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성당에서 사제와 신자들이 성소수자를 초대해, 강연 자리를 마련했다. 

성소수자와 함께하는 월례미사가 생긴 지 오래지 않았고,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성당이 단지 장소 제공이 아니라 주최했다는 것은 처음이라,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을까” 무척 궁금했다. 

미사를 드리고, 성소수자 당사자와 부모 이야기를 듣고, 또 참가자와 주최 측 의견을 여럿 들었다. 그 가운데 가장 마음에 남은 것은 단 한마디였다. 

“신자들이 성소수자에 대한 교회 가르침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했다. 윤리신학자와 성소수자 이야기를 함께 듣는 자리를 마련하려다 보니, 내가 성소수자를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을 직접 찾아나섰다.”

누군가에 대해 알려 줘야 하는데, 자신이 그들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래서 그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그 두 마디가 왜 그토록 마음에 와닿았을까.

그동안 성소수자 이슈를 비롯해 교회 가르침과 충돌하는 사회 이슈가 많았다. 그런 상황들을 취재할 때마다 그리고 지금까지 기자로서, 신앙인으로서, 시민으로서 가장 아쉬웠던 지점이 그 말에 있었기 때문이다. “왜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을 더 알려고 하지 않는가, 왜 당사자와 만나 이야기하지 않는가.”

최근 ‘메타인지’가 학습지 광고에 등장할 정도로 붐이다. 전문가도, 심도 있게 공부를 한 것도 아니지만 아는 만큼의 메타인지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며,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아는 것”, 쉽게 말해 자기객관화 능력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잘 알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이해하지만, 그것과 다른 입장, 다른 상황을 살아가고,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이 필요하다. 모르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지만, 모르는데도 알아가는 과정이 없다면, 교회의 선택이 같다고 해도 전혀 다른 차원이 될 것이다.

무엇을 모르는지 알아야, 부족한 것을 채워 넣을 수 있고,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교회의 말과 행위가 복음으로 세상에 전달되어야 한다면, 세상이 교회의 말과 행위를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을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대상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일 사람은 없다.

서로 귀 기울이기 위해서 가장 단순하고, 쉬운 길은 한자리에 마주앉아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래야만, 서로의 길이 다르더라도 궁극적으로 공동선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밀양 송전탑 반대 집회 현장, 하염없이 우는 주민과 그를 안아 주는 수도자. ©정현진 기자<br>
2014년 밀양 송전탑 반대 집회 현장, 하염없이 우는 주민과 그를 안아 주는 수도자. ©정현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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