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 내려와 올레길을 걷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 갑니다. 지난주는 여러 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가운데 눈과 우박까지 내린 한 주였습니다. 그간 날이 따뜻해 걷기 좋은 날씨였는데 바람이 많이 부니 그 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도, 바람을 등지고 걷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설렘 가득 안고 들어간 우도에선 풍랑주의보로 배가 뜨지 않아 이틀을 머물게 되었고, 비옷을 입고 걸으러 나선 길에선 제주의 매서운 바람을 제대로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날씨 변화 속에서 만난 추위와 불편함 안에도 친절하고 좋은 사람들의 배려로 올레길은 여전히 아름답고 감사한 여정임을 느꼈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고 하루를 시작하며 만나는 모든 것을 잘 만나보겠다는 마음으로 길을 나서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찾게 되고, 하느님 안에서 모든 것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 체험은 자연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또 날마다 겪고 만나게 되는 여러 감정을 통해서 느끼고, 배우고, 감사하게 되는 모든 것을 포함한 체험입니다.

길 위에 선다는 건 두려움과 취약함에 노출되는 일이란 걸 거듭 생각하게 됩니다. 알 수 없는 길과 시간 속에 놓인다는 건 희망을 떠올리는 일이기도 하지만 상처입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 두려움과 취약함을 통해 더 큰 하느님의 자비와 기도의 힘을 체험하게 됩니다.

올레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길 위에서 자신들의 두려움과 취약함을 더 솔직하게 마주하며 누군가 진심으로 귀 기울여 듣는 것을 느끼게 되면, 자신들의 마음 깊은 곳 이야기를 진실하게 풀어놓곤 했습니다. 들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과 안전함을 느끼며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중에 사람들은 위로 받고 조금은 가벼워진 몸과 마음으로 자신들 삶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저에게 올레길을 걸었던 시간들은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걸으며 위로하며 위로받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느님이 함께 계심을 느끼는 참으로 감사한 여정이었습니다.

올레길에서 만난 자연 ©남궁영미<br>
올레길에서 만난 자연 ©남궁영미

올레길을 걸으며 만난 자연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하늘과 구름, 바다와 숲, 높고 낮은 오름들, 낮과 밤, 해와 달과 별, 바람까지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잡초가 뒤섞여 있어도, 정리되지 않은 모습 그대로도, 맑은 날에도 흐린 날에도 자연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통째로의 아름다움이지 구분하고, 나누고, 솎아 낸 아름다움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처럼 꽃이 피고 지고 그 과정의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 그리고 꽃이 지고 난 후 정적까지도 다 품어 안은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꽃 한 송이 사랑하려거든 그대여

생성과 소멸 존재와 부재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아름다움만 사랑하지 말고 아름다움 지고 난 뒤의

정적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

​- 도종환, ‘꽃 피는가 싶더니 꽃이 지고 있습니다’

올레길에서 만난 풍경 ©남궁영미<br>
올레길에서 만난 풍경 ©남궁영미

삶의 아름다움도 자연의 아름다움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근사한 혹은 스스로 만족할 만한 것들만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구분하고, 나누고, 솎아 낸 나의 삶의 모습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삶을 이루는 모든 것 - 빛과 어둠, 성공과 실패, 사랑과 상처 등을 품어 안고 살아내는 것이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삶의 아름다움은 나와 나를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고, 사람과 생명을 잇는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올레길을 걸으면서 더 가까이, 더 깊게 자연을 만나고 관계를 끊어내는 삶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 삶을 배우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임에 더 용감해지고 함께 어울려 사는 방법을 찾아가며, 삶을 통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와 힘을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순간의 장엄함을 볼 수 있고, 존재한다는 단순한 현실에 경이로움과 신비로움의 느낌을 가지고 살 수 있는 마음을 회복했습니다. 

제주에서 저는 위로하며 위로받고, 하느님의 사랑과 돌보심 속에 길 위에 선 행복한 순례자였습니다. 이제 여정을 마치고 삶의 자리로 돌아갈 때입니다. “정의롭게 행하고, 따뜻하게 사랑하고, 겸손되이 하느님과 함께 걸으러” 다시 기쁘게 길을 나섭니다. 잊지 못할 이 사랑의 체험이 또 길을 찾게 할 것을 믿으며....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카 6,8)

오늘로 '수도자가 바라본 세상과 교회' 연재를 마칩니다. 7년간 세상과 교회 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수도자 목소리를 담아 주신 성심수녀회 이지현, 하영유, 김지선, 김지혜, 유영혜, 남궁영미(집필순) 수녀에게 감사드립니다. - 편집자

남궁영미
성심수녀회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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