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8월 3일자 981호 <평화신문>과 2610호 <가톨릭신문>이다.



언론은 특히 신문사 밥을 먹는 기자는 바른 가치관과 동시에 좀 비딱한 생각도 가져야 한다. 경상도 말로 사물에 대해 ‘빼딱하게’ 접근하는 문제의식과 승부근성은 기자들에게는 필요한 덕목 중에 하나다. 교회신문 한계중의 하나는 ‘좋은 생각’과 ‘바른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교회신문 펼치면서 잠이 든다. 그래서 교회신문이 병원에 많이 제공되는지는 모르지만 신문은 마음의 안식이나 심리치료용이 아니다. 신문의 기능에 대해서 모르면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좋은 생각’과 ‘바른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교회신문

교회신문들이 매주 새로운 이슈로 1면부터 24면을 채운다고해도 그것이 독자에게 즉 그리스도교 신앙인에게 다가갈 수 없다면 그것은 황망한 아니 한가한 신문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그 원인중의 하나는 뭐니 뭐니 해도 ‘문제의식의 상실’에 있는 것이다. 교회의 기관지를 자처하는 입장을 이해하고 남음이 있지만 해야 할 보도는 당연히 해야 그것이 언론인 것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보도는 애초 꿈꿀 수 없다하더라도 사회에서 일어나는 관심사를 -이것도 무리라면- 가톨릭과 관련되어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이것은 뭐야?”라는 원초적 질문은 해야 되는 것이다. 그렇게도 취재의욕이 생기질 않는다는 것일까? 그렇게도 뉴스 가치의 저울질을 해야 만족한다는 말인가? 지하철 안에서 교회신문을 보는 사람을 보았는가? 그렇다면 이 신문들은 어디서 누가 보는 것인가?

7월 7일 흔히 메이저급이라고 불리는 신문에 ‘천주교’란 용어가 들어간 큰 광고가 실렸다. 그것도 광고부 사람들이 평가하는 ‘길목’에 실렸기에 효과도 컸을 것이다. <한국천주교회는 더 이상 상처받을 수 없습니다> 광고가 그것이다. 그리고 광고주체로 등장한 단체는 ‘뜻있는 천주교 평신도 전국협의회’ ‘천주교 뉴라이트 전국협의회’ ‘천주교 북한인권과 민주화를 위한 기도회’였다.

필자는 그 광고자체 혹은 광고를 실은 단체를 평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누구의 의사이든, 어떤 내용이든 그것은 당사자의 몫일 따름이다. 누구든 말하고 싶은 것은 말하게 해야 한다. 그것을 옳다, 틀리다가 아니라 동의한다, 동의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 민주사회의 바른 모습일 것이다. 세상이 어찌 한 가지 생각만을 가지고 있겠는가, 세상이 어찌 똑같은 사람만 살 수 있겠는가? 자,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언론은 여기서 슬쩍 빠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가 언론의 텃밭인 것이다. 마이크와 취재수첩을 들고 사무실을 뛰어나갔어야 한다.

기자님들 그 광고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혹시나 하고 7월 7일 이후 필자는 한 달을 기다렸다. 그러나 역시 교회신문에는 ‘바른생활’만 보도되고 있다. 한 번 물어보자. “기자님들 그 광고가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현역으로 복무중인 의경도 경찰의 강경진압방법에 동의할 수 없다고 양심선언을 하는데 교회신문은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취재를 하지 않는 것인가요? 그렇다면 정말 문제 아닌가요?” 7월 7일 광고 일주일후 7월 14일 비슷한 신문에 ‘대한민국 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의 <이제는 불법·증오·저주의 촛불을 거두고, 법치·화합·격려의 횃불 밝힙시다!!> 광고가 실렸다. 그때 ‘대한민국 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에 참가한 단체 중 하나로 오용된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평의회’란 이름은 씁쓸할 헤프닝이었다. 그래도 교회신문은 ‘모르쇠’였다.

다시 말하지만 ‘천주교’란 용어가 들어가면 기자들이 민감해 질 필요가 있다. 보통 교우들은 상대방이 묵주반지만 끼고 있어도, 혹은 밥 먹을 때 성호기도만 해도 아는 체를 한다. 또 때로는 천주교는 ‘마리아교’라고 억지주장을 펴는 사람이 있으면 잘 모르는 교리까지 앞세워 바로 잡으려 애를 쓴다. 하물며 교회신문이 대한민국에서 잘 나가는 신문에 큼지막한 광고(요즘 잘 나가는 검은색 테두리에 글자가 빡빡한 광고)에 버젓이 나와 있는 ‘천주교회’와 ‘천주교’란 단어에도 “뭐야?”하고 취재수첩을 들지 않는다면 언론인이 아닌 것이다. 신발을 신지 말고 질질 끌고 길을 나서라. 그럴 때 머리위로 ‘빼딱한’ 질문들이 쏟아질 것이다. 

/김유철  200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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