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기호의 <닥쳐라, 세계화!>를 읽고

자칭 귀차니스트, ‘엄교’ 교주 엄기호가 책을 냈다. <닥쳐라, 세계화!>. “반세계화, 저항과 연대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청소년 리포트 시리즈 첫째 권 <포르노 ALL BOYS DO IT>에 이은 두 번째 책이다. <닥쳐라, 세계화!>는 부제에서도 드러나듯이 반세계화운동에 참여하며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운 바를 정리한 내용이다. 참 잘 썼다. 세계화로 말미암아 지구 곳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 책을 보면 환히 알 수 있다. 단순히 통계나 사건이 아니라 직접 그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살아있는 목소리를 통해 들으니 재미도 있고 더욱 실감하게 된다.

엄기호와는 2005년 1월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잇따라 열린 세계해방신학포럼과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함께 여행해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되는 법.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함께 먹고 자고 하면서 나는 엄기호가 절대 귀차니스트(귀찮은 일은 절대 안 하는 사람)가 아니란 걸 알았다. 엄기호는 브라질의 뜨거운 한낮 더위에도 흐느적거리며 토론회장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짬나는 대로 기사를 써서 <오마이뉴스>에 기고했다. 그때 지율 스님이 천성산 때문에 긴긴 단식 중이었는데, 엄기호는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와 인터뷰하는 중에 이 사실을 설명하고 연대의 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엄기호는 우리말로 쓴 기사를 다시 영어로 옮겨 우리신학연구소가 회원 단체로 있는 국제가톨릭지성인문화운동(ICMICA) 회원들에게 이메일로 보내주었다. 나는 이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많이 배웠다.

활동에 참여할 때마다 반드시 글을 쓰고

엄기호는 이처럼 국제 연대 활동에 참여할 때마다 반드시 글을 쓰고 여러 방식으로 공유한다. 언젠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런 기회를 다른 사람은 못 갖잖아요. 그러니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기 경험과 느낌을 나누는 건 책임이라고 생각해요. 후배들에게도 자기 활동을 최대화, ‘맥시마이즈’하라고 자주 얘기해요.” <닥쳐라, 세계화!>의 거름은 이렇게 현장을 누비며 쓴 기사들이고, 이 책 또한 자기 활동을 최대화하려는 엄기호의 노력이다. 정말 멋진 자세가 아닌가.

엄기호는 “책을 내며”에 감사해야 할 사람 이름들 사이에 내 이름도 슬그머니 올려놓았다. 다른 사람들이야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나는 오히려 내가 고맙다. 세계화에 대해 잘 모르는 나를 ‘양성’하기 위해 ‘내가 가지 않으면 자기도 가지 않겠다’고 협박하며 나를 여기저기 반세계화 투쟁 현장으로 끌고 다닌 엄기호 덕분에 반세계화, 그 저항과 연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배웠기 때문이다.

제국은 안으로부터 찢어내야 하는 체제

“이 책에서 그려낸 것처럼, 세계를 돌아다니며 만난 세계화에 맞선 쉼 없는 싸움들은 패배주의가 아니라 활기와 영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것도 세계화의 가장 밑바닥에서, 세계화의 경계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도저히 싸움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의 공간에서 에너지로 가득 찬 활동들이 꿈틀꿈틀 일어나고 있다. 어른이든 아이든 반세계화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이들을 보며 반성하고 영감을 얻고 다시 움직인다. 때로는 이들의 비참한 현실에, 때로는 이들의 싸움이 던져주는 영감과 활기에, 또 때로는 이들의 엄격한 실천을 보면서 사람들은 감동을 받는다. 싸움이 전염되고 전파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싸움과 그 전파를 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제국에 바깥은 없는지 모르지만 구멍은 엄청나게 많다는 사실이다. 제국은 바깥으로 탈주할 수 있는 체제가 아니라 안으로부터 찢어내야 하는 체제인 셈이다.”(315쪽)

<닥쳐라, 세계화!>의 에필로그에 있는 글이다. 엄기호가 이 책을 통해 얘기하고 싶었던 건 바로 이 얘기일 거다. 우리는 요즘 엄기호의 이 같은 성찰이 현실화되고 있는 현장, 장대비에도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는 촛불 잔치를 날마다 보고 있다. ‘사이비 귀차니스트’ 엄기호는 오늘도 그 잔치판에 함께 하며 자기 활동의 최대화를 모색하고 있다.


/박영대 200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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