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정기 심포지엄

2024년 50주년을 맞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이 활동 50년사를 정리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11일, 사제단 산하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은 '암흑 속의 횃불,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50년'을 주제로 정기 심포지엄을 열었다. 심포지엄은 역사학자 전우용 교수(한양대 연구교수)가 집필 중인 50년사를 기반으로 발제하고, 사제단 최기식, 나승구, 김인국, 김영식 신부가 토론에 나섰다.

함세웅 신부는 50년사를 정리하는 의미는 지난 시간에 대한 의미 부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함이라면서, “사제단 50년은 반성과 속죄, 다짐의 시간이자 자리다. 또 하나의 나침반”이라고 말했다.

전우용 교수는 먼저 사제단 태동 전후의 배경을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사회의 새로운 흐름과 의식 변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비롯한 교회의 변화와 쇄신 그리고 한국 사회의 군부독재 차원에서 두루 살폈다.

12월 11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50년 역사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길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서경렬<br>
12월 11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50년 역사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길을 모색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서경렬

두 차례 세계대전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의 변화들
한국 사회 군부독재, 불의에 대한 교회의 태도 변화

전쟁 결과에 따른 인간성에 대한 깊은 회의와 반성은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을 정립해야 한다는 범인류적 자각을 불렀고, 1944년 12월 교종 비오 12세의 성탄 메시지로 시작된 교회의 각성 역시 궤를 함께했다. 무엇보다 1958년 선출된 교종 요한 23세의 회칙들과 공의회 결과로 나온 교종 바오로 6세의 사목헌장 등은 정의와 형평, 공동체와 공동선을 위한 교회의 역할을 새롭게 규정하고, 이를 위해 세상에 대한 문을 열고 소통하는 전위적 기회를 만들었다.

조선, 한국 사회에서 천주교는 현실 권력을 바로잡기보다는 오히려 추종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영향을 받으면서, “개인적 구원”에서 “공동체적 신앙”으로 나아가는 변화가 시작됐다. 그리고 1960년대 한국은 군부독재의 한복판에서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의 고난이 깊어지는 때였다.

전우용 교수는 1967년 한국 주교단의 사목교서 '우리의 사회 신조', 1968년 2월 발표된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수환 추기경이 발표한 '평온한 질서와 공명선거'를 촉구하는 성명 등은 “한국 천주교회가 불의와 폭압의 체계와 대결할 수밖에 없음을 예고한 것”이라고 정리했다.

많은 이에게 알려져 있듯, 이런 분위기는 특히 원주교구에서 지학순 주교의 주도로 지역 사회 운동과 결합했다. 1971년 원주교구에서 시작된 부정부패 추방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한 반면, 박정희 정권은 10월 유신을 자행했다. 이 대립은 1972년을 기점으로 악화했고, 천주교를 비롯한 종교계의 구국기도회를 비롯한 유신 반대 운동이 지속됐다.

정권은 인혁당, 민청학련 조작 사건을 통해 이런 움직임을 탄압하려 했다. 그리고 1975년 7월 6일 이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씌워 부정부패 반대운동을 이끌어 온 지학순 주교를 아시아 주교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길에 체포했다. 민주주의를 압살한 유신은 저항에도 폭력과 공포 조성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지학순 주교 구속은 세상을 향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천주교회의 행동을 불러일으켰다. 지학순 주교 석방은 지 주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최소한 인혁당과 민청학련 조작 사건의 구속자들 모두의 문제라고 인식했고, 불의한 정권 자체의 문제였다. 김수환 추기경 이하 사제, 수도자, 신자들의 기도회, 미사가 각 지역에서 이어졌다.

1975년 9월, 대규모 시국미사와 평협 결의, 그리고 사제단 탄생

1975년 9월 1일 전국 평협 총회 참가자들은 민주화를 촉구하는 성명서와 주교단의 일치된 의사 표시를 바라는 건의문을 채택했다. 9월 11일에는 명동 성당에서 1500명이 모인 가운데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이날 기도회에 참석한 사제들과 평협 회원들은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 적극 지지, 언론탄압 즉각 중단, 긴급조치 2호 즉각 해제, 지 주교를 비롯해 투옥 중인 이들의 즉각 석방”을 요구하는 공동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에 따라 이날의 기도회와 결의문 채택 주체는 ‘전국정의구현사제단’, ‘전국평신도협의회’로 처음 명명됐다. 보도의 경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정의구현사제단”이라는 이름이 처음 세상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단체 결성의 필요에 따라 사제들의 참여 서명을 받았고, 전국 800명 신부 중 500여 명이 동참했다. 그리고 1975년 9월 26일 명동 성당에서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공식 발족을 알리는 '순교자 찬미 기도회'가 열렸다. 이날 기도회는 미사에 이어, 사제단의 시국선언, 거리 시위로 이어졌다.

전우용 교수는 이후 사제단의 활동을 분류 정리하면서, “지난 반세기 사제단이 펼쳐 온 인권 수호 운동, 민주화 운동, 민중 생존권 보장 운동, 환경 생명 운동, 반전 평화운동, 통일 운동은 언제나 통합되어 있었다”면서, “사제단, 종교의 관점에서 각각의 운동 범주는 나뉘어 있지만 결국 같은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사제단 50년 역사 정리에 이은 비판적 성찰을 통해, “지난 49년간 한국의 삶에 대한 지표는 개선되었고, 정치적 자유의 폭은 확대되었지만 인간성 또는 영성이 그만큼 고양되었는지는 의문”이라며, “처음 사제단에 참여한 사제는 전체의 약 40퍼센트에 가까웠지만, 교세가 확대되는 만큼 사제단 세력이 확대되지 못한 것도 분명하다”고 말했다.

또 시장주의가 횡행한 지난 10여 년, 사제단이 한국 교회에서 고립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지울 수 없다면서, “교회는 인간성이 ‘시장형’으로 고착되지 않도록 하는 영적 보루였지만, 시장형 인간을 표준 모범으로 삼는 세상은 물론, 교회가 시장의 일부로 편집되었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50년이 지난 현재 시대의 징표이자, 사제단이 져야 할 과제를 “노동력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시장주의 귀결로서 기계의 인간화, 출산율의 급속한 저하와 인구 감소, 기후 변동”으로 꼽았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한국 사회 질곡의 현장에 늘 있어 왔다. 그중 하나가 2014년 8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 기도회를 11일간 이어간 일이다. ⓒ정현진 기자<br>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한국 사회 질곡의 현장에 늘 있어 왔다. 그중 하나가 2014년 8월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 기도회를 11일간 이어간 일이다. ⓒ정현진 기자

이어진 토론에서 최기식 신부는 지학순 주교의 구속과 관련된 상황을 설명했다. 당시 원주교구 사제로 지 주교 구명과 사제단 활동의 시작부터 참여했던 최 신부는 “당시 지학순 주교의 구속은 우연히,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민청학련 사건 피해자들을 살리기 위한 자발적 행위였다”고 말했다.

최 신부는 지 주교의 석방을 위한 활동 뒤에는 다른 활동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이어서 문정현 신부를 비롯한 다른 신부들이 구속되기 시작했다면서,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고, 사제들이 구속됐기 때문에 정권에 저항하는 움직임도 이어졌다. 사제단이 결속되고 일어났던 모습은 하느님의 영이 활동하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승구 신부(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전 사제단 대표)는 오랜 시간 사제단 활동을 하며 이어온 갈등의 조각들이자 반성이라고 고백하고, “사제단이 걸어온 태도의 문제, 사제단 내 성직주의”를 성찰하며 앞으로의 길을 제안했다.

먼저 나 신부는 “5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하고 때로는 빈약하게 때로는 활발하게 활동해 온 단체가 어째서 그 뿌리를 같이해 온 교회와는 그처럼 물과 기름이 되어야 하는 걸까”라고 물으며, “올바름을 지향하며 타협 없는 걸음을 걸어서였다면 다행이지만, 어느 순간부터 견제해 왔던 비판적 지지, 곧 특별한 정치인이나 정당을 지지하고 지원함으로 인해서 오해의 소지를 만든 것은 아닌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우선적 선택의 원칙에서 당파성은 지켜야 하지만 그 끌림이 어느 특정한 곳, 선거 등의 정치 일정에 따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오류”라고 성찰했다.

그는 사제단 내 성직주의도 바라봤다. “사제단은 이기는 싸움이 아니라 해야 할 싸움을 한다는 신념을 나눠왔다”면서, “그 싸움은 민중들, 시민단체, 고통받고 배제당하는 동료들과 함께하는 싸움이어야 한다. 앞장서서 제시하고 총괄하기보다, 연대하고 후원하고 지지하는 모습이 본모습에 가깝지만, 사제단은 교회 내 수많은 평신도 단체와 개인들의 성장, 양성에 도움을 주지도, 지원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사제단의 세계는 벗들과 함께 만들어야 한다”면서, “선거 결과에 따라, 집권 정당의 성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꿈을 함께 만들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불의와 맞서고 한편으로는 대안을 제시하는 그룹을 형성하는 데 협력하고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 신부는 양분되어 갈라진 세상에서 서로를 악마화하거나 무조건 ‘반대’를 외치는 세상에서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 승리의 기쁨을 맛보기보다는 모두의 구원을 바라는 하느님의 정신을 펼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제안하고, “절망적이고 다급할수록, 발등의 불을 끄는 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전망으로 모두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으며, 불의한 폭력의 희생자들을 돌보는 것이 사제단의 과제이자 소명”이라고 말했다.

김인국 신부(청주교구, 사제단 전 대표)는 지난날에 대한 격려와 남은 시간에 대한 숙제를 받아들이겠다며, “더 세상 안으로, 덜 세상적으로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하려던 이들은 많았고 고마운 일이었다. 세상과 교회 사이의 고충과 번뇌, 모욕과 비난에도 함께한 것은 신앙의 선조들에게도 하느님에게도 고마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김 신부는 논어 학이편 1장의 구절을 들며, 사제단을 통해 배우고 익힌 즐거움, 교구와 교회의 벽을 넘은 만남과 우정,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군자의 편안함을 배우고 누릴 수 있었다“며, 지난 시간에 대한 감사함을 표했다.

마지막으로 김영식 신부(안동교구, 사제단 대표)는 사제단에 손 내밀고 어깨 걸어 준 이들의 위로와 응원, 기도에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또 다른 50년을 향해 가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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