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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한국교회의 노력과 걸림돌변진흥(평화문화재단 상임이사)

 


. 6월 22일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이다. 이 날에 즈음하여 북한교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복음적 차원에서 생각해 볼 기회를 갖기로 하였다. 그래서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와
통일사목연구소에서 일하고, 최근엔 남북 문화 교류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평화문화재단의 변진흥 선생을 2008년 6월 18일 오전 10시 평화문화재단 사무실에서 만나
한국교회의 북한과 북한선교에 대한 태도와 통일사목을 위해 필요한 관점 등을
인터뷰를 통해 정리해 보았다.
특히 최근에 캐나다 세계성체대회를 전후하여 북한교회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성체대회 참여를 주선하지 않는 교회상황에 대한 이해를 시도하였다.
-편집자

 

통일의 영성을 뿌리내려야
 

 

한상봉: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변진흥: 우리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무엇인가 의미있는 역할을 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통일의 영성을 뿌리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우리 교회와 신앙인들이 분단현실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집니다. 교회는 뭔가 다른 이들이 하는 통일운동과 다른 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북한선교위원회에서 일할 때,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 평신도들을 망라해서 의식조사를 한 적이 있었지요. 그런데 공통적으로 확인된 것은 천주교인들의 의식이 다른 일반 시민들의 통일의식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천주교인들은 대개 신앙 안에서 통일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갈팡질팡하거나 생각과 행동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판단할만한 기준도 없고 그저 일반 여론에 추종할 따름이죠. 이는 통일문제 등 분단으로 인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 교회가 정확한 지침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앙 안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볼지 명확히 알 수 있는 ‘통일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통일의 영성은 구체적으로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요?

영성의 원천은 아무래도 먼저 ‘성경’에서 찾아야 하겠지요. 민족 분단에 대한 이야기는 구약에도 나오지만 저는 복음서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가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는 작은 아들이 제 몫의 유산을 미리 달라고 제 권리를 주장하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북한 역시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기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탕자처럼 실패하게 되긴 합니다. 북한 역시 한 때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결국 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해서 어려워졌지 않습니까? 하느님 나라를 향한 발걸음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지요.

그런데 결국 먹을거리 문제로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올 생각을 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요셉의 형제들이나 탕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에선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임으로써 화해하고 일치합니다. 그런데 탕자의 비유에선 장자가 동생을 용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뻐하며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주려고 반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베풀어줍니다. 그러나 장자는 불만을 토로하는 것이지요. 결국 장자는 탕자인 동생에 대한 애정보다 자기 권리가 침해받을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 역시 통일이 되면 우리 것을 나눠줘야 한다고 통일을 꺼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구약의 요셉 이야기보다 복음서의 탕자의 비유가 더 현실감이 있습니다. 비유에서 아버지는 장자에게 “내것이 다 네것이 아니더냐. 섭섭해 하지 마라”면서 달랩니다.

이럴 때 장자라고 볼 수 있는 한국교회는 어떻게 처신해야 될까요?

 

   
 

그러나 장자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였는지 여부는 더 이상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미완성으로 끝난 것이지요. 이야기가 완성되려면 장자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아버지의 나라를 탕자였던 아우와 함께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공동으로 지켜갈 수 있는 영성을 확인하고 나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비유에서 탕자는 아버지께 용서를 빌었지만 장자인 형에게 용서를 빌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형이 아우에게 모질게 대하는데 아우가 형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랑을 믿어야 용서를 청하게 되는 법이지요. 그가 아버지를 믿어 용서를 청했듯이 말입니다.

결국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열쇠는 장자가 쥐고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먼저 동생의 손을 잡아줄 때 참된 화해를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분단현실 속에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지렛대와 다리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통일의 영성이 필요합니다.

통일의 영성이 한국교회에 뿌리내리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런 영성이 뿌리 내리지 못하는 원인은 일차적으로 남한의 교계제도를 구성하고 있는 인적 배경에 있습니다. 교계제도의 모든 권한은 주교들에게 있는데, 해방이 이후 교회의 실권을 맡아 관리해 온 주교들 대부분이 북한에서 종교탄압을 경험하고 월남한 세대들입니다. 그러니 그분들의 마음이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장자처럼 될 수밖에 없죠. 그러니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필요한 심정적 접근이 어려운 것이지요. 우리 교회 현실에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교회 어른들이 통일 영성의 길을 열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이러한 영성을 분단현실 속에 가두어 놓고, 오히려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침묵의 교회에서 잃어버린 형제 교회로

우리 교회가 예전처럼 북한교회를 침묵의 교회로 다시 규정하려는 것 같던데요.

 

   
2007년, 장충성당에서 북한교회 신자들이 성탄미사를 드리고 있다.

한국교회는 분단 이후 줄곧 북한교회를 ‘침묵의 교회’라고 말해 왔는데 이는 우리가 만든 용어가 아닙니다. 이 말은 사실 헝가리의 민첸트 추기경이 공산화 과정에서 연금되자 바티칸에서 이분을 구출하려고 헝가리교회를 침묵의 교회로 규정하고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문’을 전세계에 보급하면서 생겨난 것이지요. 이러한 요청이 한국에 전달되자, 한국교회는 여기에 심정적으로 동의하고 헝가리뿐 아니라 북한교회도 ‘고난받는 침묵의 교회’로 규정했습니다. 북한에서는 공산주의자와 무신론자들이 종교를 탄압한다는 것이지요. 한국에선 북한을 유럽보다 더 이념화시켰습니다.

유럽에서는 60년대부터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전후하여 맑시즘이나 사회주의자들과 대화를 시도해 왔습니다. 무신론이란 결국 유신론에 대한 반발 때문에 나온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새로운 신학적 접근을 꾀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 현실은 유럽과 달리 60-70년대에 걸쳐 철저한 반공유신체제가 들어섰기 때문에 보편교회처럼 이념적 틀에서 새로운 신학적 접근을 모색할 여지가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반공이데올로기를 극복할만한 다른 계기는 없었나요?

한편 우리 사회의 이념적 경직성이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교계의 제도적 경직성을 풀어낼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없었다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1970년대 이후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도 지학순 주교 사건 등 정의와 평화를 위해 교회가 횃불을 들었지만 이것이 민족 화해와 평화통일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죠. 다만 정의구현사제단만이 1980년대에 들어서 통일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참된 민주화는 분단이 극복되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제단의 노력은 교계제도의 경직성 속에서 소외되고 말았습니다.

그 단적인 사례는 문규현 신부의 방북을 둘러싼 교회 상황에서 엿볼 수 있어요. 문규현 신부의 방북은 분단의 고리를 끊어내고 통일로 나가는 사목적 노력의 한 표현이 될 수 있었는데, 교계제도는 그 행동을 단죄해 버렸습니다. 그 배경에는 당시 한국교회가 매개 역할을 하면서 북한당국과 바티칸의 관계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던 중요한 시기였는데, 문신부의 방북으로 그게 타격을 입게 되었다는 것도 교계제도의 부정적 태도에 부정적 영향을 주었겠지요. 하지만 이와 별개로 한국교회의 한 사목자가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온몸을 던졌고 그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다는 것. 그리고 임수경 수산나라는 한 여성신도를 보호했던 모습은 분단교회사 안에서 분명히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확인해야 합니다.

교회가 북한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북한선교위원회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북한선교위원회의 출발점은 한국교회가 선교 200주년 행사를 준비하면서 1981년 말에 준비위원회 안에 북한선교부를 두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 당시 주제가 “이 땅에 빛을”이었는데, 갈라진 한반도에서 남한만의 반쪽 땅에만 은총의 빛이 비춘다고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 역시 잃어버린 한 형제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지요. 1987년에는 장익 신부가 평양에서 열리는 비동맹회의에 참석차 바티칸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역시 1989년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앞두고 북한에 대한 정보를 알고 싶어했으며, 서울-평양-중국을 잇는 선교의 해법을 찾는데 부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황이 한국만 보고 두 번씩이나 서울에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역할을 잘 했다면 북한선교든 남북관계든 진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 교회는 바티칸에 북한체제의 특수성을 설명하고 북한교회에 바티칸의 특수성을 알게 해줌으로써 화해의 도구가 되어야 했습니다.
 

‘북한선교’라는 관점이 구체적으로 변화된 것은 1988년에는 김성태 신부를 소장으로 양한모 선생이 주동이 되고, 조광 교수, 저(변진흥), 통일원 정책실장을 맡고 있던 구본태 박사 등이 모여서 ‘통일사목연구소’를 만들었을 때부터라고 봅니다. 특히 구본태 정책실장은 1990년에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드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화해’라는 용어를 삽입시킴으로써 평신도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 남북 간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지속되어 우리 교회도 이러한 흐름을 반영하여, 1990년에 주교회의에 상정하여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이라는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꿀 수 있어 다행이었지만, 북한선교위원회를 ‘민족통일복음화위원회’로 바꾸려던 시도는 무산되어 그냥 ‘북한선교위원회’란 명칭은 한동안 유지되었지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교회의 새로운 노력은 그 후 어떻게 발전되었나요? 

그 후 한국교회사목지침서를 개정할 때에, ‘북한선교’의 정의를 “민족의 화해를 일치를 위한 사목적 노력”이라고 봄으로써 내용과 관점상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한편 1995년에는 이러한 내용을 이동호 아빠스를 중심으로 ‘사목교서’를 통해 발표하자는 이야기가 나왔지요. 개신교에선 이미 1988년에 통일선언을 발표하고 분단 50주년이 되는 1995년 희년을 선포했다는 것이 자극이 된 것입니다. 또 미국 주교회의 경우에는 경제문제와 사회정의에 관한 회칙을 두툼하게 발표하기도 했던 것이 참고가 되었지요. 문안을 통일사목연구소에서 만들어 추계 주교회의에 올렸는데, 주교회의 전체의 명의로 사목교서를 내는 데는 실패하고, 이동호 아빠스의 명의로만 민족화해를 위한 교서가 발표되었지요.

이 당시 가장 획기적 사건은 1995년에 서울대교구에서 먼저 ‘민족화해위원회’(이하 민화위)를 설치한 것입니다. 설치 명분은 당시 평양교구장 서리였던 김수환 추기경의 평양 방문을 성사시키기 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의 조선천주교인협회(현재 조선카톨릭교협회)에서도 추기경의 방문을 요청했고, 본인도 방북할 의사가 있었던 까닭입니다. 당시 천주교인협회의 장재언 위원장이 미니버스를 민화위 위원장이던 최창무 주교에게 요청한 적이 있죠. 봉수교회 등 북한 개신교에서는 남한교회에서 이미 버스를 보내줘서 신자들이 그 버스를 타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볼 수 있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 추기경이 미니버스를 북한에 보내주었지요. 그리고 마침 북한에 큰물(홍수) 피해가 발생해서 국제적 지원을 호소하였고, 한국교회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실천적인 도움을 줄 기회가 생겼죠. 이러한 지원사업에 교회가 나서게 되면서 1999년에 주교회의에도 민족화해위원회가 생깁니다. 그런데 2000년대에 들어서서 북한교회에 대해 비교적 회의적이었던 교회 지도자들이 서울대교구와 주교회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면서 북측 교회와 한국교회 사이에 다시금 골이 깊어지고, 북한교회에 대하여 '진짜신자냐 사이비 신자냐' 하는 논란이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북한교회도 교회다

북한교회에 대하여 한국교회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먼저 북한 체제에 대한 우리 교회의 시각에 대해서,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북한인권 문제와 관련해서 말씀해 주시죠.

2003년에 서강대사회과학연구회 차원에서 독일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제가 발표한 주제가 ‘북한인권 문제와 종교정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대개 북한종교를 바라보는 외부(해외)의 시각은 인권문제를 둘러싼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인권문제를 다룰 때는 언제나 ‘종교자유’를 얼마나 보장하는지에 초점을 맞추곤 합니다.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특성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북한종교의 긍정적 측면을 발견하겠지만, 그 체제의 특수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점에서만 보려고 하고, 부정적 측면만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게 되는 거죠. 모든 게 의심스럽고 부정적이라는 거죠.

북한 사회주의 체제는 기본적으로 집단주의적 조직사회입니다. 일종의 군대처럼 말입니다. 군대에서 일상적 자유가 허용될 수 없는 것처럼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일상적 종교자유가 보장되기 어렵습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종교가 한정된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남한교회에서는 북한측을 비판만 하고 불합리한 측면과 잘못된 부분을 물리적인 수술을 통해 고치려고 합니다. 저는 이런 방법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남북한은 샴쌍둥이와 같아서 생명의 줄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한쪽의 잘못된 부분을 수술한다고 할 때 잘 되면 좋지만 잘못되어 환자가 죽으면 쌍둥이의 다른 한쪽인 우리도 같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 환자가 수술이 필요하다고 무작정 수술하려 드는 것은 안 됩니다.그건 수술을 위한 수술이 되기 쉽고 ‘수술’은 우리가 사용할 만한 ‘용어’가 아닙니다. 설령 수술을 하게 되더라도 환자의 상황을 먼저 세심하게 체크해야 합니다. 마취에 대한 적응력이 있는지, 주사에 대한 알러지가 없는지 등. 신체적 조건이 수술을 감당할 수 없을 때는 수술할 수 없지요. 먼저 수술을 할 수 있을 만큼 환자의 신체적 조건을 회복시키고, 무엇보다도 환자의 동의를 구해야 합니다. 모든 병의 치유는 환자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환자가 변화 의지를 갖도록 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하지요. 이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교회의 역할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북한 사회주의 체제아래 있는 교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런 점에서는, 북한체제하의 천주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체제에서 종교는 단순히 사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사회주제 체제에서 사적영역은 자칫 범법행위가 될 수 있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의 자유가 사적 영역의 자유라면, 사회주의 체제에 그걸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북한 체제가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사회가 사회주의체제라는 걸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런 인식이 전제되어야 상호소통이 가능해집니다. 이는 환자를 진단할 때 일반적 기준이 아니라 그 환자의 신체적 정신적 특성을 고려해야 된다는 것과 같습니다.

북한교회가 공식적으로 드러난 것은 1988년 6월에 조선천주교인협회가 등장하면서 시작된 것입니다. 1987년에 장익 신부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조선기독교도연맹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북한에도 천주교인이 있느냐?”고 묻고, 신자가 있다면 만나고 싶다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때 5명의 신자를 만나고 돌아옴으로써, 북한에 천주교 신자가 현존하고 있다는 게 처음 확인되었죠. 비록 북한에선 이미 교계제도가 무너졌지만, 신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조선천주교인협회라는 공동체를 만든 것이죠. 사회주의체제라는 제약 때문에 성직자를 만들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들도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1990년에는 중국 애국회를 방문해서 애국회 주교들에게 “조선에도 신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답니다. 그때 중국 주교들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 애국회도 지금 바티칸과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계제도가 바티칸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직자를 만들고 싶으면 직접 바티칸에 요청하거나 남한 교회에 말해보라”고 하였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한국교회는 북한교회가 중국 애국회처럼 되는 것을 우려하는 것 같습니다. 북한교회의 대표격인 장재언 위원장이 북한교회에서 자기 입지를 구축하고 교계제도를 부정할까봐 걱정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제가 만나본 바로는 실제 장재언 위장은 사석에서 만나면 주교나 신부들에게 깍듯하게 대하는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북한교회는 북한체제 안에서 가능한 형태로 드러난 교회의 현존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장충성당 구성원들은 상당한 교회적인 마인드와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해방 전후에 세례 받은 구교우의 양식과 신앙을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남한교회 지도자들은 북한교회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던데. 특히 최근에는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죠. 남한 교회에서는 북한교회를 계속 비판적으로 보면서, 최창무 주교처럼 평양에 갈 때마다 장충성당 미사 참례자들이 매번 얼굴이 다르다고 그들을 사이비 신자로 모는 것은 문제라고 봅니다. 그들은 우리처럼 매주 성당에 가는 게 아니라, 가끔씩 참여합니다. 북한사회주의 체제에서는 모내기철이 되거나 바쁜 일이 있으면 주일공과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고, 외부인들이 성당에 온다고 하면, 서둘러 가능한 사람들이라도 성당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죠. 대략 8천명에서 1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신자들이 있는데, 그들 중 일부가 가능한대로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매번 다른 얼굴들을 미사에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젊은이들은 노년층에 비해서 신앙문제에 익숙하지 않은 게 사실이고, 그래서 북한에서는 옛날 신자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한국교회의 일부 주교들이 거론하고 있는 ‘지하교회’란 북한에는 없다고 봅니다. 중국처럼 교계제도를 갖춘 지하교회가 없으며, 우리가 그걸 자꾸 거론하면 오히려 북한 내부에 피바람이 불게 할 수도 있는 위험한 발상입니다. 그동안 북한의 신자들은 50-60여 년 동안 자녀들에게도 자신이 신자라는 걸 숨겨 왔을 것입니다. 북한에서 적응해서 살려면 어쩔 수 없었던 것이지요. 죽을 때에나 자녀들을 불러서 사실, 우린 천주교 집안이라고 말해 주고, 나중에라도 신앙의 자유를 얻으면 신앙생활을 하라고 귀띔해 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최근에 일부 장상들이 북한에는 교회계제도가 없으니 ‘북한교회’라는 ‘용어’를 쓰면 안 된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지하교회는 교계제도가 없어도 인정하고, 지상교회는 교계제도가 없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는 스스로 모순이지요. 북한의 지하교회가(실상 없지만) 중국처럼 교계제도가 있어서 사무적으로 신자들을 관리하고 있다면 모를까, 아무도 북한 지하교회의 현존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계에서 북한 신자 공동체에 ‘교회’란 용어를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자의적인 해석이고 일방적인 접근입니다. 설령 숨어 있는 신자들이 있다면 어서 지상교회로 합류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한교회와 소통하도록 돕는 게 바람직합니다.

   
13차 세계청년학생 축전에 참여하기 위해방북했던 전대협의 임수경 수산나와 문규현신부가 함께 1989년 8월 15일 판문점을 통하여 남쪽으로 내려온다.

종교에 대한 북한체제의 인식은 그동안 많이 달라졌다고 보나요?

지금 북한의 종교사정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고종옥 마태오 신부가 북한을 방문할 때만 해도 예전엔 항상 ‘고선생!’이라고 불렀답니다. 그런데 1989년 문규현 신부의 방북 이후로 신부를 ‘00신부’라 부릅니다. 1990년에 북한 갔을 때 사람들은 신부라는 호칭을 자연스럽게 불러주었으며, 평양 옥류관에 가서 밥을 먹는데, 건너편 손님 중에 십자성호를 긋고 밥을 먹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제가 그 사람에게 다가 가서 “천주교 다니냐?”고 물었더니, “작년에 문규현 신부가 판문점에서 손으로 이렇게 긋는 걸 보고서, 너무 좋아보여서 나도 통일을 기원하면서 따라서 해 본다”고 하더군요. 문신부 방북 이후로 종교인에 대한 북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이지요.

종교에 대한 북한체제의 인식도 달라졌습니다. 6.15남북공동행사에 종교인들이 참여하기 시작했고, 2003년에는 3.1민족대회를 서울에서 할 때 북한종교인들도 대거 따라왔지요. 105명 중에서 절반이 종교인이었습니다. 당시 북측 대표였던 강지영 부위원장은 그때 이렇게 말하더군요. “북한사회주의를 잘 아시겠지만, 종교인들이 이런 큰 민족행사를 주관할 수 있게 된 것은 종교인의 위상이 중요해졌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대회를 미치고 각 종단 시설을 방문하기로 하고, 명동성당과 소망교회, 봉은사와 천도교 교당을 방문했습니다.

별 일 없었나요? 최근엔 북한교회에 대한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것 같은데...

명동성당에서 미사도 잘하고 민화위 위원장이던 김운회 주교도 나오고 참 좋았는데, 정진석 추기경이 이들을 만나주지 않은 게 좀 문제가 되었죠. 그들은 자신들이 평양교구 신자들이고, 교구장 서리를 맡고 있는 서울대교구의 정진석 추기경을 만나고 싶은데 왜 안 만나주냐고 강력히 어필했습니다. 이럴 때 개신교가 그렇게 하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 만나서 명동성당과 장충성당이 서로 자매결연 같은 걸 맺고 공식교류를 하면 좋았을 텐데, 하고 저는 생각했지만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비록 북한에는 사제가 없지만 우리 교회가 그걸 복원하려고 노력하면서 징검다리를 놓아가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2000년 들어 교계 지도자들은 아예 북한‘교회’라는 말조차 쓰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다시 분위기가 까칠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민화위 차원에서 대북지원은 하지만 북측 교회와는 상종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지요.

장익 주교가 장충성당에 갔을 때 일입니다. 성당의 예수성심상 위쪽에 원형의 붉은 부조가 있었는데, 그걸 보고 장익 주교는 김일성 주석을 상징하는 ‘태양’을 그려넣었다고 화를 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고 북한교회가 진짜 교회가 아니란 혐의를 가졌던 모양입니다. 북측에서 해명을 하는 걸 들어보니, 그것은 매괴(장미꽃다발)였고, 장충성당을 지어서 성모님께 봉헌했다더군요. 옛날 교우들 방식으로 성당을 디자인한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그 말이 맞고 그런 장미꽃들은 외벽 창문 사이에도, 천정에도 주욱 새겨져 있더군요. 부정적 선입관이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한편 저는 이걸 보고 하나의 신비라고 여겼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봉헌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북한교회도 알아서 자신들의 교회를 성모님께 봉헌한 셈이지요. 마치 파티마의 성모 등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우리들의 회개를 촉구하셨듯이, 장충성당의 성모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남북 양쪽의 회개를 촉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상봉 2008-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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