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동료 교수의 모친상으로 병원 장례식장을 찾았다가 당황스러웠던 적이 있다. 늘 하던 식대로 영정을 향해 두 번 절한 후 상제 쪽으로 한 번 절을 했고, 동료 교수인 상제 역시 함께 절을 하며 예로써 내 절을 받았다. 그런데 맏상제인 형은 몸을 낮추지 않아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대로 뻣뻣이 서서 절을 받지 않는가.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 됐다 싶었지만 어색한 표정을 애써 짓지 않으려 했고, 돌아서는 순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영정 아래쪽 바닥에 안내판이 있었던 것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얼핏 보니 “기독교식 장례를 치르니 절대신 묵념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내겐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묘한 느낌이었고 난감한 경험이었다.

‘기독교식 장례’라고 안내를 할 정도면 절하는 것이 정말 싫다는 뜻 아니겠는가. ‘절’ 문화가 불교문화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우리네 전통예법이요 동양문화의 한 얼굴이라는 생각을 해온 나로서는 기독교인들의 무지와 막무가내가 이해하기 어렵다. 1백여 년 전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 우리들이 절하는 모습을 보고 ‘미개한 사람들의 우상숭배’라고 했던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있다니. 서구종교 우월주의를 기반으로 전통신앙을 비난, 말살하고자 가르쳐준 대로 지금까지도 철저히 믿고 따르는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해 미국인들 스스로도 놀랄 정도라니 안타까울 뿐이다. 지구상의 기독교 중 한국의 개신교가 미국 다음으로 배타성이 강한 배경이며 우리 사회의 통합에 오히려 부정적인 기능을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가시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절 때문에 난처한 또 다른 경우는 제사 지낼 때일 것이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죽음을 생의 마지막으로 보지 않는다. 생명은 내생으로 이어져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의 혼을 불러 생전에 모신 것처럼 가까이 느끼고 음덕을 기리는 것이 제사 아닌가. 조상 덕분에 모처럼 온 가족친지들이 함께 모여 우의를 다지는 자리이기도 한 복합적인 가족 문화행사의 자리이다. 그런데 그런 제사에서도 허리 굽혀 절은 못하겠다며 간단한 목례만 하는 사람들이 있어 분위기를 어색하게 하거나, 심지어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하긴 아예 제사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들보다는 그나마 낫다고 해야 할지...

장례나 제사뿐이랴. 최근에 와서는 결혼식에서도 종종 황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최근 도심 호텔에서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나는 기도, 찬송으로 이어지는 결혼예배 형식에 씁쓸했던 기억이 있다. 어떤 경우는 참고 지켜보기도 하지만, 좀 지나치다 싶으면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나오기도 한다. 하긴 딸자식을 기독교 집안의 청년에게 시집보낸 어느 불자 교수의 경우, 인연 있는 비구니 스님들이 오셔서 앞자리에 앉아 계시는 상황에서도 목사가 다함께 기도를 하자고 해서 너무 무안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스님들 앞에서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기도 제의를 하다니! 하객들의 종교 감정을 무시한 결례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는 걸까. 예배가 싫으면 아예 오지 말라는 것인가.

조문객이나 축하객들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배려한다면 그렇게 사전예고도 없이 무례하게 일방적인 종교의식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결혼식이 교회나 성당에서 치러진다고 미리 알 수 있다면 당연히 예배나 미사일 것으로 짐작하고 그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예식장이나 호텔 등의 공공장소에서의 결혼식이 특정한 종교의식과 함께 치러질 것이라고 예상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작심하고 종교의식으로 하려면 하객들을 가려서 초청하든지, 아니면 청첩장에 빨간 십자가와 함께 ‘결혼예배’라고 반드시 밝혀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갑자기 당하게 되는 장례라도 특수한 의식을 고집하려면 부고 시에 조문객들에게 암시하거나 알려 주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그래야 미리 적절히 대처하지 않겠는가. 직접 참석해서 끝까지 함께하거나, 가더라도 돈 내고 인사만 간단히 한 후 오던가, 그것마저 부담스러우면 다른 이를 시켜 돈만 전달하던가, 아예 모른 척 하던가 선택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웃의 경조사도 이젠 마음 놓고 가기 어렵게 되었다. 내가 가도 될 자리인지 아닌지 따져봐야 하니 참 불편한 사회가 되었다. 당사자나 그 부모 자식과의 인연만 고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문제까지 확인해 가면서 참석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세상이 피곤하기만 하다. 그렇다고 이미 다종교 사회가 되어버린 지금 모든 문화행사를 통일시키자고 주장하기도 어렵다. 그렇게 되기엔 너무 생각 차이가 크고 갈등을 키워 왔다는 생각이다. 각 종교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기보다 서로 ‘그른 것’이라고 가르쳐 온 ‘패거리문화’ 탓이다. 타종교인을 생각하는 최소한의 예의라도 갖추길 기대할 뿐이다.

글로벌 문화시대에 여러 종교가 활성화되어 있는 한국사회는 그 나름대로 인류문화에 기여할 자격과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편협성과 배타성이 오히려 부담스럽다는 견해 또한 만만치 않다. 오죽하면 “다종교 국가 중 한국만큼 비기독교인으로 사는 데 불편을 느끼는 나라는 없다”는 말이 있을까. 종교의 오염이나 무례를 감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한국사회를 ‘불안한 동거’라고 표현했던 어느 학자의 말이 실감이 난다.

한편 한 종교가 그 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관혼상제’와 같은 통과의례에 관해 의미도 있으면서 지루하지 않고 현실감각이 고려된 의식이 연구되고 실행될 수 있어야 한다. 다종교 다문화 시대인 현대사회에서 불교의례는 과연 불자들의 일상생활과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 그리고 타종교인들에게 조차 부담 없이 다가갈 수 있게 되어 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2008.4.20 <금강법보>에 실린 원고를 박광서 교수가 본지에도 보내왔습니다.

/박광서 2008-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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