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 가는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기 위해 단풍놀이가 한창인 이 때, 대구 광주 대전을 돌아오는 초청 일정을 다녀왔다. 자연을 만나는 풍요로운 기쁨은 아니지만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로 매번 달라지는 이웃들을 만나는 싱싱한 기쁨도 가슴 벅차게 아름다운 것이다. 거기에다 여행 중에 잠시 만나고 헤어지는 사람들과의 단편적인 나눔 또한 삶의 재미를 더해주며, 미리 준비해간 책을 읽다가 간간히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한가로운 시골 풍광을 바라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기쁨이다.

대구에서 하루피정 강의를 마치고 광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다. 우등고속보다는 일반고속을 선호하는 나로서는 드물게 다니는 배차시간을 맞추기 위해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을 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좌석예약까지를 해두게 된다. 자주 여행하는 친구의 조언대로라면 기사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서 기사님의 복장과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가장 쾌적하다고 한다. 고속버스의 실내온도를 기사님께서 조절하는데 대부분 승객들의 입장보다는 자신이 쾌적하다고 생각 되는대로 조절해 두기 때문이다. 근무조건이 열악한 기사님들에게서 틀에 박혀 예절에 가까운 친절을 가끔 만날 수 있을 뿐 승객들의 입장을 헤아리는 진정한 친절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여겨진다.

가을 속을 잘 달려가던 우리 차가 지리산 자락을 지나면서 제 속도를 내지 못한다고 모두 답답해 하다가 지체원인이 된 사고현장을 지나면서 너나없이 한숨을 쓸어내린다. 반대쪽에서 오던 봉고차가 차선을 넘어와 승용차와 정면충돌을 한 것이다. 그곳을 어렵게 통과하여 가까운 휴게소에 닿았다. 모두들 대형사고 현장을 보고난 뒤라서 내릴 생각을 안 하고 활기 잃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기사님께서 투박한 전라도 사투리로 안내방송을 하신다.


“잠시 이곳 휴게소에서 쉬었다 갈랍니다. 내리셔서 바람도 좀 쐬시고 가볍게 운동도 쪼깐(좀) 허십시다. 우리가 이라고 다니는 것도 다 살자고 하는 것인디, 모다들 힘을 냅시다. 15분간이지만 좋은 휴식이 되기 바랍니다요.”

말씨가 얼마나 정겨운지 잘 알고 지내는 이웃집 아저씨 같다. 모두 굳었던 얼굴이 풀어지면서 엷은 미소를 띠며 차에서 내려 휴게소를 향한다. 약속된 15분 후에 차로 돌아온 기사님은 자상한 표정으로 모두 잘 타셨는지를 잘 살피신 다음, 다시 한 번 안내를 하신다.

“잘 들 쉬셨습니까? 죄송하게도 사고지체로 많이 늦어졌읍니다만 막히지만 않으면 도착지까지 1시간 5분 정도가 소요되겄습니다.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허니께 안전벨트는 꼭 매시고요. 장거리 여행으로 지루하거나 짜증이 날 수도 있응께 가능하면 즐거운 마음을 갖도록 함께 노력헙시다잉~.”

정말 감동이다. 느리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찌나 정겨운지 여행에 지친 심신을 평안히 달래어 준다. 그 평안함을 자장가 삼아 잠시 잠이 들었다 깨었더니 벌써 도착하였는지 모두들 내릴 채비를 하고 있었다. 차가 서고 사람들이 하나 둘씩 내리는데 기사님은 운전석 옆에 서서 일일이 인사를 하신다.


“편안들 허셨습니까?. 안녕히 잘 가십시오. 저를 잘 도와줘서 고맙습니다. 만나서 반가웠읍니다. 언젠가 또 뵙겄습니다잉~.”

넉넉하고 편안한 웃음으로 모두에게 인사를 마치고 다시 운전석에 앉아 문을 닫을 즈음 기사님의 얼굴을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다. 차고지로 움직이며 닫히는 앞문 틈으로 기사님의 얼굴과 함께「중앙고속 권덕순」이라고 가슴에 찬 하얀 명찰이 보인다. 과잉친절사례(?)로 고발전화를 하기로 가슴에 새기면서 돌아서는 내 발길이 가볍다.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너희 살을 떡처럼 떼어 달라고 하지 않으마
너희 피를 포도주처럼 따르어 달라고 하지 않으마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앉은 그 자리에서 조그만 틈을 내어주는 것
조금씩 움직여 작은 곁을 내어주는 것
기쁜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박해석 시/김정식 곡 「기쁜 마음으로」전문)


쌩떽쥐페리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자유라는 개념을 백화점에서 내 맘대로 물건을 고르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자유란 가장 자기다운 일을 할 때 느껴지는 것이다. 어부가 고기를 낚을 때나 조각가가 조각을 하고 있을 때처럼...”

권덕순 기사님이 특별하게 좋은 일을 한 것은 아니다.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으로써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다 한 것 뿐이지만, 가장 자기다운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하고 계셨던 그분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아무리 열악하고 혹독한 처지에서도 우리는 자유를 선택할 수 있다. 기쁜 마음으로.

/김정식 2007-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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