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종이 인형전시회 개막에 축가 가수로 초대되었다. <프라도 사제회> 관심자 시절, 실습을 겸하여 구미 공단 지역에 있는 <노동자회관>에서 일하면서 근로자들과의 연대를 위해 기타강습을 했었다. 그때 기타를 배웠었던 인명숙 씨는 결혼 후에 공부와 함께 닥종이 인형을 만들게 되어 지금은 그 분야의 탁월한 작가가 되었고 벌써 여러 차례 전시회를 하였는데 구경하러 간 적은 있었지만 축가를 부르는 것은 처음이기에 기쁘고 설레는 마음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따뜻한 느낌을 주는 인형들을 미리 둘러보고 싶은 소망과는 달리 차가 어찌나 밀리는지 개막 시간 직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전시장을 꽉 메운 사람들 사이를 지나 분장실을 겸한 내실로 들어서면서 마음은 다급했다.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음향설치도 해야 하며 기타 조율까지 하려면 초침을 쪼개어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그런 내 사정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분장실에는 미리 고운 한복으로 분장을 마친 세 여자 분이 가야금을 품에 안고 있다가 들어서는 나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날벼락이 떨어진 건 바로 그때이다.

“저~ 장구 쳐 보셨어요?”
“아뇨.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안 쳐 보았는데요.”
“그래도 다른 악기들은 연주를 해 보셨을 거 아니예요?”
“그렇긴 하지만 내가 들고 있는 악기는 기타예요.”
“기타를 연주하신다면 장구도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저희가 지금 가야금 연주와 노래를 해야 하는데 고수가 오는 도중에 차가 너무 막혀서 그냥 돌아가겠다고 전화가 왔어요. 저희는 고수가 없으면 안 되거든요. 그러니 고수를 좀 해 주세요.”
“네?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억지를?? 기타는 현악기고 장구는 타악기잖아요. 그리고 장난삼아 장구를 만져본 일은 있지만 연주는 물론 단 한 번도 제대로 배워본 일이 없다니까요.”
“맘만 먹으면 할 수 있어요. 아니 하셔야 해요. 달리 할 사람이 없거든요.”
“그래요? 나 밖에 할 사람이 없어서 꼭 해야 한다면 할께요. 그러나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최선을 다할 뿐 잘 할 수 는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장구채는 어떻게 잡고 어디를 때려야 하는지 요점만 초고속으로 알려 주세요.”
“걱정 마세요. 생각보다 쉽거든요. 그리고 얼굴을 보니 금방 배워서 잘 하게 생기셨네요.”

그중 선생격인 분이 종이를 가져오셔서 도표를 그려가며 설명을 한다.

“왼손으로 장구 바닥을 치는 것은 「쿵」이고 오른손에 쥔 장구채로 치는 것은「떡」이며, 양손으로 함께 치는 것은「덩」이예요. 오늘 부를 노래는 첫 곡은 중모리에서 자진모리로 바뀌고 다음 곡은 굿거리가락 이예요.”

그러면서 중모리의 12박을「덩쿵떡/쿵떠더덕/덩쿵떡/쿵쿵쿵」자진모리「덩떡쿵떡/덩떡쿵떡」이라고 종이에 적어주었다. 실제 노래에 맞추어 간단한 실습을 해 보였더니 엄지손가락을 올려 보이며 최고라고 격려를 해 주신다.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못하고 내 기타를 꺼내보지도 못한 채 가야금 연주 시간이 되어버렸다. 장구를 들고 나가서 고수 자리에 앉으니 선생님께서 곡목 소개와 함께 나를 소개하고는, 노래하러 왔다가 고수로 앉아 있는 사정을 얘기하신다. 가야금 연주와 노래가 시작되었고 짧은 시간 전수받은 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간간히 선생님께서 눈짓으로 잘하고 있다고 안심을 시켜주셨다.

무사히 두 곡의 고수를 잘 해 내었고 바로 이어지는 내 노래 한 곡을 부르고 들어오니 기다리고 있던 선생님이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장구 연주에 천재적인 소질을 타고 났으니 자신의 강습실로 오면 정식으로 가르쳐 주겠다고 했고, 내가 잠깐 배운 내용이 강습료로 따지면 백만 원에 해당된다고도 했다. 그러니까 내게 내린 날벼락이 백만 원짜리 행운인 셈이다. 더 나아가 한 번도 안 해본 일을 맘만 먹으면 잘 해낼 수도 있다는 믿음을 가슴에 새기는 일은 수억 원을 주고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살아가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을 만날 수 있다. 능력 여부를 떠나서 누군가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면 용기를 내어 최선을 다해 보고 싶다. 오늘은 장구연주였지만 다음엔 사람의 목숨을 건지는 일일 수도 있고 세상을 살리는 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내가 아니면 누가? 지금 아니면 언제?’라는 말을 좋은 말이라고 간직만 할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할 때 꼭 필요한 곳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가슴을 열어두고 살 일이다.

내가 한 마음의 상처를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내가 한 생명의 고통을 덜게 할 수 있다면
내가 숨져가는 흰 물새를 다시 노래하게 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김정식이 번안 및 작곡한 <내가 할 수 있다면> 전문)

/김정식 2007-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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