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만난 청년들

몇 년 만에 하는 현장 행사인가. 코로나 감염병이 끝물이지만 항공료는 여전히 고공행진이고 더욱이 펀드 문제로 행사를 불과 몇 달 앞두고도 개최 여부를 결정짓지 못했다. 문제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 좌불안석하기를 여러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개최하기로 최종 결단을 내렸다. 확실히 개인의 수고로움은 너에게는 ‘남의 일’이다. 그럼에도 현실이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자약하다면 그만큼 배알이 꼴리고 배신감이 꿈틀거린다. 발리 공항에 내렸을 때 인류가 전에 겪은 적이 없다던 그 공포스런 코로나 감염병의 자취는 오직 택시 운전사의 마스크에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청년 워크숍이 진행되던 10일 동안 어느 곳을 가도 발리는 미주나 유럽에서 온 백인들로 넘쳐났다. 1시간을 좋이 달려 도착한 워크숍 장소에서도 정작 그 유명하다는 발리의 바다나 해변은 안 보이고 대신 여지없이 이들이 눈에 띄었다. 코로나19 이후로 ‘새로운 문명’이니 ‘뉴 노멀’(new normal)이니 외치던 목소리가 흔적도 없이 저 백인들의 물결 속으로 빨려 들어간 거 같아서 왠지 허망했고, 딱히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마음을 애꿎게도 서양사람들 탓으로 돌리는 ‘인종주의자’가 된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프로그램 준비와 진행 등의 분주함도 한몫했지만, 행사에 참가한 청년들을 만나면서 곧 이들에게 빠져들어 무겁던 마음도 어느덧 사라져 갔다. 인도네시아 숨바섬에서 여성 인권을 위해 일하는 남성 활동가 안토니(Antony)는 남다른 이력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는 특히 코로나 시기에 숨바섬에서 심해진 ‘조혼’, ‘강제결혼’, ‘약탈혼’(bride kidnapping) 등의 문제를 들추어내자 다른 많은 청년의 큰 관심을 샀다. 한편 발리 출신인 알린(Alin)은 이곳 종교들이 왜 뒤섞이는 듯 복잡하며, 이 지역 어디를 가도 대문 앞 석상들이나 문 앞에 차려놓은 작은 음식에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어떤 종교문화적 의미가 있는지를 술술 풀어내 설명해 주었다. 또한 필리핀 민다나오섬 출신으로 우리 프로그램에 여러 차례 참석한 적이 있는 막스(Mags)는 부족민 청소년들의 교육이 매우 절박해서 평소의 꿈이던 일반 교사보다는 ‘교육활동가’로 투신하기로 결심했다고 하자 많은 청년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그럼에도 이들 가운데서 가장 인상적이고 큰 울림을 준 이들은 말레이시아 사바주에서 참가한 아담(Adam)과 매버릭(Maveric)이었다. 스스로를 ‘토착 원주민의 종교문화전통 수호자’라고 밝힌 이들은 카다잔(Kadazan)이라는 부족에 속할 뿐만 아니라 믿음이 깊은 가톨릭 신자이기도 하다.

“반뜽 사이반”(Banten Saiban or jotan)이라고 부르는 일상의 봉헌 의식으로 요리 후 또는 식사 전에 신, 인간, 자연의 조화를 위해 바침. 사진에는 집 문앞에 간소하게 차려진 코코넛과 일상 음식들이 보인다. ©황경훈
“반뜽 사이반”(Banten Saiban or jotan)이라고 부르는 일상의 봉헌 의식으로 요리 후 또는 식사 전에 신, 인간, 자연의 조화를 위해 바침. 사진에는 집 문앞에 간소하게 차려진 코코넛과 일상 음식들이 보인다. ©황경훈

“하느님 신앙 때문에 샤먼이 됐다”

동남아시아에서 청년 프로그램을 하게 되는 경우, 토착 원주민(Indigenous Peoples) 출신 청년들을 제쳐놓기가 어렵다. 대개 이런 행사를 하면 공동 주최자로 원주민 공동체가 함께 일하는 경우가 많아서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번처럼 주제가 생태위기나 기후변화 등과 관련된 것이면 이들의 존재는 더욱 부각한다. 지역으로 따지면 필리핀이나 인도차이나 반도의 나라들, 또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등 거의 동남아 전반을 커버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한국처럼 토착 원주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나라에서는 설명을 해도 ‘그런가 보다’ 하면서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기 십상이다.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피부에 와닿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인도네시아에만 250여 부족에 300여 언어를 쓰는 이들이 그 수만큼 다종다양한 삶을 살고 있다면, 이를 머리로 헤아리는 일조차 버거운 게 사실일 테니까. 필리핀 민다나오섬이나 타이 치앙마이에서 청년워크숍을 할 때 원주민 출신 가톨릭 사제가 부족민의 일상복을 입고 전례를 포함해 여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일은 이곳에서는 흔한 일상이다. 주로 흑백회색의 수녀복과 ‘로만칼라’에 익숙한 한국 수도자와 성직자에게는 때로 놀람과 충격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아담과 매버릭은 여러 면에서 독특했다. 특히 대대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담은 가톨릭 사제가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사제가 되듯 자신도 “가톨릭 신앙 때문에, 하느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해 샤먼이 되었다”고 한다. 토착 종교의 사제나 영매로서 샤먼이 된 것이 하느님 신앙 때문이었다니,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미덥지 못한 뭔가가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듯하다. 그러나 매버릭도 그렇지만 아담 역시 아무런 경제적 보상도 없이 자발적으로 그 부족의 종교문화적 전통을 지키려는 힘든 삶에 기꺼이 뛰어든 것을 하느님의 부르심, 그 굳은 믿음에서 찾지 않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신자들의 기대나 상식과 다른 게 있다면 하느님의 부르심에 가톨릭 사제가 아니라 토착 원주민 전통 종교의 사제를 선택한 게 특이하다면 특이할 뿐. 더욱이 이 부족에서는 전통적으로 여성이 보보히잔(Bobohizan)으로 부르는 샤먼이 되는 데 비해 그는 통념상의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러한 이원적인 성으로 나눌 수 없는 ‘제3의 성’을 가진 성소수자다. 그럼에도 보보히잔의 역할을 맡아 충실하게 부족민의 전통을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지켜 나가려고 애쓰고 있으니 그 말 못할 사연이 얼마이며, 또 그 어려움은 얼마나 크고도 깊을 것인가.

전통 카다잔(Kadazan) 복장을 한 아담과 매버릭. ©황경훈<br>
전통 카다잔(Kadazan) 복장을 한 아담과 매버릭. ©황경훈

매버릭은 자신이 사는 지역의 누구도 선뜻 종교문화 전통을 수호하는 일을 하려 하지 않는다면서, “젊은이들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젊은이들이 나서야 하지 않겠느냐”며 사람 좋게 웃는다. 이런 결기 덕분이었을까. 2020년경에 이들이 주축이 되어 ‘사바주 전통 종교문화수호 협회’가 만들어지고 보보히잔들을 포함해 회원 30여 명이 가입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 뒷배경에는 두 아이의 아버지로 사바주 정부나 교회에서도 어떠한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해 호구지책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결코 얕은 ‘감성팔이’나 엄살조차 없이 이 하느님의 길을 가고 있는 매버릭과 아담 같은 이들의 투신과 헌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인 셋만 모여도 아파트 값 얘기한다’는 한국의 현실에서는 꿈꾸기 어려운 삶의 정신이요 자세가 아닐까.

카다잔 부족은 유네스코에 등재될 정도로 유서가 깊은 토착 원주민 공동체다. 이들은 이 지역 토착 부족민 중 인구가 가장 많으며, 이 지역 가톨릭교회 신자 대다수가 토착 원주민이다. 이들이 교회에 기대하는 것은 소박하다. 우선 토착 원주민의 종교 전통을 미신이라고 매도하거나 공공연하게 비난하지 말며, 보보히잔이 악마를 숭배하는 이들이라는 근거 없는 말로 모욕하지 말라는 것이다. 매버릭은 자신은 모태 가톨릭 신자이면서 동시에 카다잔 부족으로 태어났기에 이 둘은 나뉠 수 없고, 어떤 한쪽도 그에게서 없애거나 지울 수 없는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단언한다. ‘공동협의성’(synodality)이라고? 이들에게는 너무도 낯선 말이다. 그 낯섬은 단어 자체의 뜻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이 지역 교회가 토착민 공동체를 악마화해 온 역사에서, 그 부정적인 관계에서 비롯한다. 이들은 이 주제와 관련해 앞에서 말한 것, 곧 교회가 무엇보다도 부족민의 전통 종교를 더 존중하고 이들이 본당과 교구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도록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가져 달라고 되풀이 강조한다. 하긴 이런 전제가 없다면 과연 무엇이 가능하겠는가?

2023년 8월 19-29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아시아청년아카데미/아시아신학포럼에 참가한 청년 참가자들. ©황경훈<br>
2023년 8월 19-29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아시아청년아카데미/아시아신학포럼에 참가한 청년 참가자들. ©황경훈

아마존에서 보루네오섬의 사바주까지

"날개"의 주인공 이상이 “인간만은 식물이라 생각하오”라는 현 문명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명언을 남겼다고 하더라도, 또 이 단 한 문장이 소설가 한강으로 하여금 기념비적인 "채식주의자"를 쓰도록 한 영감의 원천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 가톨릭인에게 그것은 그리 놀라워할 일만은 아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찬미받으소서'에서 “인간은 자연”(139항)이라는 2000년 역사의 그리스도교 세계관 전체를 뒤집는 혁명을 선포했고, 또 아마존 시노드를 경유하면서 시노드 최종 문헌과 '사랑하는 아마존'에 토착화를 넘어서는, 교회와 지역 문화가 평등하게 만나는 ‘상호문화화’(interculturation)라는 새 아기를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이랴. 아마존 지역 9개 나라가 모여 ‘아마존 교회 평의회’(Ecclesial Conference of the Amazon, ECA)를 창립했고 몇 달 뒤인 2022년 10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공식 승인했다. 주교들의 기구로 시작했지만, 전체 하느님 백성을 대표할 기구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이번 청년 워크숍에서 제기된 ‘시노드적 양성’(synodal formation)의 구체적인 안으로서, 우선 주교들이 왕처럼 군림하는 구조를 뜯어고치고 어떻게 이들이 ‘전체 하느님 백성’으로 통합할 수 있는가를 훈련할 기구와 프로그램 설치가 필요하다. 또 21세기가 요구하는 사제요 사목자로서 자격을 갖추기 위한 현재 신학교 교과 과정의 완전한 개편과, 또한 가장 중요하면서도 긴요한 평신도 지도자 및 청년 양성을 위한 기관 설립 및 재정 투자를 우선 꼽아야 한다. 이를 위한 아주 기본이 되는 전제는 교회 재정, 특히 교구 단위 재정을 낱낱이 밝히고 이 ‘시노드적 양성’을 위해 과감한 투자를 숫자로 투명하게 보여 줘야 한다. 아담과 매버릭 같은 헌신적이고 용기 있는 청년 지도자를 양성해 낼 수 있도록 제도를 서둘러 확립해야 겨우 그리스도교가, 특히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가 생존할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병을 치유하는 약의 50퍼센트가 아마존의 식물에 의지하는 게 확인된 사실이라면, 이들의 땅 보루네오에서는 30퍼센트의 약이 쏟아져 나와 인류를 구원하고 있다는 상상도 분명한 근거가 있을 터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식물에게서 생을 얻어 구하는 미약한 존재임을 고백하고, 아마존 교회가 노력하듯이 한국 교회를 포함한 아시아 교회는 깊은 병에 찌든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도 이 청년들과 연대하고 지원하는 시노드적 양성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할 것이다.

황경훈

우리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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