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엮음 <녹색평론선집 2>(녹색평론사, 2008년)

‘아니오’라고 저항할 힘

지나온 길을 되짚어보면 후회가 많습니다만, 마음으로는 수없이 결단을 내리면서 몸은 항상 뒤처져 있음을 절감하면서도, 일단 그물을 멀리 치라는 스승의 음성을 듣곤 합니다. 책이 476쪽이나 되더군요. 생애에 쌓인 먼지가 그리도 두껍게 내려앉았다는 기호 같습니다. 그렇게 쌓인 몸과 생각의 습관을 비우려면 아마도 그만큼 많은 소식이 필요한 모양입니다. <녹색평론>의 글들은 항시 정화의 불칼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이제 그만!” “다시 해 보자!”고 채근하는 그분의 음성 같았습니다. 그래서 이 책의 말미에 김종철 선생이 타르코프스키의 ‘일기’를 배치한 연유가 있겠지요. 그 무성한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더 중요한 것은 일상 속에서 자신이 생각을 벼리고 마음을 다스리며 몸을 돌아봐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일기에서 많은 선지식들의 지혜를 빌려 사고합니다. 우리는 다른 인류에게서 죄뿐 아니라 은총도, 유행뿐 아니라 지혜도 얻어 누리는 모양입니다. <교부들의 생애>라는 책을 인용하여 어느 스승 이야기를 합니다.

어느날 파바라는 이름의 피반다 출신의 노수도승이 시든 나무 하나를 집어들고서는 산으로 올라가 그것을 땅에 묻었다. 그러고는 존 콜로가더러 그 시든 나무에 열매가 열릴 때까지 날마다 거기에 물을 주라고 일렀다. 그 근처 아무데도 물이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물을 길어 거기까지 갔다가 저녁에 되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3년이 끝날 무렵 그 나무는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었다. 노수도승은 그 열매를 따서 교회로 가 회중들에게 보여주며 말하였다. ‘이리로 와서 순종의 열매의 맛을 보십시오.’

아마 <녹색평론>의 작업도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요즘 미국산 쇠고기수입 문제로 광우병을 둘러싼 공방이 계속되고 있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그저 ‘경제와 돈’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아이콘을 대통령으로 세우고,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광우병 문제가 해결된다고 우리의 삶이 온전한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수입쇠고기의 선정과 검역 문제가 아니라 광우병 쇠고기로 상징되는 참혹한 자본주의와 육식문화, 소박하고 인간적이며 지역적 삶에 대한 배제와 제국주의가 낳은 결과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타르코프스키는 “점진적으로 사람들은 서로서로를 타락시켜왔다.”고 말합니다. 바로 지금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영혼에 관하여 생각해왔던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제거당해 왔고, 지금도 제거당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우리의 저주받은, 야만적인 세계의 모든 이념적 제도를 넘어뜨릴 수 있는 새로운 이단”이라고 선언합니다. 일기(日記)에서 말입니다. 그는 선언문을 작성해서 마이크에 대고 떠들지 않지만 자신의 영혼과 깊이 대화하면서 먼저 자신에게 물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든 가지에 물을 주어 스스로의 생명이 살아나길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윽고 광장으로 나아가 ‘아니요’라고 저항할 힘을 얻으려 하는 것입니다.

타르코프스키는 “창조주가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행사하여 우리 내부에 있는 악에 맞서 싸우고,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방해하는 것들을 극복하고, 영적으로 성장하여 우리 내부에 있는 모든 야비한 것들을 넘어가려고 노력함으로써 창조주 앞에서 우리의 죄를 보상”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스승을 보내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런 점에서 장일순 선생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삶의 도량에서’ 만날 수 있었던 스승의 얼굴을 하고 계시니 말입니다. 다행입니다. “태어난 존재들이 살아간다는 것은 거룩하고도 거룩합니다.” 그분의 말씀입니다. 그 모든 목숨 가진 것들이 다 스승이라는 말이겠지요. 그분은 가끔 한밤에 풀섶에서 들려오는 벌레소리에 크게 놀란 적이 있는데, 만상이 고요한 밤에 그 작은 미물이 자기의 거짓 없는 소리를 들려주는 걸 보면 제 생활이 부끄러워진다고 고백합니다. 저녁으로는 대체로 박주일배(薄酒一杯)를 나누는 형편인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혼자 걷는 방축길이 도량(道場)이라 합니다. 발밑에 밟히는 상처와 먼지에 찌들린 풀잎이 하늘의 달과 대화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형편없는 하루가 떠오른답니다. 길가의 모든 잡초가 스승이요, 벗이요, 도인(道人)이라는 것입니다. 대낮에 대포를 권하는 젊은 친구나 몸을 걱정해 주는 노선배나 필방에서 “그것도 모르면서 서예가예요. 에잇”하고 횡하니 나가던 학생이나 모두가 이 세상 이 바닥에서 저를 가르치는 스승이요 도반이라는 게지요. 남이 알아주는 귀천(貴賤)을 따지지 않고 스승을 알아보는 자, 이미 스승입니다.

‘가난’을 선택하는 ‘이단’적인 삶

이 스승들의 지혜를 헤아려 볼 때, 우리는 개발과 가난의 문제를 헤아려볼 필요를 느낍니다. <녹색평론 선집 2>에서는 기본적으로 산업화가 야기한 인간적 삶의 질곡에 대하여 질타하고, 자기 노동과 농촌에 기반을 둔 자치적 지역 공동체에 희망을 두고 있습니다. 지금껏 논란이 되어 온 한반도 대운하 문제를 묵상할 때, 고속도로도 모자라서 국토를 관통하는 물길을 열어 상품경제로 편입시키려는 것은 개발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가난’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지 않는 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볼프강 작스는 ‘개발-파멸로 가는 길’이라는 글에서 “가난은 반드시 빈곤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 검소함과 비참함과 궁핍을 나누어 생각하고 있는데, 여기서 검소함은 소유의 광기에서 자유로운 문화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문화에서는 오직 작은 부분만을 시장에 의존할 뿐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대부분 생존유지 수준의 생산방식에 의해 충당된다고 말합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이러한 삶의 방식은 매우 빈약한 소유를 누리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요. 여기서 돈은 주변적인 역할만 하게 되고, 가진 것이라곤 오두막 한 채와 몇 개 옷가지와 솥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들판과 강과 숲에 접근할 권리가 허용되고, 우리 사회에서 현금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는 온갖 서비스가 친족관계나 공동체의 의무에 의해 보장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농촌이 이미 많은 부분에서 황폐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시골살이를 해본 사람은 금방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도시빈민은 살 길이 막연하지만, 거리의 노숙자 신세로 전락할 위험에 언제든지 노출되어 있지만, 시골에서는 적어도 밥을 굶지는 않습니다. 촌락공동체가 미약하나마 여전히 작동하고 있으며, 마을 둘러싼 무덤같이 오붓한 산천이 그의 영혼을 위로할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이 가진 것은 적지만 공동체 안에서 오히려 풍요를 누리는 검소함이 그 토대를 박탈당할 때 활개치는 것이 비참함입니다. 공동체적 유대와 더불어 토지와 삼림과 물은 비현금 문화에서 생존을 꾸려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필수조건입니다. 그러나 봄에 고사리라도 끊어서 생계를 돕던 산천을 빼앗기거나 파괴되자마자 비참이 시작됩니다. 세계적으로 농민과 유목민과 부족민들이 자꾸만 비참해지는 것은 그들이 땅과 사바나와 숲에서 쫒겨난 다음이었다고 작스는 말합니다.

궁핍은 ‘근대화된 가난’이라고 말합니다. 현금경제에 갇혀 노동자와 소비자로 살아가는 도시생활자들은 그 소비능력이 너무나 낮아서 도중에 낙오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들은 시장과 돈에 의해 끊임없이 시달리며, 자신이 턱없이 모자란 능력을 한탄하고, 상류사회에 대한 선망으로 욕망을 키워갑니다. 이러한 상품에 기초한 빈곤은 19세기까지 사회문제로 묘사되었으나, 이제는 순전히 ‘소득감소와 증대’라는 경제의 문제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을 문제로 보고 ‘성장’을 해결책으로 보아왔습니다.

작스는 인도사회의 예를 들고 있는데, 모한다스 간디는 삶의 영성적 방식에 원천을 두는 사회를 꿈꾸며 스와라지, 즉 개인적 진실을 따르는 내적 자유가 지배해야 하는 곳에서 영국식의 산업주의는 불가능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가 실행하려고 했던 것은 자립적인 촌락의 부활입니다. 그러나 네루는 의견을 달리 했습니다. 그에게는 신생독립국을 가능한 빨리 서구적 방식의 경제적 문명으로 탈바꿈시키려고 꾀했습니다. 개발지상주의자들이 볼 때, 사람들은 언제나 욕망하는 것보다 적게 소유하고 있어서 ‘항구적 궁핍상황’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고상한 정치적 과업은 물질적 부를 위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 됩니다. 

산업체제 바깥에서 건설해야 할 새로운 사회

그러나 권혁범이 ‘발전을 다시 생각한다’라는 글에서 말하듯이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찾으려면, “양적 성장과 팽창, 속도를 중심으로 하는 가치관과 정책을 중심으로 삼는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계 경제를 이끌어가는 엘리트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GNP 같은 기준이나 요란한 광고와 언론이 부추기는 소비문화적 기준에서 벗어나 우리 각각의 내면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윤리적 문화적인 영적 요구에 의거해서 우리의 행복의 기준을 설정하고 개성적 생활양식을 정착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활방식,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늪에서 벗어나는 길이며, 주류에서 떨어져 나온다는 점에서 ‘이단(異端)’적인 삶으로 비춰질 것입니다.

루돌프 바로는 산업화로 인한 자기파멸적 문명의 대안으로 ‘에콜로지와 평화운동’이라는 답변을 내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몸을 돌보듯 자기 삶을 손이 닿는 범위 안에서 돌보며 자연과 공생하며 이웃과 연대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전지구적 자본주의 세계에서 산업주의 상품경제에서 이탈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참으로 두렵고도 매력적인 메시지가 전달딥니다. “우리는 완전고용을 기도해서는 안 된다.”

산업체제가 더 이상 일자리를 마련해 주지 않는 사람들은 산업체제 바깥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실업자가 더 이상 공장 주변을 기웃거리지 않고 해고자가 복직투쟁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들이 ‘임금과 빵’을 위해서 산업체제로 되돌아가기를 원하지 않고, 산업체제로부터 탈락하여 새로운 사회/공동체를 건설하도록 독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대안적 대항문화’를 곳곳에서 만들자는 제안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로마제국 안에서 전혀 다른 삶을 선포했던 그리스도인들이 걸어갔던, 그러나 이미 오래전에 저버렸던 삶입니다. 자본주의의 껍질 속에서 더 선해지지 쉬운 사회를 꿈꾸었던 피터 모린, 이반 일리치, 리 호이나키, 스콧 니어링이 줄기차게 주장하던 이상입니다. 한 때 많은 이들이 필독서로 읽었던 <오래된 미래>를 희망하는 것입니다. 아니 거기서 희망을 발견하는 운동입니다.

<녹색평론 선집 2>에서 소개하고 있는 아미쉬 공동체에서 볼 수 있듯이, 식량이나 옷이나 주택이나 건강문제, 학교와 같은 기본적 필요를 위한 생산을 자립적으로 수행하고, 시장에 공급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급하기 위한 농사를 짓는 마을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제 필요한 식량을 스스로 생산하고, 슈퍼마켓에서 사먹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루돌프 바로는 “핵무기로부터 해방되고 슈퍼마켓에서 해방된 공간”이라고 표현합니다. 나린다 싱은 ‘과잉문화로부터의 철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희망하는 ‘생태적으로 의식화된 급진주의자’는 세상의 비난과 황망함에 아랑곳없이 제 갈 길을 가야 한다고, 부끄러워할 필요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를 테면, 이러한 촌락공동체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를 구태여 이름지어 부르기로 한다면, 나린다 싱은 지속가능한 적정기술이 적용되는 ‘자전거시대’로 표기하라고 제안합니다. “자전거는, 로봇들의 통근을 위한 고속도로와 이체교차로들의 미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일하고 살아가는 인간다운 환경을 만들어내는 적정기술을 상징할뿐더러 그것을 몸으로 구현”하기 때문입니다.

김종철 선생 ⓒ프레시안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

<녹색평론선집 2>에서 제안하고 있는 것은 이뿐 아니라 농업, 공동체, 경제, 교육, 과학 등 전방위적인 분야의 생태적 관점을 다루고 있습니다만, 결국 목표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새로운 인간, 또는 새로운 인간을 성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사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책이 급진적인 이유는 이 모든 것을 ‘지금여기’에서 바로 시작하라고 제안하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새롭지만 사실 오래된 지혜가 가르쳐준 길이며, 이미 우리 선조들이 밟았던 아직도 고스란히 인적 없는 곳에 남아 있는 옛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두려워말라는 것입니다. 김종철 선생은 새 신발을 신고 가려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려고 마음먹은 듯 이 책의 후반부에 ‘죽음’에 대하여 소기얼 린포체의 글을 끼어 넣었습니다.

이 티베트불교의 스승은 죽음은 그저 비참한 종말이 아니라 “삶의 의미 전체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죽음을 통해 우리 자신을 대면할 수 있다면, 우리는 이제 살아있는 시체처럼 생존하지 않고 우리 생활을 단순하게 하고, 의미를 찾아내고, 진정한 우선순위를 가려내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이란 단순히 숨을 멈추는 일이며, 이 일의 임박성을 의식하면 이렇게 말하게 된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내일 죽을 것이라면, 그렇다면 내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가 보기에 현대세계는 오직 지금의 생(生)만 생각하며, 그래서 지구를 약탈해 왔지만 이제 치를 대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달라이 라마가 <삶과 죽음에 관한 티베트의 책>에서 붙인 머리말에서 한 말을 기억합니다.

“우리 대부분은 평화롭게 죽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폭력에 차있고 우리의 마음이 대체로 분노와 집착과 두려움과 같은 감정으로 동요하고 있다면 우리가 평화롭게 죽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잘 죽기를 원한다면 잘 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평화로운 죽음을 바라면서, 우리는 마음과 삶의 방식 속에서 평화를 가꾸어 나가야 한다.”

자, 그럼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좋은 스승은 어디에서나 가르침을 얻는 학생입니다. <녹색평론 선집 2>를 통해서도 우린 죽음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서 피해 갈 수 없게 됩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의 고유한 답을 찾아가야 할 차례입니다.

* 이 서평은 <녹색평론> 2008년 7-8월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한상봉 2008-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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