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의 교회문화 이야기]

며칠 전 <지금여기>의 열렬한 독자로부터 따끔한 이야기를 들었다. 내 글을 읽으면 알듯 모를 듯 한 것이 한마디로 야릇하다는 것이었다. 행간의 의미를 읽으면 “거칠고 투박해도 삶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힘이 있고 뜻도 잘 전달되는데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말씀으로 요약된다. 말을 듣는 순간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고 오로지 노력하겠다는 다짐만 하고 말았다. 하여튼 필자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어도 쌀만큼 여러 차례 말씀드린 ‘무개념 상태’에서 호전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볼 눈이 있는 사람은 보라.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 하고 외치는 대신, ‘볼 눈이 있고, 들을 귀가 있는 분들은 다 아시니 너그러이 기다려 주십사’하고 빌고 있다.

최근에 들은 말 가운데 곱씹어 보고 싶은 것 두 가지가 있어서 나누고자 한다. 먼저, ‘가지가 무성한 나무는 가지만 쳐서는 병을 고칠 수 없다’는 말이다. 교회고 어느 집단이고 가지가 무성할 정도로 덩치가 커지고 제도화되면 고질병을 갖게 된다는 것이 이 말의 뜻이다. 그리고 고질병에 걸리면 한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힘으로 그 집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집안에서 망하기를 기다리거나 미안하긴 하지만 집을 버리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들은 말의 핵심이다. 가시가 있는 말씀이라 며칠 동안 새겨 보았다.

과연 우리 교회는 고질병에 걸렸는가?

“과연 우리 교회는 고질병에 걸렸는가? 걸렸다면 그 증상과 앓고 있는 부위는 어디인가? 그리고 그 병은 경미한 것인가 중증인가? 혹시 중증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외쳐야 하는가, 아니면 이쯤에서 슬쩍 발을 빼고 남의 일처럼 모른 척해야하는 것인가? 경미한 증세인데 홀로 중증이라 진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나는 복음으로 이 상황을 보고 있는가?”

사실 쉽사리 우리의 증세가 어떻다고 말할 자신은 없다. 다만 그분이 이야기한 맥락에서 보면 신자가 늘어나고, 사제, 수도자, 교회의 사목분야가 넓어지면서 과거와 같은 단순함을 찾을 수 없다는 것, 교회의 관리 범위를 넘어서는 일들이 많이 생기면서 반드시 교회의 정신으로 운영된다고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늘어나는 것, 또 여러 이유로 생긴 교회 내 조직들이 성숙 단계에 이르러 교회 안의 다른 조직들과 연대하기 어려워지는 것(조직 이기주의), 무엇보다 이러한 여러 현상들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음에도 방향과 조절능력을 찾기 어려워지는 현상 등이 이러한 병증의 예들이다.

이러한 예들은 독자분들도 절감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면서 교회는 뚜렷하게 관리형의 사목자 즉, 복음과 인간의 전문가보다 전문 경영인을 원하게 된 것, 이런 체제가 되고 보니 돈 없고 힘 없는 신자들은 교회의 의사결정에서 더욱 멀어지게 된 것, 이런 논리가 횡행하고 이런 체제로 굳어져 가고 있음에도 큰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도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알고 계실 것이다. 한국교회의 외형적 화려함과 높아진 사회적 위신, 공적 영역에서 누리고 있는 높은 사회적 권력의 이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교회의 상태를 뿌리나 줄기의 핵심부에 종양이 자라고 있는데 가지는 무성한 나무에 비유할 수 있겠다는 것이 어느 신부님이 내게 나눠준 말씀의 핵심이다.

불교계, 하루 이틀 참은 게 아니다

두 번째로, 최근 불교계에서 종교차별을 문제 삼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어떤 입장인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미 몇 년 전에 여러 조사 결과를 통해서 불교계는 물론 민족종교 일반이 종교차별 혹은 편견 때문에 적잖이 불편한 심정인 것을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조계종단에서 발행한 <종교편향백서>(김영삼 정부 때 발생한 각종 훼불사례를 다루고 있다)를 통해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하고 있었다. 한국의 현대 종교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있는 분이라면 불교계가 하루 이틀 참은 게 아님을 알 것이다. 해방 후부터 이승만 까지 이어진 친 기독교(우리도 들어간다) 정책, 이후로 친 기독교 정책은 아니어도 이에 준하는 기독교 우대 정책은 불교는 물론 민족종교 전반이 기독교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게 만들었다. 심지어 기독교가 국가와 갈등을 빚은 시기에도 정부의 대응방식에서 불교가 차별을 느꼈을 정도였다.

물론 어느 종교, 종교인이든 자신이 선택한 종교에 대하여 자긍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자신의 종교를 최고로 여기고 이 때문에 자신의 종교가 확장되기를 바라는 것은 생리이기도 하다. 불교도 이런 욕구 면에서는 기독교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최근 여러 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계는 인구센서스에서 늘 인구의 일정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해왔다. 종교사회학에서도 확산종교라고 분류할 만큼 불교는 조직화나 교리의 강요가 크지 않은 종교였다. 그러던 불교가 지난 시간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사회적 권력을 획득하고 이를 누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은연중에 자신들도 조직화와 사회세력화에 주력해왔다. 그리고 이제는 대등한 사회 권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동안 종교간 갈등이 있어도 현실화되기 어려웠던 것은 전적으로 불교계의 대응능력이 약했던 탓이다. 얼마 전까지 한국의 종교인구 분포는 삼각 정립구도에서 한 다리가 짧은 구조였다면, 이제는 세 다리가 같은 비중을 가지고 있고 다리 길이도 같아져 그에 상응하는 행동양식이 필요해졌다. 개신교계는 물론 우리 천주교회도 이러한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다행히 천주교회는 불교계의 날카로운 눈길로부터 한발 벗어나 있는 듯하다. 굳이 따지자면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는데, 불교계가 너그럽게 봐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출발한 유일신 종교 가운데 하나이고, 외형적으로는 포괄주의(inclusivism)를 취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자기 우월주의를 포기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삼각 정립구도로 변한 종교문화 여건 안에서는 언제든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재 한국 천주교회가 갈등에서 벗어나 호사를 누리는 것은 다수의 신자들이 우리의 교리를 잘 모르고 있거나, 알고 있더라도 강하게 믿고 있지 않기 때문인 것도 알 필요가 있다. 그런데 만일 신자들이 더 잘 알게 되고, 자기 신앙에 더 확신을 갖게 되면 갈등 상황은 크게 불교와 기독교 구도로 변화할 것이다. 따라서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공존할 줄 아는 종교가 되는 것이 한국의 종교문화를 평화롭고 풍요롭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2008.9.18.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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