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내가 사는 7층 아파트 복도에서 내려다보면 아이들 놀이터가 바로 눈 밑에 자리하고 있다. 놀이터 옆은 우뚝한 목련나무 아래 벤취가 세 개 놓인 작은 공원이다. 여름날이면 같은 동(棟)에 사시는 할머니들 예닐곱 명이 오손도손 모여 앉아 옛이야기들을 나누셨다. 그런데 몇 년 사이 할머니들은 어디론지 떠나버려 이제 벤취에는 나이든 아저씨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제 영주 부석사(浮石寺)에 다녀왔다. 한번 가보리라 마음먹은 지가 오래되었건만 영 그 곳에 발길이 닿지 않았는데 친구의 여행선물로 마침내 부석사와 만났다. 태백산과 소백산이 나뉘어지는 곳, 태백산과 소백산이 만나는 자리에 부석사가 있었다.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언덕길을 오르자 당간지주가 보였다. 옷감에 사찰의 종파를 나타내는 깃발을 걸든지 혹은 용과 봉황의 머리를 장식하여 이제부터 당신이 들어서는 곳은 거룩한 곳입니다 라는 표시를 했던 게 바로 당간이었고 당간을 지지해주는 보호물이 바로 당간지주이다. 부석사는 의상대사가 창시한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을 펼치는 사찰로 676년 신라 문무왕의 명을 받고 지은 절이라고 한다.

부석에 관한 전설

산사(山寺)를 돌아보며 특별히 무슨 종파의 사찰이라는 개념은 없는데, 부석(浮石)에 얽힌 전설을 읽으며 문득 전생(?)의 어느 시간에선가 신라역사를 전공하신 사학자의 이야기가 기억 속에서 풀려나왔다. 부석사는 해동화엄종이 이 땅에 펼쳐지던 통일신라의 역사를 말해주는 곳이었다. 그 시절 소백산 깊은 곳에서 불법을 닦는 승려는 결코 정치현실과 멀리 있지 않았다. 바로 정치이념을 생산해내는 주도자였다.

신라의 승려 의상대사가 불법을 닦으러 당나라에 도착해 어느 불교신도 집에 묵었는데, 그 집에는 선묘라는 딸이 있었다고 한다. 선묘는 의상을 사모하였으나 그 인연의 어려움을 알고 제자로서 의상을 돕고자 하였다. 의상이 공부를 마치고 선묘에게 알리지 않은 채 신라로 가는 배를 타자, 뒤늦게 이를 안 선묘는 멀어져 가는 배를 보며 자신이 용이 되어 의상의 귀향길을 돕겠다며 바다에 몸을 던지고 만다. 그리고 용이 되어 의상이 타고 가는 배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신라로 돌아온 의상은 문무왕의 명을 받아 사찰을 짓기 위해 지금의 경북 영주 부석면에 터를 잡았으나, 전부터 그 곳에서 지내던 500여 명의 무리들이 방해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선묘낭자의 혼이 커다란 바위 속으로 들어가 바위를 허공에 띄워 위협하자 방해하던 무리들은 모두 달아났다. 그래서 의상대사는 무사히 부석사를 창건할 수 있었다. 그 후 당나라 여인 선묘낭자는 석룡(石龍)으로 변해 무량수전 앞마당에 묻혀있다고 한다.
의상대사
의상의 화엄종, 통일신라의 정치이념

의상이 신라로 돌아와 부석사를 창건한 건 문무왕 16년(676)이었다. 676년은 나/당 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이기고 이어 신라가 흑심을 품은 당나라를 물리치고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룬 해이다. 676년,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천하를 다스릴 정신적인 이념을 찾고 있었다. 문무왕의 전제왕권적 통치를 삼국의 백성들이 순하게 따라줄 통치이념이 요구되던 시기였다. 이러한 문무왕에게 의상대사가 펼치는 화엄종의 교리는 매우 설득력이 있었을 것이다.

화엄종 교리의 중심은 이(理=본체)와 사(事=현상)는 서로 장애가 되지 않으며, 사와 사 또한 서로 원융한다고 보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전(全) 세계가 일즉일체(一卽一切), 일체즉일(一切則一)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화엄종의 종지(宗旨)라고 한다.

즉 문무왕을 중심으로 삼국의 백성이 일치를 이루며 살아가는 통치원리가 의상대사가 펼치려는 화엄종 교리에 의해서 지지되었던 것이다. 고구려 백성이나 백제의 민중들이 신라 문무왕을 받들며 어우러지는 게 종교의 진리에서 보면 아무 장애가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화엄종의 종찰인 부석사는 통일신라의 정신문화를 생성해내는 곳이 되었다.

삼국시대 소백산 죽령 이북은 고구려 지역이었다. 따라서 부석사가 있는 곳은 신라와 고구려의 국경지역으로 신라는 국토는 통일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완전히 하나로 만들지는 못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런 터전에서 선묘낭자가 신기한 힘을 이용하여 커다란 바위를 하늘로 뜨게 하여 그 곳에 살던 이단세력 500여 명을 물리쳤다는 건, 화엄종의 종지로 뭉친 의상대사 세력이 고구려 토착세력들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으로 이제 토착세력들의 근거지가 통치질서 안으로 들어왔다는 뜻일 것이다.

현실을 넘어서는 종교 본래의 목적은 언제나 이상이었을 뿐일까

불교의 교리가 세속의 통치권을 확장시켜주고 보호하는 모습이다. 중국의 위진남북조 시대 에 이루어졌다는 '황제 즉 여래'라는 국가불교 이념이 당나라를 거쳐 통일신라에서 적용되는 예를 볼 수 있다. 게다가 당나라 여인 선묘가 의상대사를 도와 부석사를 창건했다는 이야기는 이제 막 통일된 천하에서 아직은 통치권이 허약한 신라가 당나라의 힘을 빌리면서 동시에 당나라의 비위도 맞춰주는 미묘함을 품고 있음을 느끼게 해준다.

언제 어느 곳에서건 종교를 통하여 현실사회를 뛰어넘으려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종교를 이용하여 현실 속에서 이득을 얻고 죽어서는 안락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현실을 품고 현실을 넘어서는 종교 본래의 목적은 언제나 이상이었을 뿐일까.

극락세계를 의미한다는 안양루(安養樓)의 나무 기둥들은 아름드리 통나무 그대로였다. 전혀 색칠이 되어 있지 않았다. 오랜 세월을 견뎌내느라 나무의 질감은 호호백발 노인의 머릿결처럼 색이 바래고 낡아있었다. 나무 기둥에 저절로 손이 가는 건 시간의 흐름이 새겨진 탓이리라. 화엄의 華(화)자 모양으로 이루어진 건물의 배치는 산기슭을 올라가며 자리하고 있어 누각 하나하나가 자연석으로 쌓여진 축대를 올라야 닿을 수 있는 구조였다.
부처님의 몸에 피어난 검버섯처럼

드디어 부석사 무량수전에 도착하여 먼저 浮石(부석)이라 새겨진 커다란 바윗돌을 보았다. 안내판에 새겨진 소개에 보면 이중환의 <택리지>에 마을 사람 하나가 바위가 실제로 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실을 바위 밑으로 넣어보았더니 실이 반대편으로 온전히 빠져나왔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부석을 보는 내 눈에는 떠 있다기보다 닿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부석을 보러 온 초등학생들의 눈망울에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자력을 이용해서라도 두 개의 돌이 허공에 떠 있어주었으면 싶었다. 전설이란 어쩌면 무지한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람과 자연을 이용하려는 음모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浮石(부석) 옆 바위 위에 세 분의 부처님이 있는데, 가운데 부처님의 귀가 유난히 크고 길었다. 관세음(觀世音)... 중생의 고통스런 소리를 듣느라 귀가 커지고 길어졌다는 부처님의 귀를 보며 여기가 바로 불법의 마당임을 되새겼다. 소백산맥 곳곳 첩첩 산중에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중생들의 아픔을 천 년이 넘도록 듣고 어루만져주었을 부처님의 몸에 노인들의 몸에 피어나는 검버섯처럼 돌버섯이 피어 있었다.

부처님 옆모습 보는 무량수전

그 유명한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무량수불(無量壽佛)인데 이 부처님은 서방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여래와 같은 분이라고 한다. 그래서 남향인 무량수전의 마당을 바라보며 앉지 않고 서방정토인 서쪽편에 앉아 동편에 서 있는 삼층탑을 지그시 바라보는 모습이라는데, 동편은 막힌 벽이어서 부처님은 예쁜 삼층탑을 보지 못하고 계셨다. 마당에서 무량수전의 문을 열면 부처님의 옆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건축가의 실수였는지 나의 무지인지 모르겠다.

이 부처님은 유난히 풍채가 크고 금빛이 두드러져 단청조차 입히지 않은 무량수전의 나뭇결과 대조를 이루었다. 고려 중기에 제작되었다고 하나 부석사 창건 당시인 신라 문무왕 때 제작된 불상을 보고 그대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고려중기의 시대사상을 담아 새롭게 조성했는지 그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부석사에서 퍼져나간 화엄종의 교리가 통일신라의 전제왕권을 지지하는 이념을 제공하는 곳이었으니 커다란 불상이 왕권의 위엄을 나타냈을 수 있다.

고려 중기에 처음 제작된 불상이라면 고려 무신정권의 크기에 치중한 규모 우선주의를 보여주는 미술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불상제작년도가 분명치 않아 그 의미는 확실하지가 않다) 당나라 때, 용문석굴 봉선사에 모셔진 노사나불상(盧舍那佛像)은 측천무후를 모델로 했다고 한다. 측천무후가 당시의 돈 2만 관을 석불제작에 내놓자, 석공들은 감격하여 더 아름답게 측천무후를 닮은 불상을 조각했다고 한다. 산사에 계신 부처님의 규모와 건축물들은 이렇게 축조 당시의 사람들의 희노애락과 바램을 담고 있었다.

아름다움과 슬픔이 밀려드는 배흘림기둥

어느 미술사학자의 극찬을 받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은 그다지 배가 나온 형태는 아니었다. 기둥의 끝부분보다 중간부분이 조금 불룩하다는 것인데 6개월 정도의 임산부 모습이었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 아름다운 건, 그 기둥에 기대고 바라보는 소백산 줄기들의 첩첩한 경지일 것이다. 그 너머로 기울어가는 저녁 해를 바라보니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슬픔이 밀려들었다. 지는 해를 잡을 수 없는 절망이 여기에 부석사가 서 있는 까닭일 것이다.
허옇게 탈색된 무량수전(無量壽殿) 현판은 고려 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내려온 공민왕이 쓴 글씨라고 한다. 무량수(無量壽)...무량대수(無量大數)는 영겁의 수로 무량수전에 모셔진 아미타 부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의미한다고 한다. 무상(無常)의 존재들이 소망하는 무한한 생명, 영원한 인생을 무량수전은 품고 있었다.

부석사 언저리가 온통 사과밭으로 둘러싸여 향기가 그윽하더니 무량수전 옆에는 하얀 불두화가 무더기로 피어있었다. 과거 어느 초파일날, 집안 어른들과 인절미를 싸들고 어느 산사를 걸어 올랐던 기억이 났다. 꽃향기와 솔바람에 과거의 기억이 스며들며 온몸의 피가 술로 바뀌는 것 같았다. 취한 눈으로 바라보는 무량수전의 현판이, 기울어가는 저녁 해가 더욱 유정했다.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을 닮아갈 내 삶

천 삼백 년 세월의 무게를 안고 있는 부석사와의 만남은 기우는 저녁 해와 사위어가는 그믐달을 마주한 기분에 잠기게 했으며, 거기서 전해오는 잡히지 않는 시간의 향기는 바로 부처님의 설법이었다. 그래서 山寺를 찾아가는 여행은 과거의 시간 속으로 몸을 던져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곰곰 되새겨보게 만드는 시간여행인 것이다.

부석사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마음은 불효자식이 고향집 늙은 어머니를 만나고 돌아가는 것 같은 그리움과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사하촌(寺下村)에 들어선 대형 음식점들이 저마다 간판에 티브이 맛집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문구들을 자랑스럽게 써놓았다. 대형 주차장에 빼곡이 서 있는 관광버스 중의 하나에 타자, 도시로 돌아가 지켜야할 약속과 밀린 일들이 머릿속으로 밀려왔다.

한밤중 밤비를 맞으며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니 작은 공원에 놓인 세 개의 벤취가 고스란히 비를 맞고 있었다. 언젠가 저 벤취에 앉아 온종일 볕바라기를 하는 날들이 내게도 올 것이다. 아마 그때 그 모습은 부석사 무량수전의 현판을 닮아 있을 것이다.

 

 

/이규원 2008-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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