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매주 월요일 각 지역에서 시국 기도회를 이어 가고 있다. 4월 10일부터 서울, 마산, 수원, 광주, 춘천, 광주 망월동 묘역, 의정부, 인천, 원주에서 열었다. 19일은 청주에서 진행한다. 아래는 사제단이 19일 미사 중에 발표할 성명서 전문이다. - 편집자

(이미지 출처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홈페이지)
(이미지 출처 =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홈페이지)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

보수保守가 지킬 것은 지키자는 쪽이라면, 진보는 고칠 것은 고치자는 쪽이다. 보수가 있어서 우리는 가져야 할 것을 가질 수 있고, 진보가 있어서 무엇인가 버리거나 끝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둘 다 좋고, 둘 다 고맙다. 새가 좌우 날개로 날 듯 사람이 사는 세상도 두 날개를 써야 높이 날고 멀리 간다.

1. 지킬 때나 고칠 때나

하지만 ‘보수’라고 다 훌륭하고, ‘진보’라고 다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지킨다는 보수가 지키기 위해 어떤 십자가를 짊어지고 있는지, 고친다는 진보가 고쳐 나가기 위해 어떤 십자가를 메는지 들여다봐야 한다. 자기 살과 피를 내주는 십자가를 갖지 않는 한 가짜요 허깨비다. 성경은 지키든 고치든 힘없고 가난한 이웃을 염두에 두라고 가르친다. 지켜야 할 것이니 지킨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고쳐야 할 것이라서 고친다 하더라도 힘없는 사람들에게 득이 되지 않으면 하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지키려거나 고치려는 그것이 자기를 위한 일이라면 당장 그만두어야 한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을 슬프게 해서도, 부서지기 쉬운 사람들은 괴롭게 해서도 안 된다.

하느님은 높은 자를 낮추시고, 낮은 자를 들어 올리는 억강부약의 아버지이시니, ‘있는 나’를 낮추어 ‘없는 남’을 높이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지켜도 고쳐도 그릇됨이 없다. 이런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면 나라를 보수에게 맡겨도 되고 진보에게 맡겨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태생이 보수거나 진보인 사람이 있을까?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사안에 따라 보수가 되기도 하고, 진보가 되기도 할 것이다.

2. 우리끼리 싸우면 안 된다

눈만 뜨면 대립하고 의심하고 격돌하는 한국 사회다. 공동선에 부합하는 최상의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다툼이라면 오히려 권장할 만하다. 하지만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나머지 무조건 반대하거나 무조건 찬성하고 만다. 지역 감정에 사로잡혀서, 여태껏 6.25라는 원한에 눈이 멀어서 무엇이 자신과 미래세대를 위한 선택인지 차분히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맹목적 지지와 다짜고짜 반대로 갈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극단 성향의 신문이나 방송, 그리고 특정 커뮤니티가 복제해 내는 거짓 뉴스에 맛들이고 나면 이성적 판단이 작동할 가능성은 영영 사라지고 만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우리는 무슨 당만 찍는다”고 했던 어느 시장 상인의 ‘양심 선언’(?)을 듣고 있노라면 민주주의가 가능하기나 한지 낙심하지 않을 수 없다. 매사에 둘로 갈라져 욕하고 미워하는 쟁투에 신물이 난 나머지, 너 나 할 것 없이 교회에서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다, 세상사는 아예 거론하지 않기로 하자는 묵시적인 합의가 대세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렇게라도 해야 할 정도로 우리네 마음은 상처로 얼룩져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런들 심리적 내전은 멈출 줄 모르고, 작은 일에도 우리는 격렬하게 반응하고 충돌한다. 신앙인이라도 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 먼저 어느 한쪽에 기운 인간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이는 분단체제 속에 생겨난 원죄와도 같은 것이니 서로 이해해 주어야지 등을 돌리거나 미워할 일이 아니다. 우리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 원수는 따로 있다.

3. 진보와 보수 공동의 적

진보와 보수 공동의 적이 있으니 그것은 입장이 다른 ‘남’이 아니라 나만 위하는 ‘나’ 자신이다. 한사코 저와 제 사람들만 위하려는 ‘사사로운 사랑’이 진보와 보수의 진면목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물론 안으로만 굽는 팔을 좌우에 달고 사는 사람으로서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선을 유지 발전시켜 나갈 지도자를 찾아내는 일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다. 국가라는 집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의 경우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가장 큰 사랑, ‘사회적 사랑’을 발휘하리라 믿었던 지도자가 기대를 저버리고 있다. 대한민국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일제 강제동원 <제3자 변제안>으로 시작해서, 일본 <핵폐수 무단투기>까지 대통령이라는 이는 목숨 내놓고 지켜주어야 할 대한민국의 영혼을 짓밟고 국민생명권 보호 의무 마저 보란 듯이 팽개쳤다. 미국의 대중국 정책에 부화뇌동하느라 경제를 망쳤고, 모처럼 축제에 참석했던 젊은이들을 지켜 주지 않았다. 기껏 마련한 양곡관리법과 간호사법을 거부했고, 노동자들을 적대하고 노동조합을 모욕했다. 정작 끊어 버려야 할 친일, 친미 사대 근성은 키우고 또 키웠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이런 청개구리는 없었다. 영혼의 목자인 사제들은 그에게서 ‘자기애적 성격장애’라는 정신질환을 본다.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에 빠져 대화와 소통을 거부하고, 자기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상대는 가차 없이 처단하는 모습은 나르시시즘의 전형적 특징이다. 그는 보수도 아니고 진보도 아니다. 좌와 우, 심지어 민족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극우의 눈으로 보더라도 그는 실격의 배신자일 뿐이다.

4. 나라다운 나라 만들기

2016년 겨울 촛불대항쟁으로 본분을 잊은 대통령을 끌어내리던 날, 비로소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며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때의 열망과 성취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사실 촛불혁명은 기존 세계의 대세를 거스르는 작업이었으며, 나라 안팎을 막론하고 기득권 세력들이 용납하기 어려운 사태였다. 작용에는 반작용이 따르듯 세상을 ‘촛불’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강자들의 사생결단이 윤석열의 집권이라는 변칙적 사건을 만들어 냈을 뿐이다. 한방에 끝내는 민주주의는 없다. 프랑스대혁명을 보더라도 1789년 8월의 역사적 인권선언은 대장정의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첫 공화국이 성립한 것은 1792년이었고, 그 후로도 나폴레옹의 황제 정치, 부르봉가의 왕정 복고 등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마침내 제정帝政이나 왕정으로의 복귀 위험이 사라진 것은 제3공화국이 수립되던 1870년에 이르러서다. 우리도 갈 길이 멀다.

아직 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으나 모든 면에서 거꾸로 달리는 이 폭주열차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한반도는 물론이고 인류 사회 전체의 대혁신, 대전환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할 수 있으리라 본다. 오히려 복된 시기를 맞았다고 여기자. 당장의 성과보다 “옳은 일이니 내가 하겠다. 나라도 하겠다”는 결기로 긴 성공을 도모하자. 먼저 예수성심으로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하자. 사리사욕으로 뭉친 기득권 동맹을 거슬러 아직 가져 보지 못한 나라, 나라다운 나라를 세우자면 나다운 나를 먼저 세워야 한다. 날로 새로워지자. 깊어지고 넓어지자.

2023년 6월 19일
한국전쟁 73주년을 앞두고
청주 흥덕 성당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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