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광(모이세, 50)

권오광 선배, 58년 개띠,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났지만,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 때문에 형제들의 출생지는 모두 다르다. 오광이형은 어린시절을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경북 봉화에서 보냈다. 본래 이름은 권오관이었지만, 출생신고 때 동사무소에서 실수하여 권오광으로 기재된 뒤로 여지껏 권오광으로 살고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봉화는 형의 마음의 고향이다. 절벽 냇가에 있던 초등학교에선 점심때마다 아이들에게 강냉죽을 끓여주었다. 숟가락을 갖고 다니던 시절인데, 할아버지가 이장이라 형만 배급에서 빠졌다. 그러면 내내 턱을 괴고 앞에 앉았다가 죽을 얻어먹었다. 아이들이 먹는 죽이 그때는 얼마나 먹고 싶었을까.

엄마, 아픔을 안고

그에겐 엄마에 대한 아픔이 있다. 초등학교 6학년때, 졸업식을 1주일 앞두고 담임선생님이 엄마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아마도 뭔가 바라는 바가 있었던 모양이다. 당시 엄마 몸이 많이 아팠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철이 없었던 형은 엄마가 학교에 가지 못한다고 하자, 에이! 화를 내며 문을 쾅 닫고 학교엘 갔다고 한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가 돌아가셨다. 지금도 그때 화를 내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가슴이 막힌다고 했다.

그 후로 계모 밑에서 자란 형은 그 열등감을 씻어내려고 공부에만 몰입했다. 1등 자리를 차지하려고 밤새워 공부했다는데, 헤르만 헤세 등 문학책을 많이 읽었다. 형이 공부로 승부를 보겠다며 애써서 서울 중앙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1학년 때 계모가 아버지의 퇴직금을 받아 도망가고 아버지도 시름에 겨워 집을 나간 뒤로, 여동생과 방 한칸짜리 이층방에 몸을 기대어 냉방에서 추운 겨울을 나야 했다. 이때 처음 공부 다 때려치우고 여동생 공부시키며 공장에 갈 생각을 했다. 이듬해 아버지가 돌아오시자 계모도 이를 알고 따라 들어왔는데, 참 세상이 그런가 보다. 당시 미군들이 지어준 영세주택이 있었는데, 신림동의 한민촌이었다. 여기선 공동수도와 공동화장실을 사용한다. 거기서 살았다.

너는 대학 갈 운이 없다더라

어느날 계모가 점을 보고 와서는 형에게 말했다. “너는 평생 대학 갈 운이 없다더라.” 이 말을 듣고 집을 나와 친구 집에 머물며 공부를 했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한다고 소문이 나서 친구 어머니는 속옷까지 사다놓고 형을 기다렸다. 친구집에 가정교사로 와 있던 서울대 다니던 대학생도 만났는데, 그에게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같은 책을 얻어 보았다. 가난한 농가의 4남매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가정교사를 하며 집에 돈도 부쳐 주어야 하기 때문에 학생운동을 하고 싶어도 못 한다고 푸념을 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형은 그런 생각을 했다. “옳다고 믿어서 목숨 걸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던데...”

그래서일까? 형이 입학한 시립대 환경공학과는 하도 극렬하게 데모를 해서 ‘혁명공학과’라고 불렸다. 형도 여기에 한 몫을 했다. 당시 형의 별명은 ‘걸레’였는데, 교문 앞에 앉아서 친구들에게 돈을 뜯어내어 노상 술 먹으러 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던 형이 운동을 하게 된 것은 개신교회를 통해서였다. 형은 고등학교 때 잠시 교회에 다닌 적이 있었는데, 재산권 문제로 목사들이 다투는 것을 보고 교회를 곱지 않게 보았다. 그런데 기독교감리교청년회에서 회보를 만들던 선배가 보여준 똥물세례로 유명한 동일방직 사건에 대한 사진은 충격적이었다. 자본과 권력의 폭력성에 대한 충격이었다.
 

수도교회와 노동야학 시절

2학년 때 20여명의 대학생이 수도교회에 모여서 만든 게 ‘소프로스타스’라는 써클이었다. 입주과외를 하면서 노동야학을 했다. 야학에서 노동자들은 연신 물었다. 당신, 지금 여기 뭐하러 왔냐고, 너는 우리랑 다른 데 뭘 함께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포장마차에서 국수 먹고 술 먹으며 그들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형의 가슴에 지금도 아프게 박혀 있다. 이 당시 그가 읽었던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 나치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을 다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등이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공단거리의 그 사람
 

군생활 할 때, 의사뇌막염에 걸려 죽을 뻔 했는데, 외출에서 돌아와 혼절한 뒤로 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그때 하느님께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한 적이 있다. “하느님, 그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어요.” 다음날 사제 약이 의무실에 들어왔고, 형은 약을 먹고 말짱하게 나았다.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을까? 제대 후 형은 노동시인이었던 박영근 형과 살면서 인형 만드는 봉제공장에 들어갔다. 일당 1,800원 하던 시절이었다. 매일 술 먹고 밥 못 먹고 싸구려솜을 인형에 받다보니 폐결핵에 걸렸다. 보건소에선 다시 학교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형은 봉제공장을 그만 두고 친구랑 가리봉 오거리에서 손수레를 세우놓고 토스트 장사를 해보았지만 그도 망했다. 당시 공단 노동자들은 임금이 박해서 출퇴근 길에 토스트 사먹을 돈도 없었던 것이다. 하루 세끼를 팔다 남은 토스트로 연명하던 시절이었다. 그해에 기독학생회를 맡아달라는 부탁으로 복학한 형은 1984년 학원자율화 조치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밤낮 데모하느라 몰려다녔다. 이때 얼마나 최루탄을 많이 맞았는가, 친구들은 최루탄 때문에 결핵균이 다 죽었을 거라고 놀리며 웃었다.

당시엔 도서관 창문에 매달려 시위를 주동하는 게 유행이었는데, “살인마 전두환은 들어라...”로 시작하는 성명서를 낭독하여 국가원수모독죄로 수배되었다. 그 뒤로 구로공단 전기회사에 취직했다가 학출(學出)이라는 게 발각되어 다시 부천으로 내려가 동양피스톤에 위장취업했다. 이 당시 노동운동은 경제투쟁을 부인하면서 선도투(소수의 선진 활동가들이 정치투쟁을 통해 사회를 변혁시켜야 한다는 주장)를 내세웠지만 형은 생각이 달랐다. 여기서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준비하다가 다른 동료가 발각되는 바람에 결국 1년만에 해고되었다.

비인간 경험한 옥살이, 그리고
 

1986년 인천 5.3사태 때는 부천 현장 총책으로 일하다 연행되어 6개월동안 이른바 ‘빵투’(감방투쟁)를 했다. 권인숙 양 성고문 사건이 알려지자 더욱 극성을 부려 밥그릇에 똥을 퍼다가 교도관에게 붓고, 병사(病舍)를 점거하고, 단식투쟁을 하였다. 당시 ‘이현철’이라는 가명을 쓰던 형은 얼마 후에 풀려났지만 다시 조직사건에 연루되어 안기부에 끌려갔다. 여기서 몽둥이로 발바닥만 이틀 동안 맞았다. 그들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우선 때려서 기를 죽이고 심문을 시작하는 것이다. 어슬프게 벽에 머리를 부딛고 자해를 하며 저항해 보았지만 오히려 어설픈 저항은 더 큰 매를 블러온다는 것만 배웠다. 여기서 형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인간 이하의 비참함을 맛보는 순간들이다. “담배 줄까?” “예.” 비굴하게 담배를 받아 피는 형을 두고서 심문관들은 “운동 한다면서 그것도 못 참냐?...”면서 조롱했다. 나중에도 형은 한동안 고문후유증으로 잠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야! 이 씨발 놈들아!!” 소리치곤 하였다.

형과 한동안 한 집에 살며 노동자들을 끌어안고 뒹굴었던 시인 박영근은 우리가 어찌 하다 이 ‘대열’에 서게 되었는지 묻는다.

친구들이 쓰러지고 있어요
탈춤 팔목장단 가락에 해고의 사연을 담으며
끝까지 함께 싸우겠다고 하더니
어깨춤 한번 올리지도 못하고
어린 경실이 복숭아꽃처럼 어둡게 떨어져
병원으로 실려가고
호소문을 쓰던 정순이는
찬물만 들이키다
한 움큼 구역질로 물을 다시 토해내며
못다 쓴 호소문 구절을 깔고 바닥에 눕고
쓰러지고, 쓰러짐으로 하나가 되어 어우러지고
어머니, 저는 왜 이 대열에 섰을까요
(박영근, ‘어머니, 저는 왜 이 대열에 섰을까요’ 부분) 

/ 한상봉 2008-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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