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리 해녀가 던지는 질문, 타자(the Other)

제주에서 살기 시작한 첫해에 강정마을에서 장기간 머물던 하와이 평화활동가에게 전통 춤인 훌라(Hula)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화려하게 몸 흔드는 춤을 다이어트 삼아 배울 요량으로 갔다. 그런데 그날 만난 훌라 춤은 내가 익히 알던 그 화려한 춤이 아니었다. 내가 알던 훌라는 길게 풍성한 머리를 늘어뜨린 젊은 원주민 여성들이 비키니 차림에 식물 잎사귀 치마를 입고 심하게 몸을 흔드는 그런 춤이었다. 하와이로 이주한 미국 기독교 제국주의에서 이교도 춤으로 호명되고 금기가 됐다가, 20세기에 소위 대중문화 영향을 받으면서 크게 변화를 겪은 춤이었다. 일종의 식민지 관광상품이었다. 그랬던 예상이 빗나간 것이다. 내가 배우게 된 훌라는 하와이 사람들의 역사 같은 것이었다. 폴리네시아인드의 산·물·바람·흙에 관한 감수성을 담고 있었고, 화산의 여신인 펠레(Pele) 전설을 몸짓으로 전했다. 첫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식민지(植民地)’라는 말을 떠올렸다. 원주민들이 이국 대상이 되어 환영의 춤을 추는 장면은 대개 비슷한 경로를 가졌다.

제주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마음으로 정했던 몇 가지가 있는데, 그중엔 ‘해녀’와 관련한 일엔 관심 두지 않겠다는 결정이 있었다. 제주에 살기로 마음먹던 시절이니 섬에 대한 동경이 크던 시기였고, 제주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것저것 제주 문화 프로그램들을 찾아다니며 ‘제주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던 날들이었다. 그래서 더욱 해녀 관련 콘텐츠 중 일부가 마음에 걸렸다. 만연한 ‘모성숭배’ 언어와 ‘강인한 여성’에 관한 선망이 해녀들에게 덧씌워져 있었다. 심지어 그 삶은 ‘이국적 풍경‘, 혹은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저 결정은 일종의 반발심이었고, 동료 시민에 대한 나름의 예의였으며, 누군가를 ’타자화‘ 하지 않으려는 경계심이기도 했다.

2019년 3월에 강정마을 크루즈항으로 처음 대규모 관광객이 들어온 날이었다. 겨울도 끝나지 않은 추운 항구에서 지금은 입지 않는 해녀 복장인 물소중이와 물적삼을 입고 외국에서 들어온 관광객에게 인사하는 젊은 여성 모델들이 있었다. 해녀(이미지)는 그럴 때 사용되었다. 제주를 소개하거나 자연과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는 제주 사람에 관한 기호가 필요할 때, 아름다운데 심지어 강인한 여성상이 필요할 때 해녀는 불려 나와 ’꽃‘이 되었다. 그 뒤편에서 제주도와 의회 의원들이 와서 유람선 관광객에게 꽃다발을 안겨 주고 있었다. 그날 제주 해녀는 관광객이 쏟아져 들어오는 입구의 살아 있는 환영 마스코트였다.

남성들만 참여하는 제주해녀항일투쟁기. ⓒ엄문희
남성들만 참여하는 제주해녀항일투쟁기. ⓒ엄문희

싸웠던 여자들의 기념식에 여자들이 없다?

올해 초 1월, 제주해녀항일운동 기념일에 월정리 해녀 삼춘들과 함께 갔었다. 그런데 기념식은 유교식 제사 형태로 진행되었고, 제관부터 모든 진행자와 해설자가 남성이었다. 무슨무슨 조합장이니 모임 회장 같은 남성들이 나에게까지 와서 명함을 주고 갔다. 거기 참석한 수백 명 해녀들은 추운 날 하얀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고 멀찍이 단체로 서서 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긴 시간 서서 기다리는 사람 중엔 80이 넘는 늙은 해녀들도 있었다. 이윽고 식이 끝나자 처음으로 해녀들에게 할 일이 생겼다. 일제히 “대한 독립 만세” 세 번을 외치는 일이었다. 제주해녀항일투쟁기념식이 이렇게 끝났다. 하마터면 소릴 지를 뻔 했다.

일제강점기, 해녀들은 지역의 낮은 계급 여성으로서 중간 착취와 차별에 노출되기 쉬웠다. 더하여, 잠수 기술 때문에 식민지체제 동원되기도 쉬운 조건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중 착취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제주 해녀들은 해녀조합 같은 단체를 결성해서 생존권 투쟁을 벌였고, 착취의 심급 원인인 식민지 권력에 대한 저항을 감행하게 되었다. 1930년부터 1932년까지 크고 작은 시위가 200여 건 넘었고, 시위 참가자만 연인원으로 1만 7000명이 넘는 대규모 장기 투쟁이었다. 당시에 세화리에서는 해녀들이 검속에 동원된 자동차를 뒤집어엎어 버렸고, 우도 연평리 해녀들은 배를 타고 경찰 경비선을 추격하여 잡혀가는 해녀들을 빼앗아 내기 위해 치열한 투쟁도 벌였다고 한다. 주변화 된 존재들이었지만, 실은 인식 틀에 갇히지 않았던 강력한 주체들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제주해녀항일투쟁은 죽은 자들을 제사 형태로 추념하는 것으로 갈음되고 있었다. 거기엔 당시의 상황 공유도, 운동성 맥락도, 기억하고 전달할 언어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직 ‘추념’이라는 형식만 남아 제사만 재현하고 있었다. 당시의 ’항일‘은 착취하는 시스템에서 해방되려는 이름이었으나, 오늘날 그 이름은 ’반일‘ 같은 혐오 언어에 더 가까웠다. 해방되기 위해 싸우다 죽은 해녀들을 가부장적 질서가 만든 제사 형태로 기억하고, 현재의 해녀들은 흰 저고리 검정 치마 유니폼을 입고 만세 삼창에 동원되고... 일본 제국주의 시절은 1945년 여름에 끝났을지 모르지만, 해녀들은(여성들은) 여전히 (가부장제 질서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이야말로 식민지가 아닐까. 단지 국가 식민지가 아니라서 잘 보이지 않을 뿐.

문화재청 앞 기자회견 중 울음을 터뜨리는 월정리 해녀. ⓒ엄문희<br>
문화재청 앞 기자회견 중 울음을 터뜨리는 월정리 해녀. ⓒ엄문희

순진한 여자들과 (이념도 사상도 모르는) 무고한 양민들

올해 초에 월정리 마을회가 제주도정과 협의체를 구성하게 되면서 대책위를 해산하기에 이른다. 그런 과정이 있었음에도 월정리 해녀들은 별도로 기자회견을 열어 해녀들의 투쟁을 계속해나가겠다고 밝혔다. 해녀들에게 바다 상황은 그만큼이나 엄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독립된 주체로 바다를 지키는 싸움을 계속한다고 선언하자 비난이 먼저 나왔다. “순진한 해녀들이 시민 단체에 꾐을 당했다”라는 것이다. 협의체 구성으로 이제 다 끝났다고 안도하던 이들에겐 당혹스럽고 괘씸한 여자들이었을 것이다. 그간 해녀들에게서 바라던 규범을 벗어나는 것이기에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해녀들이 과거 일본 제국주의 수탈에 저항한 것은 손쉽게 ‘해방운동’ 이름을 얻지만, 그것이 현재의 지역 사회와 마을 공동체 계약 사이에서 일어난다면, 판단은 달라진다. 마을회의 결정은 무조건 수용해야 한다고 여태껏 믿어 왔고, 어떻게든 그 단계를 만들어 주요한 결정들을 만들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 항상 소외되었던 이들에 대해선 고민 없었다. 큰 결정을 위해 희생되는 작은 의견들의 희생을 부추겨 왔고, 매번 희생되는 당사자가 누구였을지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니 배움도 짧고 마을 공동체에 순응해 오던 이들의 주체적 결정은 아닐 거라는 판단이 가능한 것이다. 그들은 이제까지 ’아무것도 모르는‘, 스스로 시작할 수 없는’ 존재들로 해녀들을 인식해 왔다. 마치 4.3 당시 희생된 사람들을 ‘무고한 양민’ 서사에 가두어 피해자로만 드러내어 그들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털어 버리는 오래된 습관처럼.

어떤 일의 당사자성은 어떤 주체가 그 문제를 그 자신의 문제로서 받아들이고 운동에 나설 때 얻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선 사건 지형의 권력이 정하는 사람들이다. 월정리 해녀들의 투쟁에서도 이 당사자성은 예민하고도 어려운 문제였다. 해녀들이 마을회 결정을 따르지 않고 동료 시민들과 물음을 구성하자, 제주도와 계약 관계에 있는 업체가 나서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두 가지 타자화가 나타난다. 분명 해녀들이 정의로운 절차를 요구하고 질문을 던지는 대상은 제주도다. 그런데 제주도는 나서지 않았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들은 오직 월정 마을회와 소통했다. 공공은 민간 업체 뒤에 숨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이 문제의 주체에서 스스로를 탈락시켜 안전을 획득했다. 그사이 해녀들 거의 전부가 업무 방해로 고소를 당했고, 마을회가 구성했던 비상대책위원회 네 명에게 각각 1억 9000만 원 손해배상금이 청구되었다. 공사장 출입구에 테왁을 놓은 월정리 해녀들 곁에 선 시민들 다수도 업체에게 업무방해 고소를 당했다. 월정리 마을 남성들은 해녀들의 투쟁 컨테이너를 들고 가 버렸다.

마을 안 하수종말처리장 앞에서 처리장 추가 증설 과정상 적법성을 묻는 월정리 해녀.&nbsp;ⓒ엄문희
마을 안 하수종말처리장 앞에서 처리장 추가 증설 과정상 적법성을 묻는 월정리 해녀. ⓒ엄문희
공사 차량 진입을 막고 있는 해녀들.&nbsp;ⓒ엄문희<br>
공사 차량 진입을 막고 있는 해녀들. ⓒ엄문희

아직 없는 당사자

4년 전, 제2공항 건설에 반대하면서 제주도청 앞에 천막촌이 생겨났다. 그런데 천막촌이 생긴 다음 듣게 된 첫 물음은 공항 반대 이유와는 상관없는, 천막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과연 ‘제주 사람’인가라는 물음이었다. 이런 시각은 입장을 달리하는 공항 찬성자들의 주요 논리와도 일치했다. 당사자 아닌 자들은 이 문제에서 빠져야 한다는 요지인데, 그 당사자가 물음을 가진 주체의 선언이 아니라 권력으로 구획되는 것이다. 제주 출생이 아닌데도 제2공항 반대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소위 육지에서 온 외부 세력이자, 나아가 주민들을 들쑤셔서 순조로운 과정을 방해하고 갈등과 운동을 부추기는 전문 운동꾼들이 되었다. 그런데, 천막촌 사람들처럼 외부화된 사람들에게 부과한 ‘제주 사람’에 관한 물음은, 육지에서 온 사람들이 없다면 대다수 ‘제주 사람’은 결코 운동하지 못할 거라는, 즉 그들을 판단과 운동의 주체에서 탈락시켜 수동적으로 만드는 일종의 ‘혐오’가 된다.

실은 월정리 해녀들을 처음 만난 것은 그 도청 앞 천막촌에서였다. 천막촌이 생기기 전 그 자리에 월정리 해녀들의 현수막이 먼저 붙어 있었다. 2017년도 추가증설 논의부터 거슬러 가도 5년, 처음 마을에 하수처리장이 들어서던 당시 문제로 올라가면 30년이 넘는다. 작년 봄에 다시 월정리 해녀들을 만났을때, 이미 1년 가까이 하수처리장 입구에서 조를 짜서 불침번으로 공사 시도를 감시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40대 막내 해녀 김은아 씨가 사진 몇 장을 보여 주었다. 사진 속엔 추운 겨울 컨테이너 안에서 담요를 둘둘 말고 불도 끄지 못한 채로 눈을 붙인 해녀들이 있었다. 실은 그 사진에 마음이 요동친 시민이 적잖았고, 월정리 하수종말처리장증설 반대 투쟁을 이만큼이나 견인한 것도 그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들을 의심하거나 추앙할 뿐, 그들을 투쟁의 주체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사장 입구에서 조를 짜서 돌아가며 지켜 온 해녀들.&nbsp;ⓒ엄문희<br>
공사장 입구에서 조를 짜서 돌아가며 지켜 온 해녀들. ⓒ엄문희

엄문희(멸치)

강정평화네트워크 활동가. 2015년 12월부터 강정마을에 살고 있다. 처음엔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여성들을 기록하고 싶어서’ 1년 살이 계획으로 8살 아이와 왔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았다. 지금은 월정리 해녀들의 투쟁에 동참하며 이야기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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