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황종렬 박사]
교회선교 패러다임, 단수 아닌 복수..여러 종교 여러 평신도운동에 대한 배타성 없어야

▲ 아시아 각 나라에서 주교들이 대거 참석했다. (사진/한상봉 기자)

지난 9월 1일부터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는 아시아 가톨릭 평신도대회가 열리고 있다. <평신도 그리스도인>이나 <아시아 교회> 등의 문헌을 바탕으로 아시아 대륙에서 주교와 일치하여 복음적 사명을 수행하는 평신도들이 현세안에서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다루는 것이다.

평신도에 관한 교회문헌을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그걸 안다고 다 실행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도 있고 영성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평신도대회는 아시아의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평신도들이 어떻게 복음적으로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다. 대회가 한국에서 개최되지만 아시아 교회의 연대와 아시아의 삶의 자리를 전제하지 않으면 단순한 행사나 모이는 이들의 개별적인 사건으로 끝날 가능성이 있다.

아시아의 맥락을 한국교회가 아는지도 의문이다. 물론 한국교회가 자기 삶의 자리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전제가 되어야겠지만, 한국교회만의 행사가 아니라면 개최국으로서 한국교회가 아시아에 대한 이해가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개막미사에서 리우코 추기경이 가톨릭 교회는 '아시아의 수천년 된 문화와 종교전통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표현을 하면서 신앙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선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수님은 아시아 출신인데 정작 아시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데에 문제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급격한 성장을 이루어서 세계 교회사의 유래없는 성공 케이스가 되었고 그 모범을 배우기 위해 한국에서 이 대회를 개최한다고 했다. 아시아의 다종교 상황에서 다소 공세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 황종렬 박사
그러나 리우코 추기경의 말을 아시아 주교들과 평신도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또 다른 문제다. 성숙한 태도로 받아들인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고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 다른 종교나 다른 문화의 전통 안에 깃든 하느님의 축복을 간과하거나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이슬람도 여전히 아시아 종교권이다. 그런 것들에 대한 대립적 사고관을 조장한다거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또 다른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

사실 한국에서는 이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 한국사회가 다종교, 다문화 상황이지만 타종교에 대해 배타적이기보다 비교적 포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자리잡혔다. 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이 극소수인 태국, 인도, 캄보디아, 베트남 같은 나라들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이런 이야기들을 다른 아시아 나라에서 어떻게 응답하겠는지 고려해야 한다. 소수 종파인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이 그곳에서 겪을 위기와 생존의 위협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

나름대로 고뇌가 있었겠지만, 이번에 리우코 추기경이 말씀하신 것은 이슬람교를 둘러싼 유럽교회의 고민을 아시아에 투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그런 측면이 있을 것이다. 유럽교회에서 전통에 충실하자는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어떤 상황에서 누가 듣는가, 삶의 자리에 대한 문제다. 다원종교 상황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은 우리나라에서 제사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응답으로 연결된다. 17,8세기 중국, 인도의 경험을 봐야 한다.

인도에서도 의례의 문제가 있었다. 마테오 리치 서거 400주년인데 그분이 유교와 대화하면서 신앙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이를 인도에 적용시킨 신부가 로베르토 데 노빌리다. 노빌리 신부의 견해는 인도 다원주의 신학의 효시다.

중남미의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주교 역시 삶의 자리에서 현실과 대화한 해방신학의 선구자다. 해방신학은 20세기가 아니라 17세기에 이미 선교사들이 식민지 상황에서 선교에 대해 성찰하고 회심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토착민들을 지배했던 정치권력과 교회를 향해 '구원이 없다'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정면으로 이야기한 것이다. 그렇지만 식민지를 지배했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카사스 주교의 말 역시 수용했다. 

이처럼 교회의 패러다임은 아무리 소수라 하더라도 단수가 아닌 복수로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수가 20세기에 해방신학으로 결실을 맺고 가난한 이들을 설득하는 모습들을 우리는 지켜봤다. 오늘날 세계교회에서 이런 다양한 흐름들을 제외하고는 복음을 말할 수 없다.

특히 중국에서 마테오 리치가 제사논쟁을 건강하게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었음에도 교회가 수용하지 못한 아픔의 측면이 있다면, 로베르토 데 노빌리가 생전에 종교재판까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켜줘야 한다는 추기경들도 있었다는 측면도 있다. 이러한 흐름이 현대 인도교회에서는 아말라도스 신부 등 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아시아 문화와 종교전통에 충실한 것을 마치 이단이나 그리스도교에 대한 간과, 약화로 인식하는 태도는 현장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것이다. 오히려 아시아 문화 종교전통을 지역교회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다스림안에서 다시 읽어내야 한다. 그 문화전통과 만나서 충실하게 응답할 수 있는 신학적 비전, 영성적 깊이, 사목적 충실을 갖춰야 한다.  

▲ 정진석 추기경이 개막미사에서 추기경좌에 앉아 제대를 바라보고 있다.(사진/한상봉 기자)

다른 많은 아시아교회가 특별한 종교전통 안에서 소수종교로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데, 이런 부분을 체험하지 못한 한국교회와 바티칸에서 주도하는 이 대회가 실제로 아시아 지역교회의 현실적 고민을 담아낼 수 있을까에 대한 우려가 있다.

언제나 위기속에서도 선의를 갖는 신앙인이 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회기때, 교황청 관료들은 자신들이 준비한 문헌으로 빠르고 순조롭게 일을 처리하고 싶었지만, 첫 회기에 단 하나의 문헌도 통과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다는 점이 바티칸공의회의 위대함이다. 막상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따로 있음을 밝혔고, 교황청에선 새로 위원회를 구성해 처음부터 다시 논의해야 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아무도 모른다.

이 대회도 성령이 함께하고 그것에 귀기울이는 이들이 있다면 그분의 뜻대로 갈 것이고, 막으면 막는대로 갈 것이다. 삶의 자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어떤 것도 복음에 가까이 갈 수 없다. 주최측에서 선의를 갖고 있더라도 그 선의가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겸허하지 못하다면 그 만큼 신음은 깊어질 것이다. 

이제 한국교회의 평신도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한국교회 200년 역사의 흐름이 있다.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교회에 충실하게 머물면서 그 가운데 길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이들이 있다. 좁은 의미의 교회 범주에 머무는 것이다. 이벽, 정약종, 정하상, 외방선교회 신부들, 김대건, 최양업, 현대의 김수환 추기경 등이다. 또 다른 하나는 민족의 역사, 운명, 지역사회와 사람들이 직면한 삶의 고난에 밀접하게 응답하면서 자기 신앙을 통합해 가는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이 흐름은 정약용, 안중근, 가톨릭노동청년회, 가톨릭농민회, 지학순 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 다양하게 사회운동에 투신하는 이들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가노청)의 경우와 가톨릭농민회(이하 가농)의 활동을 비교해보면, 가노청은 무너졌는데 가농은 이어져 오고 있다. 그것은 운동의 특수성 때문이다. 청년시절은 지나가는 것이지만 농민으로서의 삶은 오래 지속된다.  

사실 나는 가노청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원래 이름을 지켜주고 싶다. JOC(Young Christian Workers (Jeunesse ouvrière chrétienne). 정확히 그리스도교 청년 노동자다.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아니다. 그리스도교를 '가톨릭'이라고 바꾸어 지평이 좁아진 것이다. 가노청은 명칭 자체가 까르댕 추기경이 추구했던 교회일치, 문명사회 포용을 담아내지 못한 것인데, 우리가 몰랐기 때문에 그것을 답습했던 것이다. 바로잡아줄 필요가 있다.

청년들이 가진 연령층의 제한, 유동성과 달리 농민은 땅과 더불어 살기 때문에 한번 몸담으면 오래 지속된다. 반대로 노동자들은 이동을 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런 특성을 함께 봐야 한다. 머물 때와 움직일 때를 동시에 봐야 한다. 한가지만을 가치로 보는 사람들은 다른 하나를 소홀히 할 수 밖에 없다. 자기 존재에 근거해서 삶에 충실하게 되면 이야기 할 수 있고 서로 보완, 동반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는 사실 청년회가 아닌 노동자회다. 청년계층 노동자일 따름이다. 이런 주체성이 지켜져야 하는데 무너지게 되었다. 예전엔 신앙인이 아니더라도 가노청 안에서 연대하고 함께 활동하면서 비신앙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역동적 삶이 숨어 있다. 그것을 교회가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전통이 평신도 대회에 녹아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농민들의 투신도 여전히 고뇌와 부족함에 대한 고백을 통해서 농민의 생명살림을 지켜가려는 흐름이 있는데 이것을 평신도 대회에서 함께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번 아시아평신도대회가 도시본당의 도시 평신도들을 중심으로 열리게 된다면, 한계에 봉착할 것이다. 다른 아시아 평신도들과 공유하는 현장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현장과 농촌에서 일하는 이들이 참여해 그들의 경험을 나누어 줄 때 지금 중국, 인도, 베트남 등에서 농민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우리의 유산을 전해줄 수 있다. 그럴 때 감동이 있는 것이다.

본당을 전산화 하고, 여러 형태의 교육을 하고 첨단 장비를 사용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것이 그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시아의 어떤 교회는 칠판조차 없다. 이것은 우리 교회 60년대의 모습이다. 그 당시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야기해주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어떻게 순교자들의 삶을 이어받았는지를 이야기 해주어야 한다.

이번에 절두산성지에 순례한다는 프로그램도 있던데, 성지순례를 함께 하는 것도 굉장한 일이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설명해주지 못한다면, 무책임한 일이고 교회간 단절이 생기게 된다. 오히려 그것은 한국교회가 자기자랑만 하고, 다른 아시아교회에 위화감을 조성할 뿐이다.

한국교회의 부유함만을 내세우면, 그들은 우리에게 원조를 받을지언정, 영혼의 교감은 없게 된다. 이런 부분들을 보면서 아시아 평신도들과 동반해야 한다. 왜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었는가를 설명해주어야 하는데,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순교자들의 이야기들을 단편적으로 하는 것은 그들이 이해할 수 없다.

▲평신도대회 개막식에 참가한 유인촌 장관. (사진/한상봉 기자)

이번에 자료집을 보면 '평신도 대회의 기대효과로 G20이 서울에서 열리는 해에 한국에서 평신도 대회를 열게 됐고, 다른 나라의 평신도들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국위선양의 기회로 삼는다'는 내용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국위선양이 된다. 그러나 복음적이지 않으면 오만, 자화자찬이 될 뿐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에게 부러움을 살 수 있겠지만 복음을 만나게 할 수는 없다. 복음이 없는 국위선양을 과연 교회가 바라는 것인가. 하느님 나라에 귀의하지 못하는 국위선양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나도 '한국신학'을 하는데, 한국신학을 협의의 민족주의, 우월의식으로 본다면 그런 한국신학은 있을 이유도 없고, 없는 것이 났다.

또 한가지 논점은 주교와의 일치다. 그것을 강조하다 보니, 이번에 초청장을 돌릴 때도 비공인단체는 초청이 되지 않았고 공인단체도 사회운동영역은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다. 첫 번째 라인을 따르는 흐름과 두 번째 흐름을 따르는 것이 통합되어야 한다고 본다. 의식을 했든 안했든 결국은 배제의 형식인데, 한국교회 역동성의 한 축이 무시되는 것이다. 그 한축이 사실은 지금 아시아 대부분의 교회가 겪고 있는 상황과 접목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평신도 대회의 가장 큰 맹점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이 부분은 어떻게 보는가?

7-80년대에는 가노청이나 가농 외에는 사회적 운동 단체가 교회 안에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런 것 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 교회 전통이 아직 평신도 운동을 온전히 품어낼 수 있을 만큼 역량이 되지 않고, 평신도운동 역시 70년대 이후의 전통이 충분히 계승되지 못한 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반증이다. 비록 제도교회가 평신도사회운동을 배제하더라도 그것을 그냥 몸으로 살아내는 전통이 아직 약하다. 

교회 지도자들 측면에서는 복음적 관점에서 운동을 식별하고 동반하면서 교회의 공식 흐름으로 품을 수 있는 이들이 없는 게 문제고, 평신도들 사이에서도 운동을 복음적으로 승화시켜 끝까지 감당할만한 훈련, 투신, 연륜이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성직자들은 이 시점에서 왜 한국교회에서 가노청이 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쇠락했는가 하는 것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가노청 회원들이 남아있었지만 중반 이후 전국단위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1985년 구로 연투사건, 1987년 민주노조 설립 등을 겪으면서 현저히 나타난 현상이다. 

예전에 가노청에서 양성된 활동가들은 급격하게 늘어난 노동조합운동에 유입되었고, 새롭게 가노청에 들어온 회원들은 훈련받을 기회를 잃었다. 즉, 이전에 가노청에서 양성된 이들과 일반 노동운동이 활성된 후 가노청에 들어온 이들 사이에 단절을 겪게 되는 것이다.

한편 교회 역시 급격한 교세확장으로 본당활동마저 감당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노청 자체를 이해할 수 없게 되고, 노동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더구나 1987년 이후 교회사업장 안에서도 노조가 생겨 교회안에서도 관리자와 노조가 대립하고, 특성상 가노청은 노조와 관계를 맺게 되면서, 신앙인으로서 교회를 상대로 맞서는 구조가 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노동의 복음화' 차원에서 서로 화해시키고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는데 교회지도자 가운데 그 역할을 할 사람이 그 시기에는 없었다. 따라서 가노청 선배들, 성직자들, 교회 관리계층들, 새로운 가노청 회원들 모두에게 책임이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까르댕 추기경이 가노청을 만들 때도 처음엔 교회 비공인 단체였다. 그들은 처음에 '청년노조'로 시작했는데 결국 교회와 기업가들에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결국 교회의 공인을 얻었다. 그런 것처럼 한국교회 평신도 운동 역시 이 과정을 견디며 주교나 추기경과 연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사람이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처럼 주어질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평신도운동이 밟히고 밟히는 중에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거기까지 못갔다면 아직 밟혀야 할 시간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교회 성직자들에게 넘겨서는 안된다. 끝까지 밟히고 견디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모두 함께 해야 한다.

▲ 평신도대회에서 축사를 하고 있는 주한 오스발드 파달랴 교황청 대사. (사진/한상봉 기자)

경험적으로 바람직한 사례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원주교구 같은 경우엔 지학순 주교 시절에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한 경험이 있지요? 얼마 전에 돌아가신 박재일 선생도 그중 대표적인 분이죠.   

박재일 선생이 원주교구에서 일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소비조합운동을 기획했다. 실제로 그분이 시작한 '밝음수퍼'라는 생협은 '무인 수퍼'였는데, 소비자들이 알아서 돈을 지불하고 상품을 사 가는 시스템이었다.

박재일 선생님이 생협운동을 시작할 때, 교구에서 독일 원조기관인 미제레올에 원조를 요청했고, 원조가 받아들여져 돈이 왔지만 교구에서 다시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때 최기식 신부가 책임자였는데, 사업 취소로 다시 원조 받은 돈을 돌려보냈더니 그 쪽에서 다른 방법을 찾아달라고 제안을 했다.

결국 이 사업은 교구와 직접 상관없이 박재일 선생에게 넘겨졌고, 결국 이게 모태가 되어 한살림 운동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는데, 평신도에게 맡기고 뒷바라지를 했던 원주교구의 위대함과 이런 일을 직접 감당하지 못했던 아쉬움, 두 가지 모습이 있다. 오히려 사제들이 장악하고 능력이 없음에도 관리자로서 전횡을 부리는 것보다는 평신도에게 맡겼던 것이 위대하고, 한살림은 그 선택위에서 태동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평신도가 주축이 되어 한살림을 시작했을 때, 사제들은 저마다 나름대로 이 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해 주었다. 그 당시 지학순 주교도 한실림 회원에 가입했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야말로 성숙한 교회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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