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를 타파하라” -한미 관계와 믿음



한국에서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자 한미동맹의 ‘균열’과 ‘위기’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급증하면서 웃음을 자아냈다. 그런 이야깃거리도 우습지만 한미동맹을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동맹으로 보는 사람들이 그런 소릴 하니 허풍이 따로 없다.

지난 10년 동안 두 민주 정부는 그 어느 때보다 미국 무기를 많이 사들였고 침략 전쟁도 원하는 대로 다 지원했다. 미국이 앞으로 다른 나라를 치면 돕겠다고 (전략적 유연성) 막후에서 약속도 해주었고 막대한 기지 이전 비용과 조건도 다 들어주었다. 이런 모든 일에 따르는 더러운 뒷설거지도 다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왜 보수 세력은 동맹의 균열과 위기를 앞세우면서 괜한 히스테리를 보이는 것일까.

미국의 히스테리, 이유가 있다

이 히스테리는 사실 이전 정부의 정책 보다는 국민의 태도를 표적으로 삼고 있다. 목적이 있는 히스테리다. 미 소고기 반대 촛불집회 같은 것이 열리면 이들은 안절부절이다. 언론 사상 전례가 없는 방식으로 주류 언론이 합심해서 청소년들을 협박한다. 그리고는 한국전쟁 때 죽은 미군이 몇 만 명인데 소고기 먹고 죽을 그까짓 몇 명 때문에, 또는 미군기지 오염 따위로 광분하느냐고 따진다. 즉 이들이 위기로 보는 것은 한국인들 사이에서 감히 미국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이 등장했다는,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교리를 따르지 않는 이교도들에게 반감을 표시하는 방식이다.

노무현 정부에 대해서도 사실 이들은 정책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태도를 문제 삼았다. 노무현 정부는 미국 정부의 요구를 다 들어주면서도 문서 기록상 따질 것 몇 가지 따지고 파병 규모를 좀 줄였을 뿐인데 이들은 발작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한국은 미국에게 말을 거는 주권국가가 아닌데 감히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냥 듣기만 하지 않고.

이들에게 국민은 일사불란하게 미국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국민, 즉 파시스트적 국민 또는 광신도들의 집단이어야 하는데 영 말을 듣지 않는다. 민주주의가 왔는데 더 위험해졌다 - 중구난방 자유로운 한국은 미국과의 동맹에서 위기로 보일 수밖에.

한미동맹 교리, 조폭의 세계

그래서 미국의 안보전문가들의 하는 농담 중에 바로 이런 말이 있다 - 미국은 다른 나라의 민주화를 지지하지만 민주화된 나라와는 사이좋게 지내지 못한다. 민주화된 시민과 정부는 따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맹의 비용과 가치를 따지는 실용주의자들도 실용주의 정부에서는 그저 빨갱이일 뿐이다. 성스러운 미국에 대해서는 실용적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된다, 그저 주님 믿듯이 믿어야 한다, 교회에 나가면서 비용과 가치를 따지면 되나, 구원만 받으면 되지, 누가 지어준 교회이고 누가 가르쳐준 교리인데. 그래서 몇 년 전부터 국정원은 지하철과 버스마다 포스터를 붙여 국민들에게 경고해왔다. 순진한 스마일 마크 뒤에 빨갱이가 숨어서 “평화로울 때가 위험할 때”라고 알려주는 포스터. 민주화가 되면 더 위험해진다고 예고라도 하려는 듯.

한미동맹을 교리로 삼는 신자들이 주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은 보통 “북한의 위협과 주변강대국의 잠재적 위협 등 지정학적 조건”을 내세우는 것이다. 한국에서 이 ‘지정학’적 해석은 누구나 어렸을 때부터 사실상 세뇌교육을 받아서 안 믿기가 힘들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있고 항상 침략 당했으니 그 중 맘씨 좋은 강자의 등에 엎여 살아남아야 한다는 소위 역사적 교훈. 이 상상의 세계에서 가치와 비전은 없다. 절대적 보호자 또는 절대적 가부장이 부각될 뿐이다. 어떤 대통령 국방보좌관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골목에는 골목대장이 있는 편이 낫다’고 언급할 정도로 이 지정학적 세계는 보호자를 성자로 모시는, 거의 조폭의 세계다.

우리가 사는 곳은 뒷골목이고 (그러므로 넓은 데에서 사는 주류 국민은 따로 있다, 오렌지를 어린쥐라고 말하는 국민), 자비로운 골목대장이 우리의 살 길인 것이다. 국가 이외에 역사를 이해하는 주체도 없다. 냉정한 적자생존의 다윈주의 이외에 역사적 비전은 없다. 국민총화 이외의 상상이 없다. 이 지정학적 해석은 부국강병의 고고학적 발굴과 같이 간다. 인간과 윤리,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하고 준비할 기반이 설 자리가 없는 세계관이다. 우리의 절대적 보호자는 누구인가, 하는 게 유일한 목적이 된다. 이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세계에서 우리는 파시스트적 국민이 되는 길 외에 살 길이 없다.

신은 교회를 통해서만, 믿음은 동맹에서

한국에서 동맹론자들은 절대자에 매달린다는 면에서 중세 기독교적 세계관을 답습하는 것처럼 보인다. 교회 밖에 구원은 없기 때문에 신은 교회를 통해서만 구현된다는 믿음은 동맹 밖에 구원은 없으며 안보(번영, 부국, 강병 등 달리 표현되더라도)는 동맹을 통해서만 구현된다는 상상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절대적 성직자가 신의 계시와 진리를 독점하고 그 외의 어떤 사람도 여기에 도전할 수 없었듯이 동맹론자들은 새로운 성직자로 등장해 그 외의 어떤 사람도 진실을 해석할 수 없게 한다.

성직자들은 진실 해석을 독점해서 누가 악마의 포로가 되었는지 종말이 어떻게 언제 오는지, 그 종말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홀로 알 수 있다고 자처한 것처럼, 동맹론자들은 누가 빨갱이인지, 안보 위기가 언제 어떻게 오는지, 그 안보 위기를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오로지 홀로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그들의 해석을 무조건 받아들여야만 한다.

신과 직접 소통하는 교회가 우리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보장하듯, 강대국과 직접 소통하는 국가는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우리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이들에게 광우병 소고기 문제가 그저 괴담인 이유는, 이 혼란이 마녀들이 퍼뜨린 주술 때문이며 그러므로 문제의 해법은 그 마녀들(배후세력)을 찾아서 화형시키면 되기 때문이다.

교황 무오류설과 한미동맹의 영원성에 관한 믿음

교회가 오류를 보일 수 없다는 믿음(교회 무오류설, 교황 무오류설)은 한미동맹이 영원해야 한다는 믿음과 같은 사유 구조를 보인다. 교회/국가가 무오류이기 때문에 여기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마녀이거나 불순분자가 된다. 무오류의 진리를 가르쳐주는 교회는 당신이 누구를 위해서 죽어야 하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종교를 이유로 죽었는가), 즉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려주며,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알려줌으로서 당신이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증오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새로운 성직자들인 동맹론자들 역시 당신이 누구를 위해서 죽어야 하는지 (광우병 소고기를 먹더라도 기쁘게, 침략전쟁에 나가서도 기쁘게) 알려줌으로써 당신이 어디에 소속된 누구인지를 알려주며, 당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자신과 가족의 건강이 아니라 동맹!) 알려줌으로써 당신이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증오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이러한 믿음이 성자들을 항상 기억하면서 유지되듯이 동맹의 종교는 한국전쟁에서 미군이 얼마나 죽었는지를 항상 기억하고 기도함으로서 유지된다.

동맹으로 포장된 종교적 광기

보수적 기독교 세력이 한국의 우익을 구성하고 대미 사대주의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에는 이념적 동질성이 크게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근본주의 사상과 종교에서처럼 절대적 보호자를 사유와 가치의 중심에 놓을 때 이런 파시스트적/광신적 교조와 실천이 발생한다. 그러므로 한국 사회가 동맹론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할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정치적 이유보다도 이런 광기가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하자는 문화적 이유가 더 크다.

‘동맹’으로 포장된 이런 광기를 잠재우는 길은 무엇일까? 아마도 성직자 계급의 횡포를 억제하는데 그 계급의 성스러움을 낮추는 것이 필요했듯이, ‘동맹’론자들의 횡포를 억제하는 데에는 그들의 신성함, 즉 안보론에 대한 독점을 타파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인지 자칭 성직자들이 맘대로 독점해서 해석하지 못하게 하려면, 위협 해석에 대한 시민권을 회복해야 한다. 즉 광우병 소고기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듯, 시민들 누구나 이러 저러한 위협에 대해서 나름대로 평가를 내린다면, 특정한 위협만 과대포장 하는 성직자들의 전횡이 억제될 것이다.

동맹론자들은 사제복을 벗어라

나한테는 이 문제가 더 중요해, 우리한테는 이것이 더 큰 위협이야 - 젊은 촛불 집회 참가자들이 제기하는 이 어법은 사실상 안보문제에 대한 민주화나 마찬가지다. 사실 1987년 이후 점차 많은 영역이 민주화되고 있지만, 오로지 안보와 위협의 영역에서는 아직도 소수의 자칭 전문가들의 독재, 즉 정보와 해석의 독점이 횡행하고 있다. 가장 민주화를 거부하는 분야가 아마도 안보 분야일 것이다. 그만큼 교조적인 믿음과 거짓 성역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동맹론으로부터 자유로와져야 하는 이유는 문화의 전환에 있다. 위협에 대한 교조와 전문가들의 진실 독점에 의해서 다수의 사람을 좌지우지 하는 전통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이는 다양성과 시민권을 안보와 위협의 영역에서 회복하여 민주주의 문화를 예외 없이 확신하자는 뜻이다.

미국이 민주화된 나라를 껄끄러워 한다면 그 나라도 배워야 할 것이 많다. 자칭 전문가들이 민주화된 평민의 목소리를 껄끄러워 한다면 그들도 시대를 읽고 더 배워서 사제복을 벗어야할 때가 왔다.

/이대훈(성공회대학교 평화학 강사) 200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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