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동네 근처의 산속에서 비를 만났다. 갑자기 우수수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이제 한반도의 날씨가 동남아시아를 닮아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열대와 아열대기후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쨍쨍하던 햇볕 속에서 갑자기 와르르 쏟아지는 비에 갇히는 경험을, 올해 서울에서 만나곤 했다. 지금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사십대가 되면 한반도의 날씨는 베트남 정도의 아열대 기후로 변모하는 건 아닐까 두렵다.

산이 깊고 그윽한

동네 뒷산이지만 규모에 비해 산이 깊고 그윽한 대모산은 안으로 들어가면 제법 자연 그대로의 그윽한 세월의 향기를 뿜어낸다. 수령이 꽤 됐을 것 같은 나무들과 골짜기를 만나고 지질학적 용트림이 새겨진 등성이를 거닐다 보면 마음에 지질학적인 세월이 축적되며 시야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기분에 잠긴다. 자잘하게 가슴에서 뒤틀리던 생각들이 수그러들고 먼 과거와 아득한 미래가 스치며 지금 여기에서 가파르게 치솟는 애증들이 애(愛)도 탈색되고 미움(憎)의 기운도 증발해버리는 것만 같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산을 찾는 것이리라. ‘사십 세 생일에는 인수봉 정상에 서보리라던 다짐을 했었는데...’

유년시절 언젠가 문중(門中)의 산지기 집에서 시제(時祭)를 지내느라 아버지와 그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첩첩산중으로 느껴졌던 산중에서 아버지와 산지기 아저씨는 조상들 무덤의 풀을 베어내며 잔디를 돌보셨고, 나는 근처 높다란 상수리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상수리를 줍다 혼자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어느 순간 깊은 숲에서 갑자기 밀려드는 먼 시원(始原)을 감지하며(?) 소스라쳐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 내려왔던 기억이 있다. 축적된 시간을 품고 우뚝우뚝 서 있는 나무들과 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 그 바람에 불려가는 가랑잎들이 살아있는 느낌을 던지며 나를 압박해왔던 것 같다. 그때는 그 느낌이 두려웠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그 생명들과 만나기 위해 산에 들어가지만.

상처, 친구 K

친구 K는 스무 살 무렵, 철강을 다루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 프레스 기계에 그만 손가락을 하나 잃어버렸다. 이십대 후반쯤,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는 시기에 나는 가까운 여자친구를 K에게 소개해주었다. 해맑은 동안의 K만이 내 마음에 가득 차 있었지 그가 손가락을 잃은 아픔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어, 나는 그만 소개받는 여자친구에게 그 얘기를 전하지 못했다. 두 사람이 데이트를 하는 도중, K는 청혼을 하기 전 자신의 아픔을 얘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여자친구는 갑작스럽게 알게 된 사실에 좀 당혹스러웠던지 내게 왜 그 얘기를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를 꼭 해야한다고 생각하진 못했다. 돌이켜 보면 그 여자친구도 호감을 가지고 만나던 사람에게서 듣는 낯선 이야기가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미리 전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늘 자주 만나는 여자친구라 종종 K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음에도 왜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다.
여자친구는 친구대로 남자친구 K는 그대로 내게 유감을 품었을 것이다.

결국 청혼은 여자의 거절로 끝이났고 K는 깊은 상심에 우리들과 연락을 끊어버렸다. 그와 데이트를 하는 중 호감을 갖고 있었던 여자친구도 며칠이 지나자, K를 향해 기울어지는 마음에 그를 찾았지만 그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다니던 회사에도 휴가를 내고 그는 우리를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설산

유명한 산악인 라인홀트 매쓰너는 여러 권의 저서를 내기도 한 산악작가이며 8천미터 봉우리를 무산소로 완등한 경험이 많은 등산계의 대부와 같은 존재이다. 그는 남동생과 칸첸중가를 동행등반하다 눈사태로 동생을 잃어버렸다. 그 자신도 사경을 헤매던 산행이었다. 그 후, 그를 돌봐줄 의사와 포터만 데리고 그는 동생의 시신을 찾기 위해 칸첸중가를 다시 찾았다.

동생이 휩쓸려 들어간 지점에 닿았지만 그 곳은 빙하로 인해 지형이 변해 있었다. 다시 한 번 그는 생명을 잃을 위험을 넘어 홀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 때 그의 손발은 이미 동상으로 다 잘려나간 상태였다.

손가락 발가락이 없이 등반하는 게 가능한지도 모르겠고 그럼에도 산을 찾아가는 그 열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저서 <검은 고독 하얀 고독>을 읽으며, 악마처럼 검푸르게 입을 벌려 목숨을 앗아가는 검은 고독을 그가 8천 미터 봉우리들을 오르며 극복해내는 과정을 흥미롭게 읽었다. 생명을 삼켜버리는 크레바스와 같은 고독의 폭풍우를 넘자, 그 너머에서 고독은 내 안에 있었지만 만나지 못했던 동반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하얀 설산을 닮은 그의 본질의 힘이 되었다.

제대로 이 세상을 관통한 표적처럼

‘지나치게 낭만적이었을까... .’ 나는 손가락 하나를 상실한 K의 손을 사랑하고 있었다. 제대로 이 세상을 관통한 표적처럼 자랑스럽기도 하고(?). 내 여자친구도 그런 마음에 K를 잃지 않으려 사방으로 연락을 보냈지만 그는 답이 없었다.

나중에야 우리는 그가 그의 집 근처 불암산에 들어가 혼자 지냈음을 알게 되었다. 산에서 내려온 K는 좀 쌀쌀맞게 우리를 대했다. 우스운 모양이지만 내 여자친구의 그를 향한 구애에 차갑게 반응했다. 우리들은 그렇게 헤어졌다. 이전까지 K는 무척 다정한 사람이었다. 80년대 후반 처음으로 피자가 외식의 메뉴로 등장하던 무렵, 그는 우리들에게 처음으로 피자를 사준 친구였다. 새롭고 맛있고 좋아보이는 것들을 우리들에게 안겨주던 그였다.

많은 실책을 안고 있는 사람은 두 사람을 소개한 나일 수도 있건만, 나는 나대로 섭섭하고 슬펐다. 그래서 산악인 라인홀트 매쓰너를 장황하게 소개하며 쌀쌀맞게 변해버린 그의 마음을 원망했다. 겨우 불암산이나 오르락내리락하니 사람이 자잘하다며 냉혹한 말을 퍼붓기도 했다.

동네 근처 대모산에서 동남아의 스콜처럼 내리는 비를 맞으며 잃어버린 친구 K를 생각했다. 지금쯤 그 친구와 나는 불암산이나 대모산의 크기를 넘어서 8천 미터 봉우리를 닮은 차원을 살아내고 있을까.

라인홀트 매쓰너의 삶에서 손가락 발가락의 상실은 등반인들로 하여금 그를 추종하는 영광의 상처로 작용했다. 정작 그 자신의 글을 통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었고 담담한 사실의 기록만 전하고 있지만. 그러나 공장의 기계에 잃어버린 손가락은 누구에게도 연민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우리들 감정이 아직은 미숙한 탓일까. 공장생활도 8천 미터 봉우리를 오르는 것처럼 숨가쁜 일이건만.

자그마한 동네 산 속에 들어와 거니는 것만으로도 그득한 산소기운에 숨이 탁 트이며 생활 속의 관계의 뒤틀림에서 내 마음이 벗어나게 된다. 그러기에 예부터 민간에서는 산에서 죽는 사람을 복인(福人)이며 대인(大人)이라 불렀을 것이다. 등산(登山)보다 입산(入山)의 개념으로 산을 대해온 전통은 산에 머무는 사람이나 산에서 죽은 사람조차 거룩한 경지를 획득한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산속을 거니는 순간만은 세상을 조금 벗어나는 기분이 들어 세상을 너무 애지중지하는 마음을 배반하는 상쾌함에 젖는다.


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 산중

저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이규원 2008.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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