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거리에서 새로운 시대 열리다

광화문 현장의 느낌으로는 지난 토요일부터 ‘이명박 퇴진’이 시위의 핵심 구호가 되었다. ‘독재 타도’라는 구호도 자주 들린다. 합법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에게 갑자기 독재, 퇴진이라니, 언뜻 어불성설같이 들린다. 쇠고기 얘기하다가 갑자기 퇴진이라니 이상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민심을 못 읽은 것이다. 그것도 급격하게 진화한 새로운 민주주의적 합리성을 못 읽은 것이다.

조롱거리가 된 한심한 권력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 너나 먹으세요’라는 조롱은 쇠고기에 대한 조롱이 아니라 바로 ‘강부자’ ‘고소영’ 정부에 대한 조롱이다. 그 조롱에는 ‘빵이 없으면 케익을 먹어라 (미국산 쇠고기 먹기 싫으면 안 먹으면 된다)’고 한 대통령을 비롯해서 한국 사회가 얼마나 심하게 상류층과 서민층으로 나뉘고 있는지를 잘 아는 민심이 들어있다. 시위해산을 종용하는 경찰서장에게 ‘노래나 하라’고 야유를 보내는 것은 바로 ‘너나 먹으세요’라는 조롱과 같다. ‘중국 국기를 들고 다니면 절대 안 잡습니다’, ‘경찰 모자를 멀리 던지세요, 이들은 시민 안전 보다 모자를 지키는데 더 열심입니다’ - 집회 현장의 피켓과 인터넷 카페를 보면 기상천외한 풍자가 넘쳐난다. 수천 명의 전투경찰이 앞에 깔렸는데 시위대는 웃으면서 자신감 있게 ‘청와대, 청와대’로 외친다. 악쓰는 사람은 많지 않다. 여기에는 국가권력의 횡포를 내가 스스로 견제하겠다는 마음이 들어있다.

풍자, 자신감의 문화

풍자는 분노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권력을 공격하는 방식이지만 분노와 다르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무력화시킨다, 사람들의 마음속으로부터. 이러한 풍자와 재치의 문화는 ‘지도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수평적인 의사소통과 민주적인 정보 공유에 자신감이 있는 새로운 세대가 할 수 있는 자신감의 문화다. 새로운 세대의 시민들은 이제 새로운 민주주의를 스스로 학습하고 만들어내고 있다. 1980년 5월, 1987년 6월의 길거리 민주주의 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문화가 풍부하고 여유가 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소통하면서 스스로 학습하는 새로운 시민

민주주의의 장점은 사람들이 스스로 학습하는 공간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이번 촛불집회의 문화는 그렇게 형성되었다. 스스로 소통하고 조사하고 학습하고 행동하는 자발적 민주화. 어떤 비난도 어떤 권력도 여기에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정부와 극우 언론이 아무리 그럴 듯한 설명을 해도 새로운 시민들이 전 세계적으로 반박 자료를 찾아 돌리는 것을 막지 못한다. 오만한 대통령과 무능력한 장관이 아무리 말실수라고 해명해도 그의 전력과 말이 연계되어 수십만 명의 사람들에게 학습 효과를 준다. 이제 시민들 70%의 생각에 쇠고기 협상은 굴욕협상이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이제 다수에게 이 정부가 대단히 오만하고 위험하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일요일 새벽 전경 군화발에 잔인하게 머리를 짓밟히는 여학생의 동영상은 아침 먹는 시간에 전국적으로 유포되고 점심 먹는 시간에 세계적으로 유포되었다. 그 다음날 새벽에는 짓밟은 전경의 얼굴과 계급장이 사진으로 유포되었다. 전날 물대포에 여러 사람들이 부상당하자 몇 시간 후 물대포를 막는 새로운 방법이 [다음 아고라]에 떴고 같은 날 저녁에 바로 실행되었다. 커다란 텐트를 수십 명이 함께 치켜들고 경찰의 저지선을 밀어붙인 것이다.

반면 조중동문 일간지를 보는 사람들은 이번 주말부터 촛불시위의 ‘배후’와 ‘좌익빨갱이’를 찾는 기사가 갑자기 사라진 점을 개탄해야 할 것이다. 조갑제는 대통령에게 ‘항복하지 말라’고 주문했는데 며칠 지나 조선일보는 여당의 원로가 ‘국민이 성나면 대통령이 항복해야지’라고 말한 것을 보도해야 했다. 그 즈음 중앙일보의 한 기자는 ‘중앙일보가 기록하지 않는 것들’이라는 글을 써서 촛불집회를 보도하지 않는 자사의 침묵을 반성하기도 했다. 이제 미국산 쇠고기를 시식하는 척 하던 그런 쇼를 다시 하려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기회만 되면 신자들을 동원해서 성조기를 들고 길거리로 나오던 극우기독교 세력도 조용하다. 그런 극우세력의 궐기를 주장하던 선동가들의 목소리도 잠잠하다. 어떤 교회기업의 목사가 촛불집회를 마귀의 사주라고 비난했는데 심지어 보수 언론의 관심도 별로 끌지 못했다. 극우 언론도 간사하리 만큼 권력의 변화에 눈치가 빠르다. 혼란스러워 할 독자들만 불쌍하다.

권력의 변화에 눈치가 빠른 조중동문

아마 조중동문 애독자 만큼이나 학습에 느린 집단이 미국의 보수파들일 것이다. 주한 미 대사 버시바우는 야당 대표를 협박하는 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는지 아니면 야당 대표가 고분고분하지 않아서 성이 났는지 다른 자리에서 ‘쇠고기는 안보와 동맹의 문제’라며 길이 남을 뻥을 쳤다. 국제정치사상 최초로 쇠고기가 안보 문제로 등극하는 순간이었고 앞으로 주한미군의 새로운 역할이 기대되는 대목이었다.

학습에 더 느린 미국의 보수파들

그런데 문제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미국 보수파들이 학습해야 할 것은 쇠고기 속에 숨이 있을 안보와 동맹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정부가 미국 축산업자들의 이익을 밀어붙이니까 한국의 주권자들이 심각하게 반발하면서 친미 정권이 크게 타격을 입는다는, 어느 정도 국제적인 교훈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친미 정권을 키우려면 노력이라도 좀 세련되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누리꾼 정도의 국제적인 감각이라도 갖춰야 할 것이다. 이 역시 한 사회의 민주화가 계속 진화하면서 어떤 힘이 만들어지는지 배우는 과정이다.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세대에서 ‘독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형성되고 있다. 강대국 대통령의 골프차나 운전해주는 외교, 땅투기와 상층 인맥을 통해 형성된 부자들의 정권, 교육과 의료와 에너지에 관한 시민의 권리를 기업에 넘기려고 하는 정부, 다른 의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오만한 집권자, 그 집권자 뒤에서 미소 짓는 미 축산업자와 호통치는 미 대사 - 이것이 지금의 ‘독재’인 것이다. 이러한 민의의 형성이야 말로 하루짜리 선거민주주의를 넘어서 진화하는 심층 민주주의다. 풍성한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길거리에 나와, 새로운 이성의 도래를 목격해 볼 만하다. 이명박 정부는 건설업 방식을 좋아해서 언제라도 불도저 강경책으로 돌겠지만, 양극화된 사회에서 대중의 합리적 저항은 그 어느 때보다 클 것이다.

/이대훈(성공회대학교 겸임교수, 평화학)  2008-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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