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자 아가페

 

‘안주(安住)’라는 말을 무색하게

오지게 떠다니며 살던 여자가 있었다. 언젠가 안정되고 편안한 보금자리를 얻어 자리를 잡는 게 소원인 여느 사람들의 꿈을 그녀는 갖지 못한 것일까? 아님 어딘가 안착하는 게 ‘부질없다’ 느꼈던 것일까? 영원한 본향이야 신앙인의 입장에서 볼 때 ‘본향(本鄕)’이라 부르던 하늘나라뿐일 텐데, 거기서 그립고 아쉽게 곁을 떠나간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꿈 한 자락 품을만 한데, 그녀도 그랬던 것일까? 그러나 그녀가 현실감 없이 몽상 속에서 발을 허공에 딛고 서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늘 무엇인가 찾아다녔던 것이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한 때 어느 정치인의 보좌관을 한 적도 있었지만, 내내 아래로 미끄러진 것 같은 삶을 추구해 왔다. 더 낮은 곳으로, 더 주변으로 탈주하여 ‘안주(安住)’라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낡은 그들의 옥탑방과 연립주택의 먼지틈을 헤집고 다녔다

십수 년 전에 처음 만들어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안에는 ‘빛모임’이라는 평신도 그룹이 있었는데, 그녀는 처음 그리로 왔다. 그때 처음 그녀를 만났는데, 눈이 반달 같다고 즐거운 농담을 하곤 했다. 초승달처럼 위태롭지 않고 보름달처럼 더할 게 없는 모습이 아니라 균형감을 느끼면서도 미처 채우지 못한 반쪽이 남아 있는 형상을 떠올렸던 것일까? 이건 순전히 내 상상일 뿐이다. 그녀는 한동안 경기도 성남시에서 노동자 밀집지역에 살면서 낡은 그들의 옥탑방과 연립주택의 먼지틈을 헤집고 다녔다. 거기서 ‘사람’을 만나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네들의 아이들을 돌보고, 지역 여성들과 모임도 주선하고, 무엇보다 징그럽게 삶을 나누었다. 그녀보다 먼저 이 지역에 들어와 사제와 수도자와 평신도가 동반사목을 하던 메리놀공동체와 연분을 맺었던 한상욱 형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나중에 노동사목에 투신했던 한상욱 형을 아직도 그 지역 사람들이 기억하듯이, 사람들은 그렇게 짙은 향기를 품고 스며들어왔다가 이내 사라진 그녀를 기억할 것이다.

필리핀에서 미씨오 데이(Missio Dei)

한번도 제대로 된 번듯한 집을 가져 보지 못한 그녀는 한때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고, 이윽고 이 땅을 떠나 이방의 땅으로 들어갔다. 성골롬반외방선교회에서 주선하여 필리핀 빈민지역에서 평신도선교사로 살았던 것이다. 그녀가 거기서 눈이 큰 아이들과 함께 살았던 세월을 ‘선교’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선교를 미씨오 데이(Missio Dei), 하느님이 바라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보면, 그녀도 그 흐름 속에 있었을 것이다. 보잘 것 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해준 것이 곧 당신에게 해준 것이라던 예수의 진언(眞言)처럼 그녀는 그들에게 자기를 내어주고, 스스로 부족한 인간이 가진 약점 안에서 영적 투쟁을 계속하였을 것이다. 하느님은 그렇게 그런 사람들의 투쟁 안에서 드러나며 성장한다.

버스의 백밀러 위로 빗발울이 튕겨져 나가고

동서울 터미널에서 홍천행 버스를 탔다. 그녀는 지금 홍천에 있는 것이다. 출발할 때 하늘이 조금 흐리더니, 홍천 터미널에 내리자 빗방울이 굵어졌다. 미리 연락을 하였지만 데리러 온다던 사람은 금방 나타나지 않았다. 출발을 기다리는 버스의 백밀러 위로 빗발울이 튕겨져 나가고 있는 사이에, 차 시간을 기다리는 승객 서넛이 승강장에서 서성거리고, 더러 의자에 앉아서 꾸벅거렸다. 아, 오늘 그 집에서 만나기로 한 사람들은 다들 옛사람들이다. 십수 년 전에 함께 활동했던 사람이라면 그래, 벌써 낡아버린 기억들만 공유하고 있는 셈이니까.

그녀의 부모님들과 형제들은 홍천에 살았다. 그 집에 살던 사돈댁이 중국으로 들어가면서 빈 집에 그녀가 들어간 것은 4년 전 일이다. 모든 길을 돌아서 이제 고향이라 부를 수 있는 땅에 도착한 것일까? 아님 그곳 역시 비교적 장시간 체류해야 할 정류장에 불과한 것일까? 알 수 없다. 홍천군 철정면, 비포장도로를 타고 야트막한 언덕을 돌아가면 그녀의 둥지가 나온다. 예전에도 와서 한번 둘러보았는데, 전혀 집을 손대지 않고 노부부가 살았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치우지 않고 제 삶의 이력만을 덧댄 집이다. 선교지에서 구한 몇몇 악세사리와 성물들이 마루 한편에 놓여 있었고, 안방으로 손님방을 내어주고, 작은방에서 그녀는 생활한다고 했다.



숲에 살면서 숲 안에 깃들어

마당에 앞쪽으로 올라선 등성이에는 마을 사람이 심었다는 옥수수가 성성하게 자라있었다. 들깨도 허리만큼 자라 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요즘 잡초를 키우고 있다. 작물을 심어는 놓았으나 손 볼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요즘 혼자서 생계를 돕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돈을 벌러 다닌다. 그래서 지난 해인가, 그녀는 전화통을 붙잡고 “올해는 농사를 접고 숲 해설가를 하려고 한다”고 타전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숲안내자’로 이름을 바뀌었다는데, 숲에서 아이들이 자연의 감수성을 회복하도록 돕는 놀이와 프로그램을 진행한다고 했다. 그래서 텃밭에 심어놓은 작물들은 모두 다른 잡초와 더불어 공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틈틈이 호박도 따고 고추도 말려서 비닐봉지에 담아 놓았다.

숲에 살면서 숲 안에 깃들어 사는 벌레와 야생초와 꽃의 생태를 관찰하고, 공부한다. 그동안 세상의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 생태를 몸으로 섞여 들어가며 살피었다면, 이제는 자연의 생태를 탐구하고 정말 제 맘대로 제 방식대로 충분히 하느님의 창조를 드러내는 목숨들에 경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놀라움을 자연에 더 가까울 아이들과 나누고 그 부모들에게도 나누어 주는 것이다.

비온 뒤에 숲에서 피어오르는 향기가 그렇게 진하다는 것을 나도 산골에 살면서 경험한 것이 많았지만 그 이치를 탐구하지는 않았다. “아, 꽃이네”하는 태도보다는 “아, 양지꽃이네”하고 이름을 불러 줄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많이 더 깊이 그 존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숲에 참여하려면 그곳에 머무는 시간만큼 그들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세밀화를 그려보고서야 그 꽃의 형상과 자태를 만끽할 수 있듯이 말이다. 스쳐 지나가듯이 사람을 만나기 십상인 도시생활에서, 이렇게 밀도 있는 만남을 다시 생각해 본다.

아임비지

어떤 이들은 인터넷에서 닉네임을 아예 ‘아임비지’라고 짓는 이도 있다. 그만큼 생활은 바쁘고 조급함이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삶을 낳는다. 아니, 어쩜 내 자신을 배려할 틈도 없는 것이겠다. 내 호흡소리라도 잠깐 멈추어 들을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밤을 깊도록 때로 굵게 때로 가늘게 비가 내렸고, 식탁에 둘러앉은 우리는 소주 한 잔씩 나누었다. 그날 밤 잠도 깊고 편안했다.

/한상봉 2008-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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