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을 보내는 12월의 오후는 늘 아쉽다. 나무에 걸린 햇살이 따스한 빛을 발하는 오후의 시간은 달콤하지만, 너무 짧게 지나간다. 읽던 책에 잠깐 몰두하거나,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보면, 이 따스한 오후의 빛은 금세 달아나 버린다. 그래서 방금 어둠에 잠겨버린 동네의 골목길을 기웃 거리다보면, 깜깜한 하늘엔 성근 별들이 반짝인다. 달력은 이제 달랑 한 장을 남겨 놓고, 이렇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 잠깐인 거라고, 영원한 세상을 갈망하라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교를 한다. 이즈음이면, 배달 물량이 많아진 우편배달부들은 하루에 두 번씩 들르기까지 하는 수고를 한다. 한 학기를 마치고, 학생들의 마지막 페이퍼를 읽고, 점수를 주는 일은 이제 나에게는 12월의 예전이 되었다. 점수를 제출해야 하는 마지막 시간까지, 삶이 녹록치 않다던 학생들의 페이퍼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우리가 공부한 생의 철학과 지식이 그들의 삶 속으로, 혹은 살 속으로 스며들기를 기도한다.

지난 학기 수업들이 유난히 건조하게 느꼈던 나는, 이번 학기를 시작하며 하느님께 내가 만나는 학생들을 통해 위로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내가 위로를 주는 입장이어야 하는데도, 나는 이 염치없는 기도를 드렸고, 놀랍게도 이 기도를 철저하게 들어 주셨다. 이번 학기에 나는 학생들이 제기하는 진정성 어린 의문들과 그들의 삶으로 거의 매일 위로를 받았다. 학생들은 대화를 통해 자기들의 삶을 나누어 주었고, 자유롭게 토론하면서 우리는 줌 공동체가 되어갔다.

그러면서 인간은 위로를 받고 나서야, 비로소 누군가에게 위로를 줄 수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평화를 구하는 기도에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영생을 얻는 거라고 하셨는데, 어쩌면 내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위로받기를 간구하는 그 가난한 마음에서, 상대를 향한 위로가 나오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본다. 위로를 구하는 마음을 가엾이 보시는 하느님은 우리에게 위로를 먼저 부어 주시는 것이리라.

어느 오후, 동네 교회의 문 앞에 부드럽게 걸친 그림자가 우리에게 이유없는 기쁨 속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는 것 같다. ⓒ박정은
어느 오후, 동네 교회의 문 앞에 부드럽게 걸친 그림자가 우리에게 이유없는 기쁨 속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하는 것 같다. ⓒ박정은

그러고 보니, 이번 학기 수업들이, 그리고 내가 만난 아름다운 학생들이 기적처럼 나에게는 위안이요, 소망의 자리가 되었다. 특히, 세계 종교 수업이 즐거웠다. 이 수업에서 나는 한 학기 동안 배운 여러 삶의 철학 중 자기들의 생에 간직하고 싶은 다섯 가지 원칙을 정하고 설명하는 학기 말 페이퍼 과제를 주었는데, 그들의 과제를 읽다 그들의 마음을 읽곤 눈물을 훔쳤다. 여러 학생이 앞으로 살면서 언제나 민중 신학과 정의에 관심을 두는 사회적 시인이 되겠다고 적었고, 경쟁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교의 무위 사상, 유교의 인 사상을 꼭 기억하겠다고 적었다. 또 내가 수업 중 해 준 말을 자기 삶의 철학으로 기억하겠다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생을 풍성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는 나의 개인적 묵상 나눔과 NOWHERE, 즉 지금 여기(now here)가 아니면 어디에도 없다(no where)는 내 수업 내용이었다.

또 이 수업을 추억하며 한 학생은, 갈릴래아 호수 가에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장면을 마음으로 상상하며 함께했던 기도의 순간을 연장하겠다고 적었다. 이 젊은이들의 페이퍼를 읽으며, 갑자기 낡은 그물을 던지는 힘없는 투망질 같던 가르치는 일이 갈릴래아 호수의 아침처럼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위로를 받고 나서야, 나는 여자친구의 임신으로 수업을 계속하지 못했던 호세와 중간에 수업을 전혀 들어오지 못한 로다를 위한 기도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사실 내가 얼마나 자신들로부터 위안과 희망을 느끼는지 잘 모를 것이다. 구약성서 수업에 들어온 75살 학생 브루스와 그의 아내 메리가 나를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아마 잘 모를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겸허히 성서를 대하던 그 노학생 부부는 정성스럽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왔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내 걱정거리 속에서 내 사도직의 감동을 잃고 있었다. 내가 수업을 서툴게 해도 되고, 교무 처리를 잘하지 못해도 되지만,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건, 내 일의 본질이 깊은 곳에 그물을 치고 학생들의 마음을 만나기를 기다리는 진실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가 십여 년 전 처음 교실에 들어갈 때의 떨림과 먼저 학생들이 내게 보여 주었던 사랑과 위로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러고 나서 한 학기 동안 내 생에 깊숙이 들어왔던 학생들에 대해 적어 놓았다. 그들도 나만큼 내 수업을 통해 위로와 꿈을 얻었기를 행복하게 소망하면서. 그리고 누군가의 노래처럼 그들의 삶에 ‘사랑해요’라고 썼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마찬가지로 가난하며, 마찬가지로 위로가 필요하다.

나만의 학기 말 예전을 하다가 창밖으로 문득 12월의 캄캄한 하늘에 뜬 별을 올려다보면, 나는 예루살렘을 꿈꾼다. 예루살렘은 종말적 희망을 의미한다. 영원한 하느님의 품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시간 혹은 공간이다. 신앙인은 사실 모두 예루살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예수 그분이 탄생하시던 2000년 전 어느 날 밤도, 사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그리워했고, 바빌론의 유배 중에도, 또 세상의 어느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도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그리워했다.

짧은 12월의 오후는 어느덧 어둠 속에 잠겨 간다. 대림은 어둠 속에 기다리는 빛의 축제이다. ⓒ박정은
짧은 12월의 오후는 어느덧 어둠 속에 잠겨 간다. 대림은 어둠 속에 기다리는 빛의 축제이다. ⓒ박정은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가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사실 예루살렘 성에 가보면, 성안은 비어 있다. 그저 무너진 성벽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이 상징하는 것은 가난하고 무너진 마음이다. 예루살렘을 돌다 맛있는 빵을 사 먹던 내가 기억난다. 그러니 예루살렘, 그 거룩한 도성은 결국 우리 삶의 현장이다. 이 대림에 예루살렘이 결국 삶의 현장이라는 각성은 다시 한 번, 인간이 되어서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의 성탄은 거기 어딘가가 아닌, 여기 이곳에서 맞이하는 것임을 알려준다.

그래서 이 계절에는 짙어 가는 어둠 속에 빛나는 별빛을 받으며, 나도 문 앞에 조그만 대림의 촛불을 밝히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계절에는 가장 효율성이 떨어지는 일들을 하고 싶다. 힘들여 손으로 카드를 쓰고, 우체국에서 여러 시간 줄을 서고,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는 꼭 무료급식소에서 빵을 나누어 주고, 설거지를 하는 그런 이름 없는 일을 하고 싶다. 그리고 어떤 이유 없이, 기쁨에 잠긴다. 그게 성탄을 준비하는, 모든 가난한 사람의 특권이니까.
 

박정은 수녀
미국 홀리네임즈 대학에서 가르치며,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만나는 주제들, 가난, 이주, 난민, 여성, 그리고 영성에 대해 관심한다. 우리말과 영어로 글을 쓰고, 최근에 “슬픔을 위한 시간: 인생의 상실들을 맞이하고 보내주는 일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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