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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교의 권위적 사고방식, 교회 내 소통 막아”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제9차 심포지엄 열어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연구원장 함세웅 신부)은 지난 10월 27일 오후 2시 명동가톨릭회관 3층 강당에서 제9차 심포지엄을 열었다. ‘소통-교회, 어떻게 나누고 함께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백낙청 교수의 기조강연과 김진화, 이재학 신부의 발제가 있었으며, 논평자로 황종렬, 김정용 신부 등이 참여하였다.

통교는 친교의 일치를 이루는 본질적 요소

이날 교회 내 소통의 문제를 다룬 이재학 신부(대구 가톨릭대학)는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들을 포함하는 하느님 백성은 성령 안에서 나누는 친교를 통하여 보편적 성격을 드러내며, 공통적인 존엄성으로 일치를 이룬다고 설명하였다. 여기서 교회 안의 구성원들 사이에 이뤄지는 통교는 ‘친교의 일치를 이루는 본질적 요소’라고 하면서 이를 통해 교회가 역동적인 생명력을 유지시킨다고 말하였다. 여기서 성직자는 이러한 하느님 백성의 친교와 일치에 봉사하는 직무이며,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재학 신부는 ‘그리스도가 머리라면 몸통은 평신자들이며, 성직자들은 발’이라고 하면서, 발이 몸통의 소리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면서, 평신자들의 목소리를 잘 들을 수 있는 성직자의 품성을 요구하였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 역시 육화사건을 통해 자기를 포기함으로써 인간에게로 통교하였으며,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스스로 낮아짐으로써 통교(자기 계시)를 완성했다고 보았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라는 요한복음을 인용하며 먼저 자신을 내어주는 겸손한 사랑의 통교를 요청한 것이다.

교구장 주교의 인식과 실천 상의 괴리

이재학 신부는 하느님 백성인 몸에서 나오는 소리를 발인 주교와 발가락인 사제들이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이러한 점에서 한국교회의 현실을 따갑게 비판하였다. 이재학 신부는 2000년 대희년과 서울대교구 시노드를 앞두고 정진석 추기경이 발표한 사목교서를 인용하면서 교구장의 인식과 실천 상의 괴리를 꼬집었다. 정추기경은 사목교서에서 “이 변화와 위기의 시대를 직면하며 교회는 하느님 백성 전체의 소리와 소망을 잘 들어야 할 것”이라면서 “시노드는 교구의 여러 구성원들이 함께 기도하는 장이 될 것이며 교회와 세상이 요구하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며 “교회와 세상의 기쁨과 슬픔을 헤아림으로써 하느님의 뜻이 진정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와 정진석 추기경은 오히려 주교와 성직자, 성직자 상호간의 소통을 그동안 단절시켜왔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익히고 보편화시키려는 목적에서 1967년에 창간한 <사목>지를 40년이 지난 2007년에 편집진 사제들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주교회의에서 일방적으로 폐간조치한 것 ▲ 함세웅, 김택암 신부등 원로사제들이 정진석 추기경을 세 차례 방문하여 시대의 징표를 읽는 교회의 예언자적 역할을 호소하고,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의 편에 서서 복음적 정의를 지키려고 했던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려고 하였으나 냉소적인 반응으로 대화를 단절시킨 점 ▲ 2002년 이미 안식년을 가졌으며 수락산 성당에 부임한지 1년6개월밖에 되지 않은 전종훈 신부(정의구현사제단 대표)를 석연치 않은 이유로 다시 안식년을 가지도록 인사조치한 점 등을 사례로 들었다. 이를 두고 이재학 신부는 친교하는 성령의 작용을 정추기경이 거부한 것이며, 하느님 백성과 정의구현사제단의 소리에 대한 소통의 단절이라고 규정하였다.

심판자와 관리자(CEO) 역할이 주교 직무인가

이재학 신부는 이러한 소통의 단절이 잘못된 교회관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보았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보편사제직과 더불어 특별히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주교의 고유한 직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주교의 가르치고 다스리는 권한은 그리스도를 모범삼아 섬기는 자세와 자부적인 사랑에서 비롯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주교들은 초기교회 혼란기에 나타났던 호교론적이고 배타적인 교회 지도자의 모습을 여전히 지니고 있어서, 언제나 모든 문제에 대해 판단하고 결정하고 심판함으로써 교도권을 수호해야 한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유교적인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고방식과 결합하여 봉사자로서의 올바른 권위가 아닌 심판자로서의 권위의식을 낳았다고 보았다.

한편 한국교회 주교들은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두고서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가는 착한 목자의 태도를 버리고, 대다수의 이익을 대변하다면서 상대적인 가치를 중시하고, 죽음의 문화에 기초한 극단적인 자본주의 논리인 신자유주의적 실용주의 가치를 더 높이 평가하는 관리자(CEO)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하느님 백성의 신앙감각을 신뢰해야 한다

따라서 이재학 신부는 가톨릭교회와 주교들이 예수의 모범을 따라서 ‘상대적인 세상의 가치가 아닌 절대적 복음의 가치를 살아야’ 하며, ‘성령께서 마치 자신의 성전에 계시듯 하느님 백성의 마음에 머물기 때문’에, 그들의 신앙감각에 주의를 기울여야 살아있고 역동적인 교회의 생명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성령 안에서 맺는 친교의 중심에 주교가 있다는 ‘오해’에서 벗어나, 친교의 중심에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깨닫고, 한 방향을 함께 바라보며 걸어가는 나그네들임을 명심해야 이 길에서 하느님 백성이 서로 연결되고 봉사하는 통로가 마련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학 신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헌장>에서 인용한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의 말을 다시 인용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하였다. “여러분을 위하여 내가 있다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하여 줍니다. 실제로 여러분에게 나는 주교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인입니다. 전자는 직무의 이름이며, 후자는 은총의 이름입니다. 전자는 위험한 이름이지만 후자는 구원받을 이름입니다.”

치명적 소통장애를 겪고 있는 교회 지도력

김정용 신부는 친교 개념이 본래 교황을 정점으로 이루어진 교회의 위계적 친교와 구조를 강조하려고 사용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하느님 백성 개념과 상충하는 측면이 있음을 지적했다.

논평을 맡은 김정용 신부(광주 가톨릭대학)는 이재학 신부가 지적한대로, 한국천주교회 지도층은 교회의 위계에 대한 권위주의적이고 편협한 이해와 유교의 부정적 유산인 가부장적 사고가 부당하게 결합되어 일방적 지도력을 낳았고, 특히 교회 안에 사회적 약자들의 소리가 들어설 수 없는 상황을 다시 요약하며, 이를 ‘치명적 소통장애’로 규정하였다. 한편 교회의 위계구조를 강조하기 위해 강조한 ‘친교’(주교를 중심으로 친교를 이루는) 개념과 교회구성원의 동등한 다양성을 표현하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개념이 사목현장에서 혼선을 자아내고 있다는 교회론적 한계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친교’가 교회 지도층에 대한 막강한 권력 집중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교계직무가 무엇보다 진리 선포와 소통을 위한 봉사라는 점이 다시금 강조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세상과 교회, 그리고 교회 안의 소통 문제를 다룬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세상과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교회상을 모색하면서, 교회가 세상 속에서 구원의 보편적 성사가 되기 위해서 세상의 소리에 민감해야 함을 지적하고 있지만, 결국 교회 안에서도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교회 안에서 소통이 단절된 이유를 따져보는데는 유효하였으나, ‘소통-교회, 어떻게 나누고 함께 할 것인가’라는 심포지엄의 주제에 맞게, 교회가 세상과 통교하고, 교회 안에서 원활하게 소통하는 방법이나 대안을 찾는 데는 미흡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총평을 맡은 함세웅 신부의 말대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교황권을 제약하고 주교권을 강화하는 측면이 많았다면, 다음 공의회에서는 사제들을 위한 공의회가 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만큼, 교회안의 권력분배가 좀더 민주화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시사해 주는 자리였다. 한편 이번 심포지엄에서는, 소통의 문제를 다루면서, 김선실(천주교여성공동체 대표)씨의 지적대로, 평신도와 성직자들 사이의 소통 문제가 원론적 차원에서만 언급되었을 뿐 거의 소외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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