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란 무엇일까요. 저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늘 나름으로는 진지하게 이 말을 하는데, 듣는 사람들은 농으로 듣거나, 아니면 가벼운 풍자 정도로 생각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이 경제

인간 생활 괴로움의 90퍼센트는 이 세 가지가 제대로 안 돼서 나오는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튼튼한 이로 충분하고 맛있는 음식을 넘기며, 언제든 똥간에 가 앉기만 하면 푸드득 누런 똥이 한 바가지 쏟아지며, 해충이 없는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가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별 것 아니라구요? 그런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물론 지금 당장도 이 세 가지를 다 갖고도 불행한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었다거나 하는 것은 이 세 가지로 대신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요. 하지만 사랑 같은 것조차도 결국은 이 세 가지를 위한 어떤 복잡 미묘한 선택의 특수한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 얘기를 저는 절반쯤은 믿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것은 물론 죽는 것인데요, 그 가운데서도 얼어 죽고, 맞아 죽고, 굶어 죽는 것이 제일 비참하다고 합니다. 얼어 죽고 굶어 죽는 것이 바로 경제 문제이고요, 맞아 죽는 것은 일단은 인권 문제이지만 이러한 폭력 사태가 일어나는 근본도 결국은 식량과 에너지를 둘러싼 다툼 때문입니다.

자, 이쯤 되면 저는 가히 유물론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인데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지난 20여 년 간 한국사회에서는 일정한 경제적 풍요와 함께, “물질이 다가 아니다. 정신이 중요하다. 육체적 질병도 마음이 건강하면 낫는다.”는 깨달음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몸과 마음은 서로 뗄래야 뗄 수가 없는 한 덩어리입니다. 다만 우리의 지식과 언어가 아직 부족해서 이것을 둘로 구분해서 말하지 않으면 서로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눠 말하는 것이 편리할 뿐이지요.

그렇다면, 마음의 병을 낫고 영혼의 고통을 치유하려면 몸이 편하고 건강해야 한다는 얘기도 실은 똑같은 말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저는 인도의 고대 철학식으로 말하자면 좀 하등(下等)의 깨달음을 갖고 있을 뿐이기에 몸과 마음 가운데서 몸에 더 집착하고, 마음의 아픔보다 몸의 아픔을 더 잘 느낄 뿐입니다. 고등(高等) 차원에 올라 있거나 지향한다면 물론 저의 집착은 어리석음입니다만, 건물이라는 것도 하층의 기초가 튼튼해야 기둥도 세우고 지붕 서까래도 올리는 법입니다. 하층인 육체의 아픔과 기쁨을 모른 채 어찌 고층인 정신의 아픔과 기쁨을 알겠습니까.

“배고픔”의 문제를 소홀히 할 때 경제는 위기가 쌓이기 시작한다

2007년 8월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주가가 폭락하자 경악하는 뉴욕 주식시장 중개인들
때마침 2008년 가을에 세계 경제의 중심인 미국에서 10년에 한번 일어날까말까 할 일이 하루에 하나씩 연이어 터지면서 온 세계 경제가 멍이 들고 있고, 좀 더 있으면 여기저기 피가 튈 듯합니다. 지금 시점을 훗날 사람들은 “그날”이라고 기억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최대 경제난이 될 것이라고 하는군요. 앞으로 우리가 맞을 경제난은 1997년 IMF 구제금융 시절보다는 더 오래 가고 더 힘겨울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어려움 극복을 위해 애써야 하겠지만, 결국 경제는 먹는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배고픔”의 문제를 소홀히 할 때 경제는 위기가 쌓이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제가 먹는 문제를 강조하는 이유는, 사람은 아파트를 먹고 살 수도 없고 비단옷을 삶아 먹을 수도 없고 금을 녹여 먹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고통의 시기에는 입에 들어갈 수 있는 먹을 것이 가장 귀합니다. 북한 동포들이 10년 전에 겪었던 일이지요. 물론 남한 형편이야 북한보다는 훨씬 낫겠지요. 정치도 문화도 다 밑바닥을 보면 결국 이 하찮은 밥 얘기입니다. 가장 극한에서 종교의 필요가 나온다면, 밥 얘기를 잊은 종교는 입으로는 씹어 먹을 수 없는 밥그릇이나 똑같습니다. 굶주림의 시대에 밥그릇과 밥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식량을 아껴먹는 습관과 기술을 익히고, 온갖 수단을 써 최대한 확보하며, 서로 나눠 먹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다행히 집 안에 식량이 충분하다면, 스스로 식량을 충분히 마련하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을 찾아야 합니다. 식량 확보에는 인맥이나 정보등 사회적 관계도 크게 도움이 되는데, 그런 면에서 소외된 이들이 특히 식량난의 시기에 위험합니다. 소년가장, 미혼모 등이 한 예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가톨릭 신자들은 대부분 중상층 이상이라 이런 처지까지는 잘 가지 않을 것이겠지요.

“지금 네 고통은 네 정신이 썩은 탓이야!”라는 심한 말은 삼가 해야

한편에서 저는 경제난이 심해지면 종교는 받아드는 헌금은 좀 줄지만 열심인 신자는 늘어날 것으로 봅니다. “돈만 신경 쓰고 정신이 비었으니 경제난이 온 게야!”하는 호통 소리에 사람들이 더 쉽게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교회의 말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지요. 당연한 일이지요. 나는 실패했으니, 무언가 실패의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제 영국 성공회의 한 주교가 런던의 금융계 사람들에게 그런 강연을 하며, 보유 주식도 없이 내다파는 공매도는 도둑질이나 다름없다고 욕했더니, 언론은 “그러는 너희 교회는 왜 (공매도를 하는) 헷지 펀드에 투자하고 있는데?”라고 비아냥댔다는군요. 하지만 교회가 어떤 말을 하든,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대고통의 시대에, 사람들은 위안처를 찾아서라도 제 발로 교회로 절로 향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에게 “지금 네 고통은 네 정신이 썩은 탓이야!”라는 심한 말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대부분 소수의 힘센 권력자, 부자들에게 주머니 푼돈까지 다 털린 사람들이거든요. 강간 피해자를 가해자로 야단치는 어리석음과 오만함으로는 그런 사람들 오래 품어 주기 어렵습니다. 아니면 그 피해자를 얀센주의적 근본주의로 몰아넣게 됩니다.

심각하고 오래 계속되는 경제난의 시기에 육체를 가벼이 여기거나 경멸하고 대신에 정신 강화를 해결책으로 내세우면, 그 결과는 끔찍한 종교 근본주의자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왜 미국의 가난한 백인 노동자들이 부시를 지지하고 근본주의 교회에 열심인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왜 청계천 빈민촌에서 천막교회로 성공한 순복음교회가 이 시대의 한 문제가 됐습니까?

과식한 이들, 어려운 이들에게 돈 좀 갖다 버리라

그런데, 한국 가톨릭교회처럼 중상층 교회에 이런 경제적 나락에 떨어진 이들이 찾아올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지금 교회와 별로 끈이 없습니다. 한국에는 자발적 신자가 많다고 하는데, 이들도 따져보면 유형무형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중상층 가톨릭교회와 그리 멀지 않았던 이들입니다.

어쨌거나 통상적인 불경기 정도가 아니라 대공황에 버금가는 대고통의 시기에는 상당수의 중상층도 경제적 파멸을 당하거나 주변에서 들리는 끔찍한 비명 소리에 심장이 웅크러드는 고통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더 많은 이들이 찾으려 하겠지요.

종교를 찾아오는 이들에게 정신을 강조하지 말고, 경제를 같이 더 생각하고, 경제를 도와주고, 몸을 제대로 건사하게 해 주십시오. 정신 강조는 그 다음 문제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앞에서 말했듯, 밥 잘 먹고 잘 싸면 정신도 저절로 건강해지거든요. 물론 여전히 너무 과식해서 몸이 안 좋은 이들에게는 돈 좀 갖다 버리라고 말해주십시오. 그러면 정신도 건강해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들이 그간 너무 스스로 정신만 강조하다보니, 막상 경제가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적어도 정신 문제에는 전문가라고 자타가 다 착각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배고프지 않아본 자가 영혼의 갈망을 설교할 때, 그것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 그러니, 솔직히 종교가 그들에게 정신적 위안이라도 주고자 해도 제대로 된 약을 줄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눈먼 봉사가 병자를 인도하는 꼴이 되지 않을지 걱정되기는 합니다. 억대 연봉의 펀드 매니저 100명의 판단이나 시장바닥 100명의 판단이나 주식 성과는 별 차이가 없다고 하더군요. 이 말을 그대로 적용하면 성직자나 초보 신자나 집단으로는 다 똑같은 우중(愚衆)이라는 얘기입니다. 경제가 아니라 신앙에 대해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경제, 경제 하는 당신은 경제전문가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중의 한 명일뿐이지요. 더구나 맨날 읽어봐야 밥 잘 먹고 똥 잘 싸야한다는 똑같은 얘기만 반복할, 그것 밖에는 모르는, 깨달음도 한참 부족한 사람입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깨달음”, 뭐 이런 말 자체를 듣기도 싫고 쓰기는 더 싫어하는데, 말과 재주가 모자라 결국은 몇 번 쓰고 말았습니다. 다음부터는 그런 폐를 끼치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물론 신앙 전문가도 아닙니다. 교회 밥을 먹다보니 습관처럼 신앙 얘기가 튀어 나온 것이니, 직업병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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