마음길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온갖 거짓이 난무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가 만난 사례도 몇 가지 있는데 속고 당하고 나서 다시 생각해봐도 속수무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널리 알려진 구노의 <아베 마리아>와 오펜바흐의 <쟈클린의 눈물>에 관한 진실이 있다. <아베 마리아>라는 노래는 바흐가 만든 평균율의 선율을 따라 프랑스 작곡가 구노가 가사를 붙인 노래이고, <쟈클린의 눈물>은 베르너 토마스라는 첼리스트가 작곡가인 오펜바흐 사후에 우연히 발견한 이름 없는 연주곡이었다. 발견 후 연주해 본 베르너 토마스 자신이 천재 첼리스트 쟈클린 뒤 프레의 비운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으로 붙인 곡명이 <쟈클린의 눈물>이다. 그러나 오펜바흐가 쟈클린 뒤 프레를 추모하기 위해 쓴 곡이라는 터무니없는 얘기가 널리 퍼져있다.

이미 죽은 사람이 다음 시대 사람을 추모할 수는 없는데도 그럴듯한 이 얘기는 지금도 사이버 공간을 감동으로 수놓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순교한 앵베르 주교를 기리며 구노가 <아베 마리아>를 만들었다는 얘기도 시대가 맞지 않는 거짓이다. 그럼에도 이런 거짓들은 여전히 순진한 네티즌들을 감동시키고 있다. 이제는 <구노의 아베마리아>를 검색창에 치면 진실보다 먼저 뜨는 이런 감동적인 거짓을 만날 수 있다.

구노의 Ave Maria는 그의 친구이자 조선의 순교자이며 후일 영광스러운 성인의 관을 쓰신 성 앵베르 주교를 기리며 만들어진 노래입니다. 우리나라를 위한 구노의 단 하나의 성가입니다.


얼마 전 한 인터넷 카페를 운영하는 지인이 전체 회원들에게 보낸 인사메일을 받았다. 늘상 받는 것이지만 함께 실린 사진의 이미지가 강렬했고 배경음악에 끌려서 한참 읽어 내려가다가, 매우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그럴듯하게 꾸며진 거짓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며칠 후 운영자를 만났을 때 얘기를 해 주었더니 자신은 잘 모르는 일이지만 감동적인 이미지 때문에 어디선가 퍼 온 것이라고 했다. 사실성(Reality)보다 이미지(Image)를 우선으로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요즘은 이미지가 뛰어나지 않으면 대중을 붙잡을 수 없다고 했다.

이미 <구노의 아베마리아>이야기와 <쟈클린의 눈물>에 얽힌 이야기에서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진한 감동을 느껴보았기에 이런 견해에 어쩔 수 없이 동의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가슴 한 구석이 쓸쓸하고 답답하고 그리고 슬퍼졌다. 이렇게 조작되고 꾸며진 거짓 이미지에 가려 사실성과 진정성이 가볍게 처리된다면, 그래서 세상이 자꾸 본질을 회피한 채 거짓으로만 흘러가고 있다면 그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있을까? 가까운 예로는, 거짓투성이인 줄 빤히 알면서도 온 국민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인 경제를 살려줄 것 같은 이미지라는 달콤한 미끼에 끌려서, 섣부른 선택으로 해치워버린 2007년 대선을 생각할 수 있겠다. 겉포장만 잘 되어 있다면 그 이미지 뒤에 감추어진 사실이나 진정성 따위는 확인해 보고 싶지도 않다는 속셈이니 과연 이 일의 결말이 어떻게 흘러갈지 자못 궁금해진다.

어쩌면 예수에 관한 세상의 태도도 그렇지 않을까? 유대교라는 종교에 억매여 해방되지 못한 민중들에게 종교에서 벗어나 해방과 기쁨의 삶을 살아야한다고 말하고 행동했던 진정성은 뒷전으로 밀려 실종되어 버렸고, 오히려 뛰어난 예언자가 나타나서 새로운 종교 하나를 세웠다고 하는 이미지만 살아서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회는 예수께서 바라셨던 「하느님 살아내기」를 권하기보다는 믿음을 담보로 한 새로운 굴레 씌우기에 집착하게 된 것은 아닐까?


물체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자동차 백미러에는 이런 말이 새겨져 있다. 보다 많은 사물을 담기 위하여 백미러의 거울은 어안렌즈를 사용하는데 그 렌즈를 통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만 집착하면 실재한 물체의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워져서 때로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기에 경고를 해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이미지라면 「훨씬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에 해당된다.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지가 이제 좀 더 명확해진다.

한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를 기다리면서 이미지에 집착하여 진정성을 놓쳐버린 히브리 사람들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기를 다짐해 본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안목까지를 쇄신하고 싶다. 쇄신(Aggoirnamento)이란 새롭게 변신하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담겨있으나 그릇된 가치관에 떠밀려 숨겨진 진정성을 새롭혀 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새해에는 이 오래된 새로움(The Old Newness)을 만나고 싶다.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병이 될 수도 있는 세상에서, 진정성을 무시한 채 이미지에만 현혹되기 쉬운 나 자신을 구하고 싶다.

사진:고태환
/김정식 200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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