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모니터링 자료는 11월 25일자 가톨릭신문 2575호와 평화신문 946호이다.

11월 13일 MBC의 ‘PD수첩’에서 ‘기적인가, 사기인가-나주성모동산의 비밀’ 편이 방영된 이후 ‘나주’와 ‘윤율리아’는 인기검색어가 되었다.
방송과 관련하여 교회신문들의 관심 또한 예외는 아니다.

가톨릭신문은 2575호에서 2면 ‘교구장 공지문 신앙으로 수용을’, 4면 사설 ‘철저한 변별력과 순명이 필요하다’, 5면 데스크 칼럼 ‘교도권과 순명의 정신’, 7면 해설기사 ‘그릇된 신심행위 교도권 판단 따라야’를 보도하며 교도권 강조에 중점을 두었다.

평화신문은 946호에서 1면 ‘나주 윤율리아 관련집회와 의식 가톨릭 신앙행위와 무관한 것’, 2면 사설 ‘올바른 신앙생활 교육강화를’ 통해 식별에 중점을 두었다.

‘나주 윤율리아’와 관련된 지나간 교회신문의 기사를 검색하여 보면 신문사 독자적 취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광주대교구를 비롯한 몇몇 교구에서 발표한 사목권고와 공지에 관련된 내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감추는 게 능사가 아니며 보도 자료에 의지하는 것은 언론의 기본자세가 아니라는 것이 이번 ‘PD수첩’을 통해서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 교회언론이 그동안 ‘사적계시’나 ‘기적’에 대하여 소극적 보도를 한 것에 비하면 MBC의 보도 및 접근자세는 자못 진지하다. 나타난 현상에 대한 비판적 접근, 현지 확인, 당사자들과의 인터뷰 등등은 현장을 발로 뛰는 보도의 전형이다. 방송과 신문의 차이를 일방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여 예산운운 하는 이유를 대지마라. 밥 먹을 때 필요한 것은 ‘식욕’이지 ‘숟가락’이 아니다. 이러다가는 결국 교회안의 많은 이슈들이 ‘100분 토론’의 주제가 될 날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평화신문은 사설에서 “치유기적이니 사적계시니 하는 문제에 대해 그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바로잡는 교회 노력은 중요하다”라고 했다. 동의한다. 그러나 다시 제의한다. 그 문장에서 ‘교회’란 단어 대신에 ‘언론’이란 단어가 들어간다면 더욱 어울리는 말이 될 것이다. 추상같은 언론의 질책은 법 이상의 것이다. 일반 언론의 한계도 있다. 그들이 나타난 현상과 그와 관련된 논란를 보여줄 때 교회 언론은 한 발 더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피눈물이 흐르고, 장미향이 진동하고, 성혈과 성체가 내려온 들 그것이 “당신의 신앙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말이다. 밀떡이 성체로 성변화 하는 미사에 참례하는 가톨릭신자가 정체불명의 무엇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감격한다면 “그대의 신앙은 동춘서커스에 불과하다!”고 일러줄 존재는 교도권이 아니라 언론의 목소리인 것이다.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독자를 야단치라는 것이 아닌 기사로서 말하라는 것이다.

독자로서는 알 수 없는 이번 일에 동조하는 몇 명의 사제와 추종자들이 있는 모양이다. 1985년에 ‘나주’의 일이 시작되었고 1998년 광주대교구장의 공지를 비롯해 거듭해서 발표되는 주교들의 공지에 대하여 교도권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면 그 원인은 무엇일까?

가톨릭신문은 이번 주 기사 네 꼭지 모두에서 ‘교도권’을 강조하고 있지만 왠지 소귀에 경 읽는 기분이다. ‘나주’가 성모발현은 아니지만 우리의 비극(?) 혹은 희극(?)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식별되어 교회의 인준을 받은 외국의 성모발현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화신문 6면에는 성모발현 150돌을 맞는 ‘루르드 성모성지 희년선포’ 소식이 실려 있다. 교회의 인준을 받은 소수의 성모발현을 비롯한 ‘기적’ 역시 즉시 인준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과정을 겪은 것인지, 조사결과 인준이 좌절된 예는 어떤 경우였는지 등등은 좋은 선례가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신앙인들이 보인 교도권과 순명의 태도는 모두에게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될 것이다.

바로 거기에 교회 언론의 몫이 있다.
교회 밖 언론이 웃는다. “발로 뛰는 보도를 한 것뿐인데..”

/김유철 200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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