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이 글은 <산위의 마을> 42호에 실린 글입니다.

* 상당수 천주교 수도원과 성당을 건축했던 건축가 이일훈(1954-2021) 선생의 선종 1주기를 맞아 2022년 7월 2일 광릉추모공원에서 추모미사가 있었다. 예수살이공동체의 반연간지 <산위의 마을> 42호에 실린 이일훈 선생의 사위 김형규 씨의 추모 글을 게재한다.

 

저의 장인어른이신 건축가 이일훈 선생께서는 김수근과 함께 한국 현대건축의 양대 산맥으로 꼽히는 김중업 선생의 제자였습니다. 김수근 계열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 선생과 함께 스승의 뒤를 잇는 ‘맞수’로 비교되기도 합니다. 김중업 선생 타계 후 독립한 아버님은 돌아가실 때까지 30여 년 동안 40여 개의 작품을 전국 곳곳에 남기셨습니다. 지역성과 공동체성, 생태적 관점을 강조한 사회성 짙은 작품이 많습니다. 인천 만석동 달동네의 ‘기찻길 옆 공부방’, 충남 홍성 풀무학교의 ‘밝맑도서관’, 경기 가평의 ‘우리 안의 미래 연수원’ 등이 대표적입니다. 생극성당, 면형의 집, 성 프란치스코 평화센터, 도피안사 향적당 등 종교 건축도 많이 하셨고, 기업 건물로는 문학과지성사, 세계사, 청년사 등 출판사 사옥을 주로 설계하셨습니다. 주거용 건축은 마포 성미산마을의 공동주택 ‘소행주’(소통이 있어 행복한 주택)와 잔서완석루, 궁리채, 탄현재, 퇴계불이 등이 널리 알려졌고 등촌동의 다세대주택 ‘가가불이’로는 서울시 건축상을 받으셨습니다.

제 생각에 건축가 이일훈의 개성과 매력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 중 하나는 경기도 화성에 지은 ‘자비의 침묵 수도원’입니다. 학생 수사들이 생활하는 건물 외벽에 계단을 달았는데 난간이 없습니다. 설계를 맡긴 수사님이 위험하지 않겠냐고 하자 “위험하지만 그리 높지 않아 떨어져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떨어진다면 정신이 해이한 것이니 수도자로서 자격이 없다. 내쫓아야 한다”고 설명하셨다고 합니다. 늘 깨어 있으라는 건축적 배려를 그 수사님도 파안대소하며 받아들이셨다고 합니다. 복도는 폭을 75센티미터로 좁게 만들어 초기에는 불편하다고 원성이 자자했는데, 서로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양보해야만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학생 수사들이 나중에 ‘겸손의 복도’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자비의 침묵 수도원’은 이일훈 건축철학의 핵심인 ‘채나눔’이 전면적으로 적용된 작품입니다. 채나눔은 집을 세는 단위인 ‘채’와 나누다는 뜻의 ‘나눔’을 합친 말입니다. 안채, 사랑채, 바깥채 등 여러 건물로 나뉜 우리네 옛집의 공간 구성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습니다. 집을 한 덩어리로 크고 넓게 짓고 모든 공간을 내부화하는 요즘 건축이 인간의 편리를 위한 것 같지만 실은 건강과 환경을 망친다는 문제의식에서 나온 설계방법론이 바로 채나눔입니다. 공간이 좁을수록 집을 여러 채로 나눠 ‘불편하게 살기’, ‘밖에 살기’, ‘늘려 살기’를 실천하자는 겁니다. 침실과 서재를 오갈 때마다 신발을 신고 나와 마당을 가로질러야 한다면 당연히 불편하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지겠지만, 그렇게 ‘의도적이고 권할 만한 불편’을 즐겨야 산들바람도 느끼고 노을도 감상하고 밤하늘의 별도 한 번씩 쳐다볼 수 있다는 겁니다. 동선을 줄이는 게 아니라 반대로 늘려야 걷고 움직이며 건강한 삶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채나눔을 받아들인 집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은 바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 사저입니다. 봉하 사저는 아버님 작품이 아닙니다. 건축가 고 정기용 선생이 설계했습니다. 아버님과 10살 터울인 정기용 선생은 일을 맡으면서 후배의 몫을 빼앗는다는 생각에 많이 미안해 하셨다고 합니다. 2년 가까이 노 대통령과 소통하며 설계 작업을 진행하는 동안 정기용 선생이 주기적으로 찾아와 함께 의논했다는 뒷이야기를 아버님이 중환자실에 들어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에서 들었습니다. 엄밀히 말해 봉하 사저는 채나눔의 기본 개념을 조금 차용한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마저도 전직 대통령쯤 되는 인물이니 흔쾌히 받아들인 것이지 세상에 큰돈 들여 자기 집을 지으면서 불편함과 검소함을 기껍게 받아들일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채나눔은 평단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건축계에서 의미 있는 반응과 논의를 촉발했지만, 건축을 과시와 자본증식의 수단으로만 여기는 대중의 통념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상업적 성공과도 거리가 멀었습니다. 출간하지 못한 아버님 마지막 원고에는 이런 문장이 두 번 반복됩니다. “평생 건축하고 살면서 깨달은 것이 있으니, 뜻이 있는 곳에 돈이 없고 소신이 있으면 외롭다.” 그래도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옳다고 생각하신 건축을 고집하신 것은 건축이 단순히 집 짓는 기술이 아닌,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신념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버님은 삶의 방식을 의문하고 제안하는 것이 바로 건축가의 일이라 생각하셨고, 평생 한순간도 그 일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7월 3일 1주기 추모미사. (사진 제공 = 김미애)
7월 3일 1주기 추모미사. (사진 제공 = 김미애)

건축가 이일훈은 왕성하게 쓰는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그것도 베스트셀러 작가였습니다. 국어교사 송승훈 선생님이 아버님께 자신이 살 집을 의뢰하면서 주고받은 A4 용지 208쪽 분량, 82통의 편지를 엮은 책 "제가 살고 싶은 집은"은 9쇄를 찍었고, TV 다큐멘터리에서 다룰 정도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공저를 포함해 10여 권의 책을 쓰셨고, <경향신문>에는 두 번에 걸쳐 7년이나 칼럼을 연재하셨습니다. 짧은 분량이라도 매일 쓴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한 번도 마감을 어긴 적이 없고 ‘비상사태’를 대비해 항상 네댓 개의 예비 원고를 마련해 두셨다고 하셔서 늘 마감에 쫓겼던 기자 사위는 속으로 퍽 주눅이 들었더랬습니다. 글감은 항상 주변에서 찾으셨습니다. 외출하실 때는 습관처럼 카메라를 목에 걸고 다니며 눈에 띄는 것을 찍고 메모하고 생각을 정리해 작더라도 결과물로 만들어내셨습니다.

암 선고를 받고 병원에 계실 때도 계속 글을 쓰셨습니다. 하루 세끼 나오는 식사를 항암제 부작용으로 한 술도 뜨지 못하면서도, 수저가 담긴 종이봉투만은 곱게 펼쳐 따로 모아 그 여백에 빼곡히 쓰셨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보호자 면회도 없이 격리된 병실에서 무료함과 쓸쓸함과 엄습하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낼 유일한 방편 또한 글쓰기 외에는 없었을 거라 짐작합니다. 나중에 영인본을 만들려고 잘 모아 두었다며 수저봉투 수십 장을 가지런히 묶은 두툼한 뭉치를 꺼내 보여 주시는데 쏟아지는 눈물을 참기 힘들었습니다. 그중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수상을 축하하며 시작한 글은 언론과 대중이 너무 아부 일변도 아니냐 그이의 연기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 부족한 것 아니냐 딴지를 걸다가 다시 조영남의 한심한 여성관과 인성을 한참 꾸짖다가 종내 다른 이야기로 빠지고 마는데, 그러니까 본론은 장례식장에 울려 퍼질 노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보통 유명가수들이 죽으면 장례식장에서 그의 대표곡을 부르기 마련인데, 조영남은 '화개장터'가 아니라 다른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한다는 겁니다. 소설가 이제하 선생이 작사 작곡한 그 노래의 원제는 '김영랑, 조두남, 모란, 동백'인데, 아버님은 조영남의 여성관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 노래를 고른 안목에는 그만 탄식하고 마셨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모란은 벌써 지고 없는데 먼 산에 뻐꾸기 울면

상냥한 얼굴 모란 아가씨 꿈속에 찾아오네

세상은 바람 불고 고달파라

나 어느 변방에 떠돌다 떠돌다

어느 나무 그늘에 고요히 고요히 잠든다 해도

또 한 번 모란이 필 때까지 나를 잊지 말아요

 

아버님께서는 생전에 종교 활동을 하지는 않으셨지만 돌아가시기 전 날 대세를 받고 토마스라는 새 이름을 얻으셨습니다. 아버님과 건축철학을 깊이 공유한 동지이자 30년 지기인 양운기 수사님께서 “누구보다 천주교인다운 삶을 사신 분”이라며 세례를 권하셨고, 가족들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천주교에서 토마스는 건축가의 수호성인이라고 합니다. 같은 세례명을 가진 안중근 의사를 평소 존경하셨고 뤼순감옥의 건축에 대해서도 언급하신 적이 있다 하니 여러모로 뜻깊은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7월 3일 1주기 추모미사. (사진 제공 = 김미애)
7월 3일 1주기 추모미사. (사진 제공 = 김미애)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치를 수 있었습니다. 생전에 마지막으로 작업하셨던 인천 숭의동 성당에서 2021년 7월 5일 장례미사를 모셨습니다. 숭의동 성당은 2021년 4월에 축성식을 한 새 건물입니다. 설계부터 완공까지 3년 반 동안 신자들과 꾸준히 소통하면서 성수대 같은 작은 성물부터 울타리 대신 설치한 조경석 하나의 방향까지 성전의 모든 공간과 구성물을 직접 꼼꼼히 디자인하셨다고 합니다. 제대 뒤편의 커다란 십자가 예수상을 일반적인 형태가 아닌, 예수님의 뒷모습으로 제작하자고 제안하셨다는 뒷이야기를 김영욱 주임신부님께서 강론 때 전해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두 팔 벌려 안아 주는 대신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뚜벅뚜벅 앞서 나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며 정말 아버님다운 발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무 파격적이라 수용되지 못한 뒷모습의 예수상 아이디어는 작은 사이즈의 기념품을 제작해 이어받기로 했습니다. 미사 중간에는 아버님이 설계하신 인천 만석동 ‘기찻길 옆 공부방’ 학생들이 나무로 직접 만든 건물 모형을 전달했습니다. 그곳에서 공부한 학생 중 이미 건축학도의 길을 걷는 친구도 있고 앞으로 건축학과에 진학하겠노라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다고 합니다. “세상에 나보다 더 보람 있는 건축가 있으면 나와 보라” 하셨던 아버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화장한 아버님의 유해를 모시고, 꼭 가고 싶다고 유언을 남기셨던 경기도 화성 ‘자비의 침묵 수도원’에 들렀습니다. 건축가 이일훈이 평생 주창했던, 생전에 국어사전에 그 단어가 실리는 것을 보는 것이 소원이라 하셨던 설계방법론 ‘채나눔’이 전면적으로 적용된 공간. 출입문을 지나 울퉁불퉁한 둔덕을 그대로 살린 마당부터 난간 없는 계단, 겸손의 복도, 옥상 위 하늘성당까지.... 걸음마다 진하게 밴 아버님의 자취에 호탕한 그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처음 가 본 공간이지만 그렇게 반갑고 익숙하고 정겹고 서글플 수 없었습니다.

양지바른 산비탈 참나무 그루터기 아래에 아버님을 수목장으로 모시던 날, 그 나무 아래에서 양운기 수사님은 조영남의 '모란동백'을 목청껏 불러주셨습니다. 눈물 삼키며 들었습니다. 몸이 불편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문정현 신부님께서는 직접 칼로 새긴 목판을 보내주셨습니다. “한국 건축의 양심, 채나눔으로 저항한 건축가 이일훈 여기 잠들다.” 길 위의 신부가 변방의 건축가에게 보낸 값진 헌사, 나무에 잘 매달아 드렸습니다.

7월 3일 1주기 추모미사. (사진 제공 = 김형규)
7월 3일 1주기 추모미사. (사진 제공 = 김미애)

제가 알기로 아버님은 평생 넉넉한 건축비를 갖고 작업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싼 재료로 집을 지을수록 예쁘게 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신조를 갖고 계셨습니다. “요란한 것, 치장된 것은 모두 콤플렉스를 드러낼 뿐 도대체 당당함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소박하되 당당한 삶, 짧은 시간일지언정 제가 아버님께 보고 배운 전부입니다. 스스로에게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떳떳한 삶. 이전에도 앞으로도 그렇게 사는 것 외에 아버님의 뜻을 잇고 추모하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삶의 공간을 변화시켜 세상을, 사회를 바꾸고자 하셨던 아버님의 뜻을 기억 하겠습니다. 더 널리 알리고 실천하겠습니다.

 

김형규

건축가 이일훈의 사위, 전 <경향신문> 기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