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수의 교회문화 이야기]

한국에서 종교를 갖고자 하는 사람 또는 이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마음의 평화’를 추구한다. ‘마음의 평화’를 추구하려는 생각에는 단순한 심리적 안정 추구에서부터 피안적인 욕구 실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과거 어려웠던 시절에 ‘마음의 평화’는 생존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고 이 문제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절박한 요청이다. 반면 이미 사회적으로 이룰 것을 다 이루고 생존 불안을 벗어난 이들에게 마음의 평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이를 테면 소망교회로 대변되는 중간층 이상의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마음의 평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고 싶은 것이다. 필자는 물론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질문에 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근처에 가본 일도 없고, 앞으로도 갈 가능성이 희박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필자는 이들의 행태를 분석할 요량이 아니다. 그저 이들로 대변되는 신자층, 생존 자체가 문제가 되는 신자층, 그리고 그 사이 다양한 욕구를 갖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의 신자층이 뒤섞인 현재의 교회에서 복음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성찰해보려 할 뿐이다.

교구장과 사제의 생각이 다를 때

며칠 전 어느 중견 사제와 대화하는 도중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다. 교구장이 자신이 맡고 있는 성당에서 촛불집회를 비판하는 강론을 하고 가셨는데 본인은 그 다음 주에 지지하는 강론을 하였다는 것이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며칠이 지나 묵상을 하는데 이 일이 의외로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신부님은 주교님이 강론하실 때 마음이 복잡해지면서 “이건 아니야. 주교님이 어떻게 이 민감한 시기에 저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가? 너무 편파적이고, 결국 현 정부를 두둔하려는 거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 이런 생각 때문에 강론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고, 심지어 강론대로 뛰쳐나가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다음 주에 신자들에게 바른 것을 알려준다는 심정으로 본인은 반대되는 강론을 하였다고 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며칠 묵상을 하는데 갑자기 신자 입장에서 자신의 강론을 되돌아보게 되더라는 것이다. “만약 지난 주 강론에 공감하던 신자가 나의 강론을 듣고 무엇이라 생각했겠는가? 자신이 주교님께 가졌던 생각을 하였을 것이고, 교회 안에서 조용히 도덕적인 훈계나 마음의 위로를 기대했던 신자들은 양극단에 회의를 느꼈을 것이다. 이 신자들은 나를 보고 또는 나와 주교님을 보고 무엇이라 생각했을까?” 여기에 생각이 미치면서 갑자기 강론이 두려워졌다고 한다.

필자는 주로 수도권에서 활동을 하니 다른 지역교구의 사정은 그저 헤아려 보는 정도에 불과하다. 여기서 하던 이야기를 다른 곳에서 했을 때 교구 간 격차가 크다는 말을 거의 매번 듣고 보니 어떤 글이든 매우 조심스러워진다. 그저 이곳 이야기를 한다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다.

복음은 경쟁에서 승리한 자를 위한 것(?)

강론이나 일상적인 훈화, 강의에서 복음은 어떻게 선포되는가? 필자는 이것이 알고 싶어서 시간을 바꿔가며 우리 본당 주일 미사에 참석한다. 다른 곳을 방문하는 경우에도 강론을 듣는 일은 반드시 하려 한다. 이동하는 중에는 기독교방송, 극동방송을 틀어 개신교 목사님들의 설교도 듣는다. 몇 년 동안 이렇게 하고 나니 필자도 앞의 신부님처럼 혼란스러워졌다. 개신교 큰 교회의 목사님들은 대 놓고 물질적 성취를 성공과 동일시하였다. 복음은 경쟁에서 승리한 자를 위한 것이었다. 복음이 자본주의의 경전으로 해석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신자들이 성공에 이르는 과정으로 부활은 성공으로 해석되었다. 그래서 그분들의 설교에는 유독 이런 물질적 성취, 혹은 세속적 명예와 지위를 얻은 이들의 사례가 많이 등장한다. 성공을 목적으로 하는 자기계발서와 같다.

반면 신부님들의 강론은 초점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개신교 큰 교회 목사님들의 설교와 같은 경우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날카로운 복음 해석도 듣기 어려웠다. 어느 쪽도 편들면 안 되니 그저 도덕적 훈계나 들려주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물론 올해와 같이 여러 민감한 사안이 있을 때 그래도 약자 편을 드는 강론을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복음이 살아서 우리의 양심과 수치심을 자극하고 회심에 이르게 하지는 못했다. 아마 듣는 이들이 이것을 원치 않아서 그럴 것이다. 정호경 신부님은 <말씀을 새긴다>에서 이런 우리 신자들의 속내에 “회개할 마음도 전혀 없고, 더군다나 예수님 따라 십자가를 질 마음은 꿈에도 없으면서, 왜 교회를 들락거리며 시간과 돈을 낭비하는지 모를 일이다.”라고 일침을 놓으신 바 있다.

하느님이 아니라 신자들을 두려워하는

어느 교회의 성직자든 하느님이 아니라 신자들을 두려워하는 것 같다. 복음의 진면목을 살고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들이 대부분 생계가 곤란한 것을 보면 하느님이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닌 듯 보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들려주면 신자들은 시간과 돈으로 화답한다. 반면 복음을 들려줄라치면 발길을 돌린다. 이렇게 몇 번 당하고 나면 길들여지든지 길을 들이든지 해야 하는데 후자가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지난 시간 보여주었던 모습이다.

그렇다고 이제와 달리 정색을 하고 강론시간에 복음을 전하면 교회에 분란이 일어날 것이다. 신자가 신자에게 맞설 것이고, 신자가 사제에 맞설 것이다. 이 거대한 교회가 순식간에 소수종파로 전락할 것이다. 이런 모습이 예견되기에 누구도 쉽게 복음에 직면하지 못한다. 그러면 요즘 유행하는 영성적 강론을 하면 어떻겠는가? 맘몬의 복음보다 훨씬 낳은 방안이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신자들이 듣기 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심과 십자가는 없고 오로지 정신적 위로, 영적 고양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니 말이다. 사실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설교도 잘 들어보면 이런 내용들이 중심이다. 현재 신자들이 들여다보아야 할 내면과 구조 안에서 회심이 필요한 요소들은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완전한 대안은 아니다.

이처럼 어느 방향이든 선택을 하기 어려울 때 중심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중심은 간단하다.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섬겨야 하지만 하느님도 섬겨야 한다. 무엇보다 하느님을 먼저 섬겨야 한다. 그래서 그분을 우선하면 답이 나온다. 지금까지는 위로와 자비의 하느님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제는 슬퍼하는 하느님, 진노하는 하느님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의 양심과 수치심을 일깨워줄 그런 하느님 말이다.

/2008.8.4.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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