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수도원 기행-12]

▲수도원 종탑 아래에 있는 마을의 불빛들과 내리고 있는 비와 구름과 어우러져 마치 빛살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유럽에 살다보면 ‘하나의 유럽’이라는 말이 단순히 구호가 아니라 생활의 영역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있음을 느낀다. 기차를 타면 특별한 제재 없이 다른 나라에 갈 수 있고, 돈을 일일이 환전할 필요도 없다. 저가 항공사들의 출현으로 기차보다 싼 항공권을 구해서 꽤 먼 나라를 여행할 수도 있다. 대학들도 다른 나라에서 취득한 학점을 서로 인정하기 위해 제도를 통일시키고 있다. 이러한 통합된 유럽의 국경선은 점차 동유럽으로 넓혀지고 있는 추세이다. 많은 동유럽인들이 서유럽 국가에 와서 일을 하고 있고,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폴란드나 슬로바키아 등의 사제들이 이탈리아나 독일 등의 교회 안에서 사목활동을 하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이렇게 좋은 여건이지만 비행기를 타고 이탈리아를 벗어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가장 발목을 잡는 것이 이탈리아의 ‘체류허가증’이다. 학생들은 1년에 한 차례씩 갱신을 해야 하는데, 새 체류허가증을 받으려면 근 1년을 기다려야 된다. 그래서 이곳에서 지내는 대부분 시간들은 체류허가증 없는 체류상태가 된다. 만일 저가 항공사(스페인 왕복 비행기표가 만 원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를 이용해 외국에 나가더라도 이탈리아의 체류허가증이 없으면 유럽에서 불법 체류하는 사람으로 몰릴 수 있다.

2007년 성탄 방학에 성 안셀모 수도원에서 함께 살고 있는 빠꼬미오 신부와 함께 헝가리의 판논할마(Pannonhalma) 수도원을 방문하였다. 마침 두 사람 모두 정식 체류허가증을 가지고 있는 흔치 않는 시기였고, 부다페스트까지 가는 저렴한 비행기표를 구입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이곳에서 공부한 판논할마 수도원의 수사와의 친분 등 모든 조건이 딱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판논할마 수도원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비마저 내리는데

판논할마 수도원은 여러 베네딕도회 연합회 중 하나인 헝가리 연합회의 총아빠스좌 수도원이다. 996년에 왕실에 의해 설립되었고, 당시 왕인 성 스테파노의 후원으로 1001년에 성당이 축성되었다고 하니 천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수도자들을 프라하에서 초빙하여 수도원을 세웠고, 헝가리의 역사와 거의 함께 한 수도원인 셈이다. 현재 이 수도원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12월 22일 밤 7시가 넘어 부다페스트의 작은 공항에 도착했을 때 마중 나오기로 되어 있는 야코 수사는 보이지 않았다. 겨울철이라 오후 4시가 지나면 밤처럼 깜깜해진다고 하는데,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주위에는 온통 독일말과 비슷한 글자들이 적혀 있었는데, 그건 독일말도 영어도 아닌 헝가리말이었다. 헝가리 글자도 독일어처럼 글자위에 점들이 많았는데, 간신히 읽기야 하겠지만 그것으로는 무슨 뜻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도 없었다.

3,40분 기다리고 있는데 드디어 야코 수사가 나타났다. 저가 항공사가 이용하는 작은 공항이다 보니, 다른 공항과 착각을 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도원은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에서 서쪽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차로 3시간 정도 걸렸다. 그 먼 거리를 마중 나온 야코 수사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비오는 고속도로를 달려 근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수도원에 도착했다. 수도원이 가까워지자 언덕위에 우뚝 솟은 수도원의 종탑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향해 밝게 조명이 되어 있는 종탑은 언덕 아래에 있는 마을의 불빛들과 내리고 있는 비와 구름과 어우러져 마치 빛살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음날 일어나서 언덕 아래 마을을 보니 붉은 지붕들이 아주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본래 로마제국 시절부터 헝가리에 로마군단이 주둔해 있었고, 당시 이 지역을 ‘판노니아’라고 불렀다고 한다. 수도원이 있는 이 언덕은 ‘성 마르띠노의 산’ 혹은 ‘언덕’이라 불렸는데, 한때 로마의 군인이었다가 나중에 투르의 주교가 된 성 마르띠노도 현재의 헝가리 지역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수도원 이름이나 그 역사 안에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이 연관되어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보았다.

▲수도원의 성탄.

헝가리 성탄대축일 전례

아침에 아빠스께 인사를 드렸다. 연세가 많으시고 인자하신 아빠스께서는 독일어로 여러 가지 질문을 하셨다. 아빠스로 선출되기 전에 수도원 안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오랫동안 독일어를 가르치셨다고 한다. 우리의 독일어 실력이 충분치 못하여 많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수도원에는 30명 정도의 형제들이 살고 있었는데, 연령대별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영어나 이탈리아어를 아는 수도자들은 많지 않았고 주로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배운 것 같았다. 로마 안셀모 수도원에도 두 명의 이곳 수도자가 생활하고 있다. 한 분은 안셀모 대학의 교수이고, 한 분은 교황청에서 일하고 있다. 며칠 동안 수도원 안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느낀 것은 아주 내실 있는 수도원이라는 생각이었다.

시간경은 모두 헝가리말로 바쳤다. 헝가리어가 한국어와 같은 우랄 알타이 어족에 속하기 때문에 뭔가 쉽게 건질 것이 없을까 하는 기대도 했었는데 그런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단지 독일어를 닮은 알파벳을 간신히 읽을 수 있을 뿐이었고, 내용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미사 때 그레고리오 성가를 라틴어로 부를 때에는 오히려 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성탄 대축일 전례는 한 라디오 방송국을 통해 모두 생중계되었다. 헝가리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로 인접한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헝가리인들도 청취한다고 했다. 이 수도원의 기도 소리는 힘이 있으면서도 아주 깨끗하였다. 도드라지게 튀어 나오는 소리 없이 투명한 하나의 소리처럼 느껴졌다. 이러한 소리의 배경에는 고딕식의 아담한 성당도 한 몫 했으리라 생각된다. 오랜 역사를 지닌 수도원답게 건물들은 고딕식, 로마네스크식, 신고전주의 등의 여러 건축 양식들이 혼재해 있었다.

▲수도원 식당

▲40만권의 고서적이 소장되어 있다는 도서관.

식욕이 떨어질만한 그림으로 가득한 식당.. 과식을 막으려고

시간이 날 때 마다 야코 수사가 수도원 여기저기를 안내해 주었다. 처음 수도원 식당에 들어갔을 때 마치 왕실에 딸린 식당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벽과 천정을 온통 그림으로 장식해 놓았다. 하지만 그 그림들은 수도자들이 과식하지 않도록 성서의 이야기 중에서 식욕이 떨어질 만한 내용들을 그려놓은 것들이었다.

성탄대축일과 부활대축일은 식당에 전깃불을 켜지 않고 촛불을 켜고 식사를 한다고 했다. 수도원의 대축일은 성당의 기도와 식탁에서 느낄 수 있는 법. 오후 내내 주방담당 수사와 아주머니가 저녁 식사를 준비하더니 아주 근사하게 상을 차려 놓았다. 저녁 식사 후에는 지붕 아래에 있는 큰 휴게실에 모든 형제들이 다 모였다. 성탄 트리가 장식되어 있고 그 아래에 형제들끼리 서로 교환하는 선물들이 놓여 있었다. 우리들을 위한 선물도 있었다.

선물을 뜯어보면서, 음료를 마시면서 공동휴게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노인 수도자들이 모인 탁자에서 헝가리의 성탄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윽고 모든 이가 조용히 그 노래들을 합창하였다. 그러는 동안 아빠스와 수련자가 성탄 트리에 촛불들을 하나씩 켰다. 그렇게 조용히 아기 예수님 탄생을 맞이하였다. 아빠스께서 창문을 열고 밖을 보라고 해서 보니 흰 눈이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오랜만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헝가리에서 맞이하였다.

성탄대축일 미사 후에는 야코 수사가 수도원 도서관을 보여주었다. 40만권의 고서적이 소장되어 있다는 도서관은 내용상으로나, 아름다움으로나 이 수도원의 자랑거리 같았다. 이 밖에도 형제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동방이나 잡지실, 수련실 등이 잘 꾸며져 있었다. 안내를 마치고 야코 수사가 자신의 방으로 우리를 초대하였다. 야코 수사는 파리에서 전례학을 공부하였고 로마 안셀모 대학에서 성사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수도원 성당

방에서 보여준 논문이 한 권 있었는데 시몬 베드로 아빠스의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자신이 논문을 쓸 때 참고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렇게도 인연은 이어지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아빠스께 인사를 드리는데, 아마 우리가 최초로 방문한 한국인일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나중에 들어보니 우리 수도원의 김 로마노 수사가 독일에서 생활할 때 뮌스터슈바르작 수도원의 수도자들과 함께 방문했었다고 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주 특별한 체험이었던 것 같다. 오늘도 성 마르띠노의 언덕에서 열심히 생활하고 있을 이 분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한다.

참고할 만한 누리집
http://www.bences.hu/en/  (헝가리 판논할마 수도원)
http://blasio.tistory.com/search/ 판논할마 (판논할마 수도원의 사진들과 이 수도원의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을 수 있다.)

*이 기사는 성베네딕도 왜관수도원에서 발간하는 <분도>지의 편집진과 상의하여 연재하는 글입니다.

글, 사진제공 박현동 블라시오 신부 (성베네딕도수도회 왜관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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