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변영국]

예전에, 말하자면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카페였을 때 몇 번 글을 썼었는데, 다시 원고를 써 달라는 말씀을 듣고 홈페이지를 열어봤다.

…… 그냥 쓰면 안 되겠다.
분명한 인터넷 신문으로 둔갑한 <지금여기>는 과거의 작은 카페가 아니었고 뭔가 있어 보이는 무엇으로 내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예전처럼 1시간 만에 후딱 쓰는 원고를 썼다가는 금방 들킬 것 같다. 낭패다.
하지만 나에게는 뭔가 조직적으로 사고하고 준비하고 치밀하게 계산하는 능력이 없다. 나는 아주 즉흥적이고 그것 때문에 지탄과 동시에 찬사도 받아 왔다. 어찌 되었거나 나는 나다.

아무튼 나는 이제부터 나의 공간에서 ‘가벼운’ 것으로 ‘무거운’ 것을 대체할 생각이다.
왜 그런고 하니 사람들은 까닭 없이 ‘진지한’ 것은 옳고 ‘농스런’ 것은 그르다는 관념을 신봉하고 있는 듯한데, 모든 정치 모리배는 대개 진지하고 대부분의 아이돌 스타는 대체로 농스럽다는 것에서 그 관념이 얼마나 허위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가톨릭의 고답적 체면주의, 혹은 배타적 형식주의를 어디까지 끌어안고 비척대야 하는지 이제 슬슬 고민하기 시작한 나의 신앙의 역사가 그런 결심을 하게 한다.

지금까지가 이제 글을 쓰게 된 필자로서 나의 ‘자기소개’ 쯤 되겠다.
아무튼 내가 쓰는 이 ‘자투리’가 재미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나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당연히 데모를 했고 길거리 싸움부터 스크럼 행진까지 많은 것들을 했다.
소위 전략이나 전술을 짜는 그룹과는 아예 거리가 먼 관계로 나는 그저 각목을 들고 후려치기에 바빴던, 말하자면 ‘민주 조폭’이었다.
(민주 조폭? 그거 기가 막힌 명칭인 듯하다)

그 때 우리가 참 많이 불렀던,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암송했던 노래가 바로 ‘훌라송’이었다.
이런 거다.
‘전두환을 처단하라 훌라훌라, XX동지 합세하라 훌라훌라 …’

뭐 이렇게 아주 단순한 곡조를 따라, 마치 노동요 소리 매기듯 선창자가 소리를 매기면 모두 따라서 불러 대는 노래였는데 ‘모든 강력함은 단순하다’는 절대 명제를 반증하듯 이 노래를 부르다 보면 괜히 전부 하나가 되는 느낌이 들어 각목을 잡은 손에 힘이 가곤 했던 것이다. 요컨대 이 노래는 당시의 아드레날린이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부르다 말고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거 너무 재미가 없는데. 뭐 좀 기발한 것 없을까?’
말로는 전두환을 처단하자고 죽어라 외치면서 우리는 전두환의 실물을 본 적이 없었다.
미제 타도를 외치지만 영어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녀석들이 드물었던 것도 문제였다.

▲ 80년대와 달리 오늘날 집회는 재치가 있다. 2011년 7월 31일 부산지방경찰청을 둘러싼 '희망의 버스' 참가자들이 '너희는 고립되었다'는 손피켓을 들었다.

그저 계백장군처럼, 혹은 제다이처럼 도열해서서 오뉴월 뙤약볕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서글픈 전경들만이 우리의 상대였고 우리는 하릴없이 그 녀석들을 때렸고 그 녀석들 역시 대책 없이 SY-44(최루탄)를 장전하고 발사해댈 뿐이었다.
(어찌 보면 매우 권태로운 대치국면이었을 수도 있겠다.)

아무튼 나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전경 봉급 인상하라 훌라훌라. 저놈들도 사람이다 훌라훌라”
그랬더니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그 아비규환의 내용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겠다.

“저 자식 저거 프락치 아니야?”
“전경이 무슨 사람이야. 저 쉐이들은 개야 개”
“우리에게 드러나는 적은 오직 전경이야. 그러니까 저놈들이야말로 우리의 주적일 수도 있어. 당신 얘기는 수정주의야.”

그 날 나는 내가 뭘 ‘수정’했는지도 모르고 하마터면 나 스스로 제일 혐오했던 학내 프락치가 될 뻔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군인의 봉급 인상’은 어찌 보면 모든 군인의 직업군인화를 주장하는 것이고, 그것은 기본적으로 국민 개병제의 상황이 아니라 모병제의 상황을 전제해야 할 것인바, 만약 우리나라가 그렇게 된다면 이미 통일이 된 후의 일일 테니 매우 선각자적인 선창이었는데 나의 그런 ‘혜안’은 그저 ‘반역’으로 매도되고 말았던 것이다.

2000년 전 한 어린 여자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고지를 받는다. 이른바 수태고지다.
혼전 임신은 사형을 의미하던 시대에 그 어린 여자는 그저 기뻐하며 받아들였을까?
그랬을 리가 없다. 정말 두려웠을 것이고 도망가고 싶었을 것이다.
한 여자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고민을 그 여자는 했을 것이다. 물론 예수님처럼 나의 잔을 좀 거두어달라고 절규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선택했을 것이다. 예수의 어머니로서의 길을 가자고.
거기부터가 바로 우리가 아는 성모님이다.
그러니 딸랑 성모님만 찾아대지 말 일이다. 그분이 얼마나 큰 고민을 했고 얼마나 슬프게 사셨는지 헤아려야 할 일이다.

김진숙 씨를 그저 투쟁의 아이콘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지금 그분에게 잘 끓인 삼계탕과 영화를 잔뜩 받아 놓은 스마트폰을 하나 드렸으면 좋겠다. 특히 찰리 채플린의 영화들을 쫙 담아서 말이다.
하지만 말 뿐이다.
언제쯤 나는 실천할 수 있을는지…….

변영국(토마스 아퀴나스)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희곡 쓰고 연출하는 연극인인 동시에 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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