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노동청년회 50년, 침체와 갈등의 고랑에서


한국 가톨릭노동청년회 50주년, 두 개의 잔치

최근에 한국 가톨릭교회에서는 한국 가톨릭노동청년회 창립 50주년을 둘러싸고 두 군데서 별도의 잔치가 열리는 불편한 현상을 빚어냈다. 지난 11월 2일 가톨릭대학 성심교정에서 450여명의 가톨릭노동청년회(이하 JOC, 또는 가노청) 출신 선후배들이 모여서 ‘가톨릭노동청년회 5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 11명의 가노청과 노동사목 관련 사제들이 모여서 기념미사를 봉헌했다. 그런데 도요안 신부와 허윤진 신부(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전국 가노청 지도신부) 등 서울대교구의 가노청과 노동사목에 직접 관련있는 사제들이 불참했으며, 현역 가노청 회원들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결국 가노청 선배들만의 잔치가 된 셈이다.

한편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는 이미 지난 10월 5일 서울 성북구 보문동 노동사목회관에서 200여명이 모여 ‘노동사목 50주년 기념미사’와 가노청 투사선서식을 따로 열었다. 대부분의 가노청 선배들은 초청받지도 못한 상태에서 서울대교구만의 ‘나홀로 기념’ 행사를 치른 셈이다. 그 자리에는 김운회(서울대교구 사회사목담당) 주교와 관련사제들이 미사를 집전했으며, 특히 이주노동자들의 참여가 돋보였다. 이 날 행해진 투사선서식에서는 9명의 회원이 탄생했다.

이 자리에서 김운회 주교가 강론을 통해 “급격히 산업화된 사회에서 노동자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던 시절, 가노청은 그들의 인권 피난처 역할을 하면서 노동의 신성한 가치를 일깨워줬다”고 말한 바와 같이 가노청은 노동사목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전국 차원의 가노청 50주년 행사와 서울대교구 노동사목 50주년 행사가 따로 이뤄졌다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유감스럽게 여기고 있다.

한국 가톨릭노동사목, 성장하고 갈등하고

한국 가노청의 경우에, 1958년에 조셉 까르딘 추기경의 방한에 맞추어 ‘한국가톨릭노동청년회’가 창립되었는데, 처음 서울대학병원 간호사로부터 시작되어 초기에는 빈민촌의 무료진료와 환경개선 활동, 넝마주의를 돕는 방지거반 활동 등을 펼쳤다. 그러나 한국사회의 산업화가 급속히 진전되던 1970년대에 들어서 가노청 활동도 노동조합 운동에 깊숙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 효시는 물론 1968년 강화도 심도직물 사태였다. 이 사건으로 가노청의 활동이 교회안팎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노동상황이 열악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갈망을 반영하는 듯이, 이 시기에 가노청을 거쳐간 사람들은 3천여 명에 달한다.

한편 서울대교구에는 1971년에 도요안 신부를 위원장으로 하는 도시산업연구회를 설립하고, 이어서 도시산업사목위원회를 거쳐 1979년에는 노동사목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어 노동문제상담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한국가노청이 서울대교구에서 먼저 창립되었고, 노동사목위원회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서울대교구 노동사목 50년이 한국 JOC 50년과 상관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서울대교구는 사제 중심의 노동사목위원회와 사실상 평신도 노동청년을 중심으로 체계가 갖추어진 가노청 사이에는 이미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었던 셈이다. 현장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가노청 회원들과 사제들이 같은 시각으로 노동현장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가노청 선배들은 동일방직과 원풍모방 같은 굵직한 사건에 연루되며 ‘노동계의 복음화’라는 가노청 정신으로 노동현장을 누비고 다녔으며, 1980년대에는 수배자가 되거나 대부분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업을 하지 못하게 되자 공단 지역에 ‘노동사목 집’을 열어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노동조합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이들은 현장에서 ‘고통받는 그리스도’를 발견하였다고 고백한다. 이 과정에서 가노청 선후배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민주노조운동이 급격히 활성화되면서 병원, 신문방송, 학교 등 교회사업장에서도 노동조합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교회 제도권에서는 ‘노동운동’ 자체에 대한 회의가 일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사제들의 입에서 나온 유명한 말이 “그동안 우리가 돌봐주었던 노동자들이 우리 발등을 찍는다”는 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노청 선후배들이 행하는 가톨릭노동운동이 ‘과격하다’는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로마인가, 브뤼셀인가?

한국사회 노동운동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 1990년 대 이후에 이러한 회의적 태도는 1992년에 서울에서 열린 국제세미나를 계기로 입장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국제 가노청은 조셉 까르딘 추기경이 창설한 브뤼셀에 본부를 두고 있는 ‘JOCI’와 1세계 가노청을 중심으로 갈라져 나온 ‘CIJOC’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제3세계는 여전히 가혹한 노동조건 속에서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었으며, 가노청 회원들은 헌신적으로 현장에 투신하였다. 이를 두고 교회 일각에서는 이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이고 ‘계급투쟁’으로 변질시켰다고 비판하였고, 좀더 교회 규율에 순종하며 신앙운동의 성격을 지닌 순치된 운동을 요구하였다. 이는 민주주의가 비교적 잘 자리잡은 1세계의 나아진 노동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태도였다.

이렇게 1세계 중심의 가노청이 모여서 결성한 것이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는 CIJOC이다. 1992년 세미나에 참석한 CIJOC 인사들의 입장에 호의를 보인 한국가노청은 1993년에 JOCI에서 탈퇴하고 CIJOC에 가입함으로써 한국가노청의 방향을 로마로 돌렸다. 당시 아시아주교회의(FABC)에서는 두 국제단체를 두고 “아시아의 교회는 하나의 JOC만을 갖고 있으며 두 단체가 일치할 것을 촉구한다”고 입장을 밝힌 바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가노청의 선택은 이러한 합의를 어긴 것이며 직후에 일본과 필리핀가노청 등으로부터 항의를 받았다고 전한다. 1994년에 JOCI 아시아태평양 책임자였던 슈 오 설리반 신부는 한국가노청을 방문하여 “이 상황에 슬픔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그후 한국가노청은 노동운동 중심에서 생활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1994년 2월에 개최한 전국회원 교육에서 노동청년의 여가, 문화, 가치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바탕으로 노동청년의 복음화와 가노청의 대중화를 위한 캠페인을 추진하였고, 청소년 밀집지역인 서울 노량진에 ‘가톨릭청소년상담센터’를 열었다. 한편 1999년 5월에 개최된 주교회의 상임위원회에서는 가노청 전국연합회를 해체하고 교구 중심의 협의체로 전환하였다. 2000년대부터는 아르바이트 청소년들을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가톨릭노동청년회’를 ‘까르딘청년회’로 개칭하였다.

한국가노청이 이렇게 방향전환을 한 것은 1990년대 이후 발생한 몇 가지 노동환경의 변화 때문이라고 한다. 1970년도에는 8.4%였던 대학진학률이 2002년에는 74.3%로 늘어나는 등 노동청년의 수가 급감하였다는 점, 한국사회의 노동문제가 민주노조와 민주노총 등 노동자들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노동형태가 다양해졌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그러므로 투쟁 중심의 노동운동보다는 1세계처럼 캠페인 중심의 생활운동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CIJOC의 활동에서 자극을 받은 이러한 운동은 가노청이 본래 갖고 있던 ‘노동계의 복음화’라는 목적과 청년사도로서의 ‘투사양성’이라는 활력적 기반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불러왔다.

부담스러운 ‘노동’, 불편한 JOC 투사(鬪士)

조셉 까르딘 추기경이 제창한 JOC 정신은 기본적으로 ‘평신도 중심’이었다. 그는 평신도인 노동청년들이 사도가 되어 자기 운동의 주체가 되도록 불러세웠다. 그러나 한국가노청은 1990년대 이후에 지도신부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평신도 운동이 갖는 자율성이 많이 훼손되었다. 더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로 노동조합 운동이 활성화되고, 민주노총 등 합법단체들이 생겨나면서 등장하면서 가노청 투사들의 역할이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한편 교회는 ‘가톨릭노동청년회’를 ‘까르딘 청년회’로 개칭하여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는 가톨릭‘노동’청년회라는 말이 주는 무게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교회에서는 최근 들어서 ‘노동’이라는 말 자체를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고 김정대 신부(인천 삶이 보이는 창 대표, 예수회)는 말한다. 허윤진 신부가 <평화신문>987호에서 “이제는 노동사목에서 '노동'이라는 말을 '일' 또는 '직업'이라는 말로 바꿔야 할 정도로 노동사목의 영역 또는 대상이 다양해졌다”는 말에서 ‘노동’이라는 말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엿보인다.

또한 “물질만능의 세태에서 젊은이들에게 일을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지 않도록 일이 지니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올바로 일깨워주고 적합한 일자리를 찾도록 도와주는 일도 중요하다”는 말에서 활동의 방향전환을 엿볼 수 있다. 이 기사에서 이창훈 기자는 JOC 50주년 기념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노동사목을 출발시킨 가노청 역시 회원 수는 예전에 비해 턱없이 적지만 투쟁하는 투사(鬪士)가 아니라 복음의 빛에 입각한 성찰과 판단과 실천을 통해 자신과 삶의 현장의 복음화를 위해 몸을 바치는 투사(投士)의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말은 JOC 투사(鬪士)들이 교회 안에서 더 이상 환영받을 수 없다는 분위기를 엿보게 한다.


지금은 신자유주의 시대, 가톨릭노동사목은 이 정도로 충분한가

그러나 실제 한국 노동상황은 ‘건전한 노동자 의식’만을 요구하기에 아직도 너무 열악하다. 당장에 비정규직 노동자 문제가 사회현안이 되고 있으며, 서울대교구에서 운영하는 강남성모병원의 파견직 비정규노동자들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나듯이 실상 교회 내 노동문제 자체에 대해서는 ‘사회교리’의 가르침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있으며, 정의평화위원회나 노동사목위원회 등 어느 교회단체에서도 일절 언급을 피하고 있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원론적 차원에서 노동의 존엄성을 언급할 뿐이며, 과거의 공적을 경축하면서도 지금 노동자들이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아픔에서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태도는 신자유주의 이후에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구조적 접근을 회피한다는 인상을 준다. 교회가 현재 가장 몰두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사목마저도 소극적 상담과 처우개선에 머물고, 이주노동자 문제를 단순 복지적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한글교실과 의료행위, 법적 구제, 체불임금 문제 등도 필요한 일이지만, 이들이 한국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노동환경 안에서 일할 수 있도록 법적 구조적 변화를 꾀하는 것도 복음적 요청일 것이다.

교회의 일치, 어떻게

11월 2일에 열린 가톨릭노동청년회 50주년 기념행사와 관련해서 어느 사제가 “지오쎄 동창회냐!”하는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는 1970년대 이후 가혹한 시절에 노동계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던 가노청 선배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노동계의 복음화란 상황에 따라서 투쟁과 기도가 동시에 필요하고, 노동자 개인의 회심과 더불어 사회구조의 변화도 필요한 법이다. 어느 한쪽만을 강요하지 않는다면 교황이 늘 언급하듯 ‘교회의 일치’는 그리 힘들지 않다.

가노청의 창립자인 조셉 까르딘 역시 노동운동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았다. 까르딘이 노동자들의 당파적이고 정치적인 요구를 자주 옹호하고 나서자, 주교들과 교회의 부유한 권력층은 그가 사회주의를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는 가톨릭교회의 일치를 깨뜨리는 행위라는 것이며, 노동자들에 대한 자선은 좋지만 그들이 스스로 조직화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까르딘은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가톨릭노동청년 운동을 발전시켜 갔으며, 국제가노청 창립 10주년 기념식에는 8만 5천명의 청년노동자들이 참석했다.

심지어 교황 비오 12세 역시 가노청(JOC)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까르딘이 “반(反)사회주의와 반공주의로는 노동자 계급을 구하고 교회에서 멀어진 민중을 다시 교회로 이끄는 데 충분치 못하다. 마르크스주의 안에는 하나의 진리의 핵이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계급에 세계를 구원할 임무, 메시아적 사명을 부여했다는 점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강점이다. 공산주의를 논하는 교황의 회칙은 문제를 부정적인 면에서만 다루고 있다. 대부분의 내용이 공산주의를 말살하는 방법만 찾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신 노동자 계급의 사명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다.”고 교회의 각성을 촉구하자, 비오 12세는 라디오 방송을 통해 “JOC가 신중하지 못하며, 계급투쟁을 선동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까르딘은 굽힘없이 이렇게 말했다. “소박한 노동자 한 사람을 선봉투사요, 동료 노동자들을 구할 수 있는 사도로 삼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단순한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작고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드러내시고 크고 오만한 사람들에게는 당신을 감추셨으니 감사하다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또 역사를 보십시오. 작은 이들이 교회를 키워왔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작은 이들의 부요함을 알아야 하며, 그들의 가능성을 믿어야 합니다.”

온갖 모함과 비난 속에서도 청년노동자들과 평신도의 자발성을 믿었던 조셉 까르딘은 결국 1965년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추기경으로 지명됨으로써 그의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노동세계의 구원을 위한 확신이 교회 안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그가 바라던 교회의 일치는 교회 안에서 잡음이 일어나는 것을 차단하는 게 아니라, 예수가 선택한 가난한 그 사람들을 교회가 선택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치였다. 참된 평화는 정의의 토대 위에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상봉 2008-11-13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