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창문, 하나의 바램

1. 수녀님의 정갈함

나는 개신교에서 목사로 일하고 있고, 한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다.

마음이 심란하거나 일이 벽에 부딪힐 때 가끔 찾아가는 곳이 있다. 덕수궁 돌담길 끝자락에 있는 바오로딸 서점이다. 2호선 시청역에 내려서 돌담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노라면 그 호젓한 분위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도 운치 있고 추운 겨울에도 이 길을 걸으면 따뜻하고 봄에는 아이라도 데려올 걸 하는 마음이 절로 인다. 길의 끝자락에 가면 프란체스코 회관에 닿고 1층에서 나는 커피 한잔을 마시고 서점에 들어간다.

어쩌면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를 해놓았을까 싶게 책들은 가지런히 놓여있고 계절과 절기에 맞는 장식에 감탄이 올라온다. 수녀님들이 손수 만드신다는 말씀사탕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그윽해진다. 그래서일까 나는 몇 년째 이 말씀사탕을 우리 교회 송구영신 예배 때 사용하고 있다.

<야곱의 우물>도 지난 몇 해 동안 구독해서 보기도 했다. <야곱의 우물>을 보면서 한상봉 선생님의 생활글을 오랫동안 접했다. 한 달 전에 한 선생님을 처음 우연히 만나게 되었는데, 필자와 독자의 관계도 때론 마치 지인처럼 그렇게 익숙한 느낌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작은 계단을 올라가면 성물과 엽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데 이것들을 구경하는 것 역시 새롭고 흥미롭다. 바오로딸 서점은 명동점도 가끔 찾아가는데 명동점을 들를 때면 그 아래 초입에 있는 칼국수를 한 그릇 먹고 오기도 한다.

난 위에서 밝힌 것 처럼 가톨릭교회의 한 지체라 할 수 있는 수녀님들과 수녀회에서 만들어내는 책과 이미지들을 좋아하고 친근하게 느끼는 개신교 목사이다. 에큐메니칼은 정책이나 사안별 연대로 표방되는 경우가 많지만 서로의 공간에 오고감을 통해서 자연스레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나는 가톨릭교회 수녀님들의 정갈함이 좋다. 이것이 가톨릭교회를 보는 나의 첫 번째 창문이다.

2. 헨리 나웬 신부

신학대학원 시절, 영성수업 시간은 내게 새로운 해방감과 도전의식을 던져주었다. 학부에서는 주로 사회정치적인 현실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실천과 행동으로 증언하라는 부름이 마음을 사로잡았던 반면, 20대 후반에 진학한 대학원에서는 영성서적과 영성훈련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가운데서 특별히 헨리 나웬 신부의 글은 읽고 또 읽고 싶은 것이었다.

사막 교부들의 기도생활을 다루고 있는 <마음의 길>은 여러 번 읽었고, <살아있는 기억매체>도 여러 번 읽었다. <아담>이란 책은 스무 권 정도를 사서 선물로 돌리기도 했다. 요즘은 개신교에서 나웬 신부의 글을 많이 번역하고 있으나 10여 년 전만 해도 주로 가톨릭 출판사의 것이 많았다. 성찬성씨의 번역이 읽기가 좋았다.

헨리 나웬의 글 가운데서 특히 내 마음을 울린 것은, 우리는 하느님께 사랑받는 자인데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하는 유혹에 넘어진다는 대목이었다. 반면 우리는 얼마나 종종 사람들의 평가와 인정에 목을 매고 있는가 하는 대목을 읽으면서도 공감이 컸다.

나는 목회현장에서 여러 교우들을 만나면서 하느님께로부터 버림받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죄책감을 가지고 깊이 앓고 있는 친구들을 본다. 나 역시 깊이 들여다보면 이런 두려움이 종종 엄습해오는 것을 느끼지 않는가? 그러니 이것은 헨리 나웬 개인의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영적, 심리적 어려움이다.

최근에 헨리 나웬의 전기를 읽었다. 나웬 신부가 동성애자였다는 대목이 짧게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이 신부에 대해서 더 깊은 공감과 친밀감과 이해가 동반되는 것을 느꼈다.

과연 나웬 신부가 겪었을 부담은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신부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그러나 나웬 신부는 그 내적인 고통과 번민을 오히려 신앙 안에서, 참으로 사랑해주시는 그 분 안에서 더 깊고 융숭하게 승화시켜 내었다. 헨리 나웬의 글이 많은 사람에게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었던 것은 탁월한 필력이나 감각을 넘어서 있다. 바로 자신의 핸디캡(동성애적 성향이 핸디캡이란 것이 아니라, 신부라는 위치에서 볼 때)에 휘말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에로 자신의 마음과 지향을 향한 점, 자신과 다를 바 없이 약하고 약한 이 세상의 약자들에게로 마음과 시선을 향하며 자신의 소명을 찾아간 점. 나는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가톨릭 교회를 떠올렸을 때, 나는 헨리 나웬 신부라는 두 번째 친밀한 창문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3. 여성의 자리

몇 일 전에 나는 목회자들이 연중 2회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회의를 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95%가 남성목회자들이고 여성 목회자들은 가끔 눈에 뜨인다. 그렇지만 회의 중간 간식시간이 되자, 여성들이 한꺼번에 들어와서 간식을 나누어주고 간다. 여성 평신도들인 것이다.

이 분들은 아침 일찍부터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회의장 앞 도로변에 나와서 이 날 참석하는 목회자들을 공손하게 맞이하는 역할도 했다. 사람을 맞이하고 제때에 먹을거리를 대접하는 일은 참 소중하다.

그러나 이런 역할은 으레 여성들이 하는 일로 여겨지고 있는 교회문화는 참 오래 동안 지속되어 왔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오히려 교회 바깥에서는 여성들의 역할이 다양해지고, 성역할 고정관념이 변화되어 가는 반면 교회는 가장 뒤처지고 늦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내가 속한 교단은 아니지만 아직도 여성안수를 불허하고 있는 한 교단에서는 교단을 대표하신다는 분이 기저귀발언을 해서 물의를 빚기도 하고, 여전히 여성들은 남성 목회자들에게 순종해야 할 대상쯤으로 여겨지는 것이 개탄스럽고 안타깝다.

가톨릭교회는 가부장적인 문화에서 얼마나 벗어나 변화되어가고 있는지 궁금하다. 얼마 전 기도모임에 참석했는데 성공회에서는 여성사제가 있는 것을 보고 반가웠다. 가톨릭교회에도 여성 추기경, 여성 교황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신학교에서 수업 받을 때, 또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 중 하나가 가톨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이다. 이 공의회를 이끈 교황은 ‘개신교는 분리된 형제들’이라고 선언했다고. 그동안 개신교에 대해서 이단시하고 경원시 하던 태도에 전향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들었다.

이런 멋진 공의회, 교황를 다시 기대한다. 만약 여성들에게 그 문이 열린다면, 여성들이 공의회를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찾게 된다면, 가톨릭은 더 보편적이고 더 아우르는 생명의 교회로 도약할 수 있지 않을까? 섬김과 협력의 지도력은 태생적으로 여성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지 않은가?

/손은정 목사(성문밖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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