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바키아 사도적 방문 3

(편집 : 장기풍)

“하느님은 매번 우리를 용서하시며 기뻐하십니다.”

교종, 경기장에 모인 2만 5000 젊은 슬로바키아인에게 충고

프란치스코 교종은 슬로바키아 사도적 순방 3일차 오후 코시체의 로코모비타 경기장에 모인 2만5000명이 넘는 슬로바키아 젊은이의 노래와 기도의 뜨거운 축제 분위기 속에서 고백성사를 중심으로 증언과 질문과 답변을 통해 고백성사의 중심은 죄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를 통한 ‘기쁨의 성사’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특히 이 지역은 2차 대전 중 그녀를 강간하려던 소련군에 살해된 복자 안나 콜레사로바와 연결된 곳이다. 순결을 지키기 위해 16살에 세상을 떠난 젊은 여성의 출생지이자 무덤은 슬로바키아 젊은이들의 순례지며 평화의 장소였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연설도 2018년 이곳에서 열린 복자 안나 콜레사로바 시복식이 연설의 배경이 되었다. 교종의 연설에 앞서 코시체 대교구장 베르나르 보베르 대주교 환영인사가 있었다. 그는 “오늘은 우리 삶의 강화와 격려의 순간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특히 젊은이들은 이 시대의 묘한 혼란 속에 살고 있는데 이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코시체 대주교의 인사가 끝난 후 교종의 연설은 몇몇 젊은이의 간증과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코시체 신학교에서 종교교육 전공하는 29살 학생 페트라 필로바는 화해의 성사가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다고 간증했다. 그는 “화해성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알게 된 순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자비에 이르는 길에서 어떻게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이 질문에 답하면서, 젊은이들이 ‘성난 악에’ 좌우되지 말라고 촉구했다. 교종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슬픔이나 체념과 낙담에 갇히지 마십시오. 이를 믿으면 비관주의에 걸려 늙어갑니다. 그러나 당신은 젊습니다. 오늘날에는 파괴적 세력이 너무 많고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비난하는 많은 사람 즉, 부정의 증폭자, 불만의 전문가들이 많습니다. 불평과 비관주의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들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주님은 슬픔과 희생을 미워하십니다. 우리는 얼굴을 땅에 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과 타인과 사회를 바라보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좌절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럴 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확실한 치료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에게 말한 것, 즉 화해의 성사입니다. 하느님 자비에 이르는 길에서 장애를 극복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의미하며, 고백의 섬세한 열쇠를 만지고 종종 굴욕과 형벌의 측면에 가려지는 자비와 하느님 보살핌의 가치를 조명하는 것입니다. 대부분 "고백하러 갈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라고 물으면 대부분 ”죄에 대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에게 묻습니다. 죄가 정말 고백의 중심입니까? 하느님은 당신이 당신 자신의 죄 또는 그분의 징벌을 생각하면서 그분께 접근하기를 원하십니까? 중심이 무엇입니까, 죄입니까, 아니면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입니까? 우리는 자신을 낮춰야 하는 벌 받은 자로 고백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품에 안기려고 달려가는 어린아이로 고백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를 일으키시며 모든 죄를 용서하십니다. 하느님은 항상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고백 후에는 당신이 받은 용서를 기억하기 위해 잠시 머무르십시오. 마음의 평화, 내면에서 느끼는 자유를 유지하십시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용서입니다. 잃지 않도록 보관하십시오. 그리고 다음에 고백하러 갈 때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의 너무나 감미로운 포옹을 다시 받을 것입니다. 나는 결산을 위해 재판관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치유해 주시는 예수님께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백의 첫째 자리’를 하느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이 화해성사의 주인이시라면 모든 것이 아름다워지고 고백은 기쁨의 성사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판단이 아닌 기쁨입니다. 그리고 화해의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들이 자비로워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코 호기심을 갖지도, 심문관 노릇도 하지 말고, 아버지의 용서를 베푸는 형제들, 아버지의 포옹에 동행하는 형제들이어야 합니다. 어쨌든 고백하러 가는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좋은 일입니다. 당신이 부끄러워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한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수치심은 좋은 징조이지만, 여느 징조와 마찬가지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부끄러움에 갇히지 마십시오. 하느님은 결코 당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이 부끄러워하는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은 항상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고통을 당하는 대신 매번 우리를 용서하시며 기뻐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키울 때 처음처럼 우리를 믿으며 낙심하지 않으십니다. 낙심하는 것은 우리지만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죄인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아이들로 봅니다. 하느님은 잘못된 사람들을 보지 않고 사랑하는 아이들을 봅니다. 어쩌면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지만 하느님은 더 많은 연민과 부드러움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고백소에 갈 때마다 절대 잊지 마십시오. 천국에서는 축하 행사가 있습니다. 땅에서도 그러하기를 바랍니다!

피터 레삭은 생태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라우다토시’ 회사 젊은 관리자 주즈카와 결혼했다. 그는 간증에서 복자 안나 콜레사로바 무덤 순례 순간을 회상했다. "저는 복자 안나 덕분에 우리 관계에서 순결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이해했으며 결혼할 때까지 그것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순결한 사랑의 가치를 믿으라고 어떻게 촉구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했다. 이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종은 “사랑은 인생에서 가장 큰 꿈이지만 값싼 꿈이 아닙니다. 아름답지만 인생의 모든 위대한 일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이를 위해 새로운 눈, 외모에 속지 않는 눈이 필요합니다. 친구 여러분, 사랑을 단순하게 여기지 맙시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즉시 갖는 것이 아니며, 일회용 논리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충실함, 선물, 책임입니다. 오늘날의 독창성과 진정한 혁명은 임시의 문화에 반항하는 것, 본능을 초월하는 것, 순간을 초월하는 것, 평생을 자신을 다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계를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평생의 비즈니스로 만들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시선을 한량없는 사랑과 측량없는 증거인 십자가에 돌릴 것을 권고합니다. 생각해 보면 위대한 이야기에는 항상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모험, 영웅심입니다. 이들은 항상 함께 갑니다. 삶을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사랑과 영웅심 모두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십자가를 바라보며, 무한한 사랑과 자신의 생명을 끝까지 바칠 수 있는 용기가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사랑의 여주인공 성모님이 계십니다. 높은 목표를 목표로 하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나날이 연속극 에피소드처럼 흐르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는 젊은이들에게 가족 형성에 두려움 없이, 자녀를 낳고 교육하는 꿈을 꾸라고 초대합니다. 사랑을 꿈꾸면 특수효과를 믿지 않고 각자가 특별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은 선물이며 인생을 선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사회, 가난한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외모와 패션을 넘어 아름다움을 꿈꿉니다. 당신은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고 교육하며 모든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삶을 꿈꾸며 당신의 나약함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환영하고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꿈을 꾸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가진 꿈은 우리가 원하는 삶을 말해 줍니다. 큰 꿈은 강력한 자동차, 세련된 드레스 또는 화려한 휴가가 아닙니다.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말 대신 환상을 파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행복을 조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더 큰 기쁨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 보시기에 독특합니다. 우리는 그 독특함으로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고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 세상에 있습니다. 우리는 독특하고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사랑 이야기를 살고, 강한 선택의 대담함을 포용하고, 사랑의 놀라운 위험을 감수하기 위해 세상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믿습니까? 그리고 이것을 꿈꾸십니까? 사랑이 열매를 맺으려면 뿌리를 잊지 마십시오. 당신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부모님, 특히 조부모님, 그들은 당신을 위해 땅을 준비했습니다. 뿌리에 물을 주고, 조부모님께 가십시오. 그분들께 질문하고 시간을 내어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뿌리째 뽑힐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뛰고 서둘러 모든 일을 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의 클릭으로 사람과 사물이 화면에 나타납니다. 그들은 우리를 생성한 얼굴보다 더 친숙해집니다. 가상메시지로 가득 찬 우리는 진정한 뿌리를 잃을 위험이 있습니다. 삶과의 단절, 허공에 대한 환상은 악한 자의 유혹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명과 연결되어 땅에 굳건히 심어지기를 원하십니다. 닫히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세 자녀와 함께 연단에 오른 젊은 피터 리스카와 아내 렌카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그들의 관계도 흔들렸다고 회상했다. 열두 살에 어머니를 잃은 피터는 병에 걸려 생명의 위험에 처했다. 그러나 피터는 “예수님께서 가장 어려운 순간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라고 증언했다. 렌카도 "우리는 십자가 고통의 경험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젊은 부부들은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젊은이들이 삶에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어떻게 격려해야 합니까? 프란치스코 교종은 ‘포옹이 아름다운 동사’라고 답했다. 교종은 “포옹은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포옹할 때 우리는 자신과 삶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품에 안길 수 있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다시 희망을 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혼자 껴안을 수 없습니다. 고통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를 껴안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기쁨이 다시 태어납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예수님의 기쁨은 평화로 바뀝니다. 이 기쁨은 무엇보다 강합니다. 이를 친구들에게 보여 주면 좋겠습니다. 설교가 아닌 기쁨입니다. 말이 아닌 미소며, 형제적 친밀감입니다.”

이날 젊은이들과의 모임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마지막 기도로 끝났다. 교종은 젊은이들의 환송을 받으며 경기장을 나와 코시체 공항에 도착했다. 브라티슬라바로 출발하는 비행기는 오후 6시30분으로 1시간 후 도착한다. 내일, 9월15일 슬로바키아 순방 마지막 날은 오전 9시10분 브라티슬라바 국립 사스틴 성지에서 ‘칠고의 동정 성모 축일’ 미사를 집전한 후 공항에서 고별식을 마치고 오전 10시 현지를 출발해 오후 1시30분 브라티슬라바 국제공항에서 송별행사를 끝으로 슬로바키아를 떠나 로마로 귀환할 예정이다. 로마 참피노 공항 도착은 오후 3시30분으로 예정되어 있다.

 

“십자가는 상징이 아닌 새 생명의 근원입니다.”

교종, 슬로바키아 동부 프레쇼브에서 비잔틴 전례 미사 집전

프란치스코 교종은 9월14일 슬로바키아 사도적 순방 사흘째 첫 일정으로 슬로바키아 동부의 토리사강 계곡의 프레쇼브 스포츠 센터에서 동방가톨릭 비잔틴 예식으로 봉헌된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미사 강론에서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하고 십자가를 절대 악용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이날 미사에 참석한 3만 명이 넘는 참석자는 교종이 모빌을 타고 입장할 때 깃발을 흔들며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이날 미사는 슬로바키아에서 교종이 집전한 최초의 성 요한 크리소스톰의 비잔틴 전례로 동부 슬로바키아는 인종적으로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일부 기도는 루테니아어로, 일부는 우크라이나어, 헝가리어 및 로마어로 기도했다. 교종 강론 요지.

오늘은 교회가 십자가의 드높임을 기념하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헌신의 대상? 휘둘러야 할 문화적 정체성의 상징? 게양해야 할 깃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한낱 정치적 상징이나 종교적, 사회적 의미의 상징으로 축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 각자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십자가의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하느님이 세상의 악을 당신 자신에게 풀어주도록 내버려 두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위험을 감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고 희생함으로써 자신을 소멸시키는 약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하느님을 말로는 받아들이지만 결국 우리는 ‘승리의 하느님과 승리한 그리스도교’를 꿈꾸며, 세계 무대에 우뚝 설 것을 기대하면서 사회적 문제를 걱정합니다. 세계가 제공하는 명예와 영광의 인정에 대한 유혹입니다. 그것은 큰 유혹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됨으로써 그리스도교가 세속적이고 무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논리에 따라 십자가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일부 성인들은 그것을 알기 위해 읽어야 하는 책으로 비유했습니다. 즉 책을 사서 집에 전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광장과 교회에 있는 십자가는 하느님 앞에서 계산되지 않으며, 목에 걸거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십자가도 계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 우리 구원을 위해 그분의 열린 상처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 감동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즉, 십자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목에 십자가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십자가를 지고 있는 증인은 누구도 적으로 보지 않고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형제자매로 봅니다. 십자가의 증인은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고 현재를 불평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증인은 속임수와 세속적 권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것을 강요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작가 나탈리아 긴즈버그는 1988년 학교에서 십자가에 대한 토론 후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십자가는 차별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침묵합니다. 십자가는 인간 고통의 표시입니다. 가시관과 못은 그분의 고통을 말해 줍니다. 산꼭대기에 높이 있는 십자가는 죽음의 고독의 표시입니다. 나는 인간 운명의 의미를 강력하게 제시하는 다른 징후를 알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세계 역사의 일부입니다.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상징입니다.”

마음에 십자가가 있고 목에 십자가를 지고 있는 증인은 누구도 원수로 보지 않고 모든 사람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주신 형제자매로 봅니다. 십자가의 증인은 과거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고 현재에 대해 불평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증인은 속임수와 세속적 권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것을 강요하기를 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자신을 경건한 것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이러한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느님의 증거가 아니라 이중성의 종교가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증거는 오직 주님의 전략인 겸손한 사랑만을 추구합니다. 또한 십자가는 우리에게 승리주의 그리스도교를 열망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이곳 슬로바키아에서도 예수의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기억하십시오. 결코 십자가를 ‘정치적 상징’, ‘종교적, 사회적 중요성의 표시’로 축소하지 마십시오. 오늘 주님은 십자가의 생생한 침묵 속에서 우리 모두에게 묻고 또 당신, 당신, 당신, 나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나의 증인이 되고 싶습니까?” 나는 십자가가 게양되는 깃발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방식의 순수한 원천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승리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예수님 안에 시선을 담그는 것입니다. 여기 슬로바키아에서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이 고통을 겪고 죽었는지! 이는 그들이 오랫동안 숙고했던 예수님께 대한 사랑에서 나온 간증입니다.

죽어서도 예수님을 닮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간증할 기회가 전혀 없는 우리 시대를 생각합니다. 여기는 세계의 다른 많은 지역에서처럼 그리스도교인을 박해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간증은 세상적인 것과 평범함으로 더럽혀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십자가는 분명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슬로바키아인들이 ‘끝까지 사랑함으로써 목숨을 바친’ 단순한 사람들의 기억을 간직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영웅이며, 삶의 역사를 바꾸는 ‘일상의 영웅’입니다. 증인은 실제로 또 다른 증인을 생성합니다. 이와 같이 믿음이 전파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능력으로가 아닌 십자가의 지혜와 구조가 담긴 증언으로 말입니다.

한편 프란치스코 교종은 프레쇼브 스포츠 스타디움 비잔틴 미사를 집전하고 점심식사와 다음 젊은이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코시체로 가기 전 프레쇼브에서 주교들을 위한 점심을 준비하고 있는 예수회 피정센터에 들려 예수회원들과 요리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섰다. 교종은 소스 가득한 그릇 앞에서 음식에 축복하면서 요리사 그룹과 주교들과 대화를 나눴다.


장기풍(스테파노)
전 <평화신문> 미주지사 주간
2006년 은퇴. 현재 뉴욕에 사는 재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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