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출처 = CRUX)

(존 앨런)

영화 '찰리 윌슨의 전쟁'(2007)은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내전에 개입해 허우적거릴 때 미국이 어떻게 이슬람 저항군을 은밀히 도왔고, 그것이 소련 제국이 무너지는 데 얼마나 일조했는지 다룬다. 영화가 끝날 즈음 이 영화에서 톰 행크스가 연기한 주인공의 실제 인물인 텍사스 하원의원 찰리 윌슨의 말이 나온다. “이 모든 일이 실제 있었다. 영광스러웠고, 세상을 바꿨다.”

“그리고, 우리는....”

음, 이 부분에서 윌슨이 한 말은 이 자리에 옮기기에 적당하지 않다. 이 글이 실리는 <크럭스>는 가족이 다 보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그 (말의) 요지는 미국의 비밀 개입을 책임진 이들이 전쟁이 끝난 뒤에는 (아프가니스탄이 어찌 되든) 결과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면 충분하다.

이탈리아에서 1943년 7월에 있었던 저 유명한 '카말돌리 협약'(Codice di Camaldoli, Code of Camaldoli)은 2차 대전이 어떻게 끝날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가톨릭 지식인, 활동가 한 무리들이 토스카나에 있는 베네딕도회 카말돌리 수도원에 모여 정의 사회를 꿈꾸며 만든 청사진이다. 이 일을 영화로 만든다면, 윌슨이 했던 말을 그 대단원에 그대로 가져다 써도 될 것이다. 비록, 아마도, 그 영화의 제일 마지막 말은 아니겠지만.

80년 전 이 전설적 모임 참가자 중에는 장차 이탈리아 총리가 되는 두 사람, 알도 모로와 줄리오 안드레오티가 있고, 훗날 피렌체 시장이 되는 조르조 라피라가 있었다. 그리고 피에트로 파반은 나중에 추기경이 되는데, 그는 교종 요한 23세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무렵에 낸 사회 회칙 ‘어머니요 스승’(1961)과 ‘지상의 평화’(1963)를 실제 쓴 사람이다.

이 모임은 경제학자로서 '가톨릭 액션' 운동의 지도자였던 세르조 파로네토가 중심이었다. 그는 나중에 교종 바오로 6세(1963-78)가 되는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몬시뇰(당시 교종청 국무원 차관), 그리고 2차 대전 직후 이탈리아 총리가 되는 알치데 데 가스페리(1946-53) 두 사람의 친구이자 조언자였다. 가스페리 총리는 유럽연합(EU)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현재 가톨릭교회에서는 시성 후보이기도 하다.

여기에 모인 이들이 가톨릭 신앙을 중심으로 살았다는 걸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안드레오티는 무려 7개 행정부에서 총리를 지냈는데, 그와 가스페리는 둘 다 “이탈리아 가톨릭대학생연합”에서 활동할 때 처음 만났다. 이 단체는 기본적으로 '가톨릭 액션' 운동의 청년 분야 조직이다. (역자 주: 20세기 전반기 가톨릭교회는 자본주의, 공산주의, 파시즘 등이 침식하는 것에 직면하여, 자신을 이들과 동등한 차원이지만 더 낫고, 다른 독자적 세계관을 가진 '가톨리시즘'으로 인식하여 대응했다. '가톨릭 액션' 운동은 이러한 교회의 사회 관여를 대표하는 대표적 형태이자 도구였다. 노동 분야에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가 있고, 지식인, 정치, 농민 등 각 분야별 조직이 있다. 프랑스 등에서는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사민주의 노동조합에 대응하여 가톨릭 노조를 따로 만들었고, 정당 분야에서 기독교민주당은 '교회의 당'이었다.) 

두 사람은 교종청에 있는 바티칸도서관에서 함께 공부했다. 나중에 한 저명한 언론인은 두 사람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가스페리는 교회에 가면 하느님과 이야기했고, 안드레오티는 사제들과 이야기했다고. 그러자 안드레오티는 이렇게 반박했다. “사제들은 투표를 하지만 하느님은 안 해요.”

카말돌리 협약은 7장, 99항으로 이뤄져 있는데, 2차 대전 뒤 성립한 이탈리아 공화국의 새 헌법은 이 협약을 핵심 원천으로 삼았다. 또한 기독교민주당이라는 정치 플랫폼을 구상하는 기초가 됐다. 기민당은 이후 이탈리아를 50년간 통치한다.

이 카말돌리 모임이 열린 당시 시대 배경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했다. (모임을 열기) 겨우 8일 전 미군이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섬에 상륙했다. 모임을 시작한 다음 날에는 미군이 로마를 폭격했다. 무려 1000톤이 넘는 폭탄이 떨어져 로마는 초토화 되고 약 3000명이 죽었다. (역자 주: 이에 앞서 1943년 2월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이 승리하여, 이탈리아가 참여하는 추축국이 패배하고 연합군이 승리할 전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임이 끝난 다음 날에는 무솔리니가 파시스트당에서 쫓겨나 체포됐다.(이탈리아는 이로써 추축국에서 탈퇴하고 연합군에 항복했다.) 그러자 독일군은 9월에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를 점령하고 이탈리아에서 연합군과의 전투를 계속했다.

이탈리아 카말돌리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nbsp;(사진 출처 = CRUX)
이탈리아 카말돌리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도원. (사진 출처 = CRUX)

카말돌리에 모였던 사상가들이 보기에 구질서는 붕괴되고 있었고, 무언가 새로운 것이 와야만 했다. 그 모임은 미국에서 1787년에 연 제헌회의와 어느 정도 비슷한 것이었다. 참석자들은 기존 체제 개혁만 생각한 것이 아니고, 아예 맨땅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정부를 상상하려고 애썼다.

이 모임이 미국의 제헌회의와 다른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참석자들이 모두 가톨릭 신자였고, 또한 가톨릭 사회교리에 뿌리는 둔 새로운 국가 모습을 그려내려 의식적으로 애썼다는 점이다. 비교를 하자면, 카말돌리 협약은 미국이 독립전쟁 뒤 헌법을 제정할 당시 '시대의 신질서'(novus ordo seclorum)를 추구한 '연방주의자 논고'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역자 주: 이 라틴어 구절은 미국의 국새와 1달러 지폐에도 들어가 있다. 출전은 기원전 1세기 로마 베르길리우스의 “목가”다.)

내용을 보자면, 카말돌리 협약은 정의 사회 핵심을 두 가지로 꼽는다. '공동선'과 '사회적 조화'.

그리고 이 협약은 경제 활동을 규정할 8가지 원칙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아래는 필자가 이탈리아어에서 번역한 것이다.)

1. 인간의 존엄성은 경제 분야에서도 각 개인의 잘 정돈된 자유를 필요로 한다.
2. 각 개인은 지능, 능력, 육체의 힘 등에 차이가 있는 결과로 서로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평등한 권리가 있다.
3. 연대성은 경제 영역에서도 사회의 공동 목표에 이르기 위한 협동 의무라 할 것이다.
4. 물질 재화는 모든 이의 선익을 위해 쓰여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5. 다양한 합법적 방식으로 소유권이 있을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노동이 가장 중요하다.
6. 상호적 정의를 존중하는 가운데 재화를 자유로이 교역한다.
7. 노동에 대해 지불할 때, 상호적 정의가 절박함을 존중한다.
8. 국가가 개입할 때, 분배, 법적 정의가 절박함을 존중한다.

그 내용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것 하나는 이것이다. “좋은 경제체제라면 공평한 분배를 손상시키는 지나친 축재를 피해야만 할 것이다. 어느 경우든, 소수(개인들)가 부의 집중을 통제함으로써 소수 집단이 경제에 지나친 힘을 갖는 것을 방지해야만 한다.”

사실상, 이 카말돌리 협약은 지난 150년 동안 가톨릭의 지적 생활에서 가장 매혹적인 사고 연습 가운데 하나에 응답하려던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레오 13세 교종의 사회 회칙 ‘새로운 사태’(1891) 이후 교종들의 사회적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진짜 현실에서 실제 정부를 만든다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이었다.

어찌 보면, 이 협약은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다.

가스페리와 같은 정치가들, 그리고 그가 만든 기독교민주당이 이끄는 이탈리아는 파시즘에서 민주주의로 잘 이행했고, 모든 시민에게 일정한 최소 존엄을 보장하려는 사회복지 국가를 건설했으며, 날뛰는 공산주의가 집권하지 못하게 억제했고, 커가는 세속주의와 종교 다원주의를 이탈리아 전통인 가톨릭적 정체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균형을 맞추려 최선을 다하려 했다. 대체로 말하자면,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은 또한 정치 좌익과 우익이 극단으로 나가지 않고, 대략 큰 합의 속에 공존하도록 하는 데도 성공했다.

반면에, 우리 모두는 그 끝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있다. 기민당은 1994년에 '뇌물 도시'로 알려진 일련의 부패 스캔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내파했다. 그리고 카말돌리 협약의 핵심 원칙 상당수를 준수하기보다는 위반했다. 예를 들자면, 일할 권리를 강조했는데도, 이탈리아는 오랫동안 유럽에서 청년 실업률이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저개발된 남부 지방에서는 실업이 고질병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공동선'과 '사회적 조화' 이야기가 좀 잔인한 농담처럼 들리곤 했다.

가스페리 자신도 카말돌리 협약을 현실에 적용하면 이상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던 듯하다.

그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 “가톨릭 액션 모임에 오면 마치 멋진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소가 넘친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오면 그런 여건을 유지하는 것이 늘 가능하지 않다.... 바람직한 원칙과 가능한 행동 범위 사이에서 제3의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카말돌리 협약은 가톨릭 사회교리를 현실 통치의 어려운 일에 적용하려는 역사에서 아마도 가장 사려 깊고 철저하며 도발적인 노력이었던 것으로 남을 것이다. 베네딕도회의 유명한 수도원에서 모였다는 사실은, 베네딕도회가 1500년간 서양 문명을 유지하고 구하는 일을 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마도 어쩌다 일어난 우연이 아니다.

아마 카말돌리 협약이 드러내는 꿈은 온전히 실현된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 꿈이 죽었다는 뜻은 결코 아니기도 하다.

기사 원문:  https://cruxnow.com/news-analysis/2023/07/recalling-camaldoli-maybe-historys-greatest-dream-of-catholic-social-teac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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