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낙도 교사의 숭고한 삶에 매료되어 예수를 따라 살기로 결심한 나는 어느 날 또 한 분의 삶의 스승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이 샤를 드 푸꼬이다. 누나와 함께 성당에 나가게 되었지만 이름없는 낙도 교사를 통해 만났던 예수를 그곳에서 다시 만나지는 못한 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미사전례만을 건성으로 만나고 있었다.

어느 날 주일 미사를 마치고 나서 문서선교를 나오신 수녀님들의 수레 곁을 지나게 되었다. 그 동안 대부분의 책들을 도서관에서 만나 왔었기에 수레 가득 전시된 책들이 낯선 느낌이어서 애써 외면하며 지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 눈에 들어오는 한 권의 책이 있었다. 처음 보는 순간에는 그 책의 이름도 내용도 아니었다. 다만 수레의 맨 끝 손잡이 부근에 놓여 있는 그 책이 유난히 오래되어 색이 누렇게 바래 있었다는 기억이다.

‘얼마나 오래도록 팔리지 않은 채 저렇게 저 자리에 놓여 있었을까?’

그 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그 책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는 것과 그래서 수레의 중앙이거나 잘 보이는 곳이 아니라 다른 책들이 돋보일 수 있도록 모서리 끝자리를 메꾸고 있다고 느껴졌다. 어떤 책이든 그 자리를 메꾸어야 하겠지만 왜 하필 그 책이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저 지나쳐 왔었는데 집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니 그게 아니었다. 계속 수레의 맨 끝자리와 오래 팔리지 않아 누렇게 변색이 된 책의 옆면이 떠올랐고 ‘그 책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에 이어서 ‘내가 아니면 아무도 사 주지 않을 것이다’라는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 자꾸 나를 밖으로 내어몰았다. 단순히 내 가슴에 스며든 연민 하나로 다시 성당으로 가 거금(?) 150 원을 주고 그 책을 사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제목이나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 책은 이제 더 이상 그 자리에 놓여있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몇 년이나 세월이 흐른 뒤에 책상 앞에 앉아서 별 생각없이 책꽂이에 눈길을 주었다가 그렇게 내 방으로 와서 그곳에 꽂혀있던 책의 제목을 처음으로 자세히 보게 되었다.

지금은 세련된 디자인으로 바뀌었지만 초판본의 모습은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이 초라한 책의 내용이 궁금해 책장을 넘겼다가 그 밤을 새고 말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유복하고 풍요로운 삶의 조건을 떠나 척박한 사막으로 가서 이교도들과 섞여 살면서 일평생 한 사람도 개종시키지 않았으며, 이교도에게 살해될 때 까지 단 한 사람의 제자도 남기지 않았다는 그의 「단순하고 가난한 나자렛 삶」을 알고 나서 나는 또 몇 밤을 울었다. 그리고 그의 삶은 고스란히 내 여린 가슴에 새겨졌다. 그를 통해 예수가 그토록 갈망하셨던 ‘하느님을 믿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느님을 살아내는 것’과 ‘타인을 내 편으로 만들기 보다는 서로 다른 사람 속에 스며 사는 것’에 대한 기쁜소식(福音)이 마침내 내 가슴에 전해졌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살고 싶어졌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읍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위에 이루어진다면
이 밖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느님께 내 영혼을 바치옵니다.

당신은 내 아버지시기에 끝없이 믿으며
남김없이 이 몸을 드리고 당신 손에 맡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김정식 곡 「샤를 드 푸꼬의 의탁의 기도」전문)

훗날 일산신도시 건설로 철거된 밤가시골에 있던 「예수의 작은자매들의 우애회」수련소에 갔을 때 저녁기도 때 들었던 기도문이 내게는 그대로 노래로 왔다. 그리고 다시 얼마 후 그레고리안 공부 때문에 파리에 살던 시절, 내가 속해있던 「파리 그레고리오 성가대」연주를 위해 갔었던 스위스 프리부룩의 몽블랑 산자락에서 「예수의 작은형제들」을 만나 며칠을 함께 지내게 되었는데, 한국을 떠난지 오래된 형제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다가 비로소 원문을 만나 다시 원문으로 된 악보를 정리하기도 했다. 파리에 사는 동안 입구 벽면에 ‘샤를 드 푸꼬가 회심을 한 곳’이라고 새겨놓은 쌩오귀스땅(Saint Augustine)성당에 가서 혼자서 고요하게 이 노래를 부르면서 나 또한 그분을 통해 만난 예수의 삶을 가슴에 새겼다. 버림받고 소외받은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간직한 채 서로 다른 사람들 속에 섞여 살고자 했던 샤를 드 푸꼬의 원의(原意)를 따르려는 수도자들은 오늘날에도 공동체 식구 중 4분의 1은 이교도인 무슬림 지역에서 산다. 그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에게 전교를 하거나 개종을 시키는 일은 없고 그냥 섞여 산다. 샤를 드 푸꼬가 그랬던 것처럼. 예수께서 그랬던 것처럼.

/김정식 2007-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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