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광(모이세, 50)

부천 노동사목 <새날의 집>

권오광 형은 뒤늦게야 가톨릭교회와 인연을 맺었다. 격심한 생애의 질곡을 넘어서 또 다른 세상을 풀어내기에는 가톨릭교회가 열어놓은 바다는 다소 평온했다.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라는 단체가 1984년에 장충동 인성회의 뒤채에 자리를 잡은 뒤, 노동사목은 살벌한 노동현장에서 밀려난 노동자들과 활동가들에게 쉼터를 제공하고 새롭게 나아갈 수 있도록 교육적 토양을 대주었던 공간이자 사람이다. 노동사목은 창립 초기부터 독신-여성-JOC(가톨릭노동청년회)의 정신이라는 세 가지 특성을 지닌 활동가들에 의해 이끌어져 왔고, 분위기 자체가 모성적이어서 종파와 정파의 경계를 넘어서 노동세계의 인간화를 위해 고유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형은 안기부에서 풀려나온 뒤, 한 때 구로공구상가에서 페인트 가게 종업원으로 일했다. 그 참에 결혼도 하게 되어 역곡에 전세방을 얻었다. 안기부에선 여전히 사람을 보내 감시하게 하는 바람에, 자신의 처지를 이기지 못해 형은 혼자 방에서 술을 마시다 벽에 병을 집어던지기도 하였다. 운동적 삶을 포기해야 하는 게 영 견디기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1990년인가, 2년여만에 그 일을 집어치우고 이번엔 공단에 페인트공으로 몰래 들어갔다. 이 당시 파란색 페인트를 칠하다 코를 풀면 파란색 콧물이 나오고, 빨간색 페인트를 칠하면 빨간 색의 가래가 나오고, 페인트, 신나 냄새가 어찌나 독한지 차를 타도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줄 지경이었다. 페인트 냄새와 막걸리 냄새가 뒤범벅이 되어 사는 4년동안, 형은 발음도 이상해졌다. 직업병이라 해야할까? 지금까지도 목소리가 꼭 술에 취한 사람이 말하는 것같이 들린다.

생활과 운동의 통일을 위하여

그 즈음에 조직에선 비합법활동에서 합법활동으로 전환하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형은 막 첫걸음을 뗀 민주노총으로 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형이 가톨릭노동사목으로 거취를 옮긴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조직노동자보다 비조직 영세 노동자들을 위해 할 일을 찾고 싶었고, 결혼한 처지에 자기 생활을 책임지면서 운동을 하고 싶었다. 당시 노동사목 교육간사로 들어갔을 때 봉급이 38만원이었는데, 액수야 보잘 것 없었지만 밥벌이를 하면서 활동을 하는 게 건강한 운동이라는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다. 또한 동구권의 변화 이후에 노동운동 자체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함을 절감하였기 때문이다. 거기서 활동비를 주니까, 그것 때문에 사목으로 갔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주변에 있었다. 형은 노동사목 일을 하면서 주말에는 틈틈이 이삿짐 센타 일도 하고 보일러공 시다 노릇도 하면서 생계를 도왔다.

형과 나는 같은 시기에 노동사목 전국본부에서 간사로 함께 일을 했다. 나는 신앙생활분과를 맡고 있었는데, 나 보다 약간의 시간적 간격을 두고 노동사목에 합류했던 형은 내내 푸근하고 수용적인 선배였다. 형은 교육간사로 있으면서, 초보노동자 교육 교재도 만들고, 특히 일회성이던 인성교육(초기 ‘자기발견 교육’)을 고유한 자체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1박 2일씩 실행하기도 하였다. 당시 18군데나 사목 집이 있던 상황에서 그의 역할은 중요했다. 그러나 형은 가톨릭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부천노동사목, ‘새날의 집’으로 거취를 옮긴 뒤로 나를 세울 수 있는 힘이 필요했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예비자교리였다. 형이 영세를 받은 것은 1995년 부활절이었고, 세례명은 ‘모이세’였다. 그 큰 딸네미 이름이 천지와 백록담을 아울러 ‘권지담’인 것을 보면, 형이 무엇을 지향했는지 알 것만 같다.


부천지역 노동운동의 큰 형

부천에서 일할 때는 일이 사방에서 밀려 들어왔다. 부천 민중연대가 만들어지면서 상임의장으로 일했고, 1999년에는 가톨릭대학교에서 사회복지대학원에 다니면서, 민주노총 교육위원, 전국노동사목 집행위원장, 부천노동사목 사무국장, 희망의 나눔터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그 해에 부천 노동사목에 만들어진 것 중에 하나가 ‘파뿌리’ 모임이었다. 노동자 부부 18쌍이 함께 하는 소모임이었는데, 대개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노동운동과 일상을 분리하면서 살기 때문에 가정에 문제가 많이 생기는데, 정작 노동자들은 그런 문제가 없었다. 그 덕분에 42살 나이에 주례를 서기 시작해서 그 동안 15차례나 이들 노동자들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서게 되었다.

인천교구에서 노동사목위원회가 평신도와 함께 새롭게 만들어졌을 때, 첫 번째 총무로 일했다. 인천교구에선 노동사목위원회가 합심하여 매년 5월 1일을 전후하여 ‘노동자주간’을 설정해서, 교구장 주교가 담화를 발표하고 본당에선 노동문제에 대하여 강론을 하였다. 인천교구 시노드 때에는 본당 사무장 및 교회 내 비정규직 종사자들의 실태조사를 하였고, 사회사목국 신설을 제안하였다.

형은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회장을 두 차례나 역임하였는데, 남자로서, 기혼자로는 처음 회장이 된 것이다. 이는 그동안 노동사목 실무자들의 상황이 많이 달라졌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독신여성을 중심으로 하던 지도부에서 이젠 대부분 실무자들이 결혼하였고, 남성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중한 업무는 그에게 협심증과 심근경색 등을 가져왔다. 항시 사람들은 몸이 보내는 신호를 통하여 자신을 불러 세우게 되는 모양이다. 이미 ‘이제 그만!’이라는 신호가 왔다고 금방 일을 손에서 놓을 수는 없었지만, 또 다른 삶의 양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전조는 분명하다.

이제 노동자들의 마음으로 향하다

2003년에 파트너십연구소를 통하여 하유설 신부(메리놀 선교회)와 깊이 교제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형이 처음 하신부를 만난 것은 노동사목에서였는데, 하신부는 형에게 사제라기보다는 '섬김의 리더십’을 잘 구현한 모델이었다. 절대로 남에게 화를 내는 걸 본 적 없었다. 문제 제기보다는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감명을 받았다. 사제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카리스마적인 사람, 영적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집회나 실천현장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행동가였다. 그분을 닮고 싶었다.

요즘 형은 민주노총에 제안하여, 노동자들이 개인적인 자기성찰을 통해 조직문화를 변화시키는데 관심을 갖고 인성교육 강사훈련 4단계교육을 시작했다. 파트너십연구소를 통해서 권위적인 사회-교회구조를 동반자적으로 바꾸는데 일조한다. 아울러 예전에는 주로 사회복음화에 주력했다면, 이제는 교회쇄신을 위해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고 강조하였다. 얼마 전에 천주교인권위원회에서 <인권백서> 작업을 할 때도 그랬다. 형이 작업한 노동부문에 대해 서울교구 정의평화위원회에서 문제제기를 하였다 한다. 대부분 60대인 정평위원들은 이 글이 양비론에 입각하지 않고 편향된 시각을 가졌다고 비판하면서, 특히 서울교구 노동사목위원회 활동이 거의 없는데 항의하였다 한다. 그래서 결국 <인권백서>에 대한 재정지원을 약속했던 서울 정평위의 도움 없이 백서를 냈다는 것이다. 형은 그때 “양비론으론 못 쓴다. 우리에게 기준은 복음이며, 여기에 준해서 평가할 뿐이다.”고 주장했다.

새로운 화두, 교회쇄신

서울대교구와 악연이 있었던가? 형이 노동사목 회장으로 일할 때, 2004년 여의도, 의정부, 강남 성모병원 등 CMC 소속 노동조합이 동시파업을 일으켰고, 당시 차수련 보건노조위원장이 명동성당 성모동산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했으며, 강남 성모병원에 공권력이 투입되었다. 당시 노동사목은 이들을 지원하고 노동사목 이름으로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연행되었던 노조간부들이 단식할 때는 동조단식에 들어갔다. 그러니 교회에서 형을 곱게 볼 리 없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형은 “교회는 영리사업장에서 손을 떼어야 한다. 병원 학교 등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체제에서 그 논리로 운영해야 하는 사업장은 결국 노동자들과 교회가 각을 세우게 한다. 이것은 결코 복음적일 수 없다. 따라서 비자본제적 시스템이 작동될 수 없다면 사업을 그만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교회가 정작 사회교리를 너무 몰라서, 문제가 생겨도 교회의 사회적 지침을 따르지 않는 게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 교회는 너무 재복음화, 새복음화에 치중하여 개신교만 따라간다. 사회양극화가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대운하 문제에 대한 주교회의 입장이 시급히 나와야 하며, 교회의 안의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 게 교회를 복음화시키는 길이라고 말한다.

2008년 들어서 형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공동대표를 맡게 되었다. 현재 가톨릭사회운동은 전반적으로 침체기에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물론 노동, 농민, 여성 등 부문 단위에서는 나름대로 활동을 계속하고 있지만, 공동대응력이 떨어지고 전체를 아우룰 수 있는 공동체적 기반이 약하다. 따라서 형은 먼저 활성가들을 위한 소양교육을 하면서 운동의 전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전망이란 그동안 해왔던 사회운동의 외연을 넓게 하여 더 다양한 영역들이 연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상봉 2008-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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