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프로이드가 말하기를, “예술가는 주어진 현실생활에 거의 부적합할 정도의 감수성을 지녔기 때문에 사회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어 그 자신만의 세계로 도취해 빠지거나 깊숙이 침잠하지만, 그 도취와 침잠으로 현실세계를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현실 위에 새로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다”고 한다.

반 고흐展을 보러 갔다.
<글방집> 아이들-나와 함께 책읽기 공부를 하는 아이 둘을 데리고서.

덕수궁 정문에서 수문장 교체식을 구경하고 법원길을 걸어올라가니 좌우로 사람들이 그득했다. 강남역이나 잠실역을 방불케 하는 인파를 보며, 고흐전이 지난 전시회 중 가장 인기를 끈 샤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는 걸 눈으로 확인했다. 티켓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며 고흐의 심정을 헤아려 보았다. 몸은 이미 흙으로 돌아갔으나 그 영혼이 바람에 실려 초봄, 한국의 서울시립미술관을 훑어본다면 어떤 감회에 젖어들까 하는.

슬며시 한 예술가의 지독한 불행을 구경하러 나온 것만 같아 숨고 싶었다. 살아서는 화상을 하는 친척 아저씨가 격려 삼아 헐값에 그림 하나를 사준 것 밖에 그는 한 점의 그림도 팔아보지 못했다. 모두가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2008년 귓가를 스치는 봄바람은 고흐의 넋이 스며들어 미술관을 향하는 사람들은 신 들린듯 들떠 있었다.

"뭐 사주실 꺼예요? 먹고 봐요? 아 목말라! 언제 들어가요?"


늘어선 긴 줄을 보며 불평을 털어놓는 아이들에게 오뎅, 엿을 사먹이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다 입장했다. 그의 작품들은 너무 많은 인파에 둘러싸여 있었다. 톱스타가 팬들에게 둘러싸이듯이. 나는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아다니며 듬성듬성 대충 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꼼꼼히 그림을 보려면 미술관 안에서 아이들의 분통이 터져버릴 여건이었다.

그림 속 인물들은 그가 살던 집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우체부, 면직공, 버터를 만드는 이웃집 아줌마, 뭔가 깊은 절망에 빠진 노인과 이이들, 일하는 여자와 남자, 들판의 나무와 거리, 별이 쏟아지는 강가와 시골길, 그가 살던 집 그리고 자화상... 고흐는 그저 주변의 인물들을 그려나갔다. 조금 상류 레벨이래야 그가 입원한 정신병원의 의사 정도였다.

그의 그림을 전문가들은 여러 시기로 나누지만 보통 사람의 눈에는 북유럽의 칙칙한 색채를 드러내는 초기의 그림들과 프랑스 남부 엑쌍 프로방스의 쏟아지는 노란 햇빛과 청색의 하늘을 그린 둘로 확연히 나뉜다.

그냥 집에서 고흐 그림책이나 볼 걸 하는 후회를 거듭하며, 나는 아이들을 잃어버릴까 지켜보느라 그림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머리 에서 그의 한 생애가 조용히 흘러갔다.

고흐의 평전과 편지글을 보면, 그가 유난히 그리스도의 정신에 도취되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벨기에 보리나주 지방의 탄광지대에서 전도사로 일하던 이십대 초반의 고흐는 지상에 내려온 예수의 삶을 실현하려는 열기에 차 있었다. 열악하기 짝이 없는 탄광마을에서 고흐는 마을을 지배하는 부조리한 의사결정 구조를 그리스도라면 마땅히 이렇게 했으리라는 기준으로 바꿔놓으려 한다. 당연히 상상하기 어려운 반감이 밀어닥쳤고 결국 그는 전도사직을 박탈당한다. 그가 애지중지 보호하고자 했던 걸인들이나 광부들조차 그의 지나친(?) 박애주의가 왠지 그들이 보아온 목사나 전도사와는 달라 보였는지 거부감을 드러낸다. 먹고 입을 것을 모두 마을의 궁핍한 이들에게 주고 고흐가 추위와 굶주림에 죽어가자, 어이없게도 마을 사람들은 그를 피한다. 그런 성직자 그런 예수는 무능력해 보이고 폼이 나지 않아서일까? 인간의 이중성... 인간의 원죄가 고스란히 토해지는 광경을 경험하며 고흐는 성직자의 길을 단념하고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접어든다.

아직 산업혁명의 세례를 받지 못한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등 곳곳을 전전하며 고흐는 땅에서 몸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을 그렸다. 당시 아시아보다 훨씬 생산력이 떨어지는 토양에 생명을 기댄 사람들은 비참했다. 그러다 그림의 본 고장 파리로 간다. 파리에서 당대 인상주의 화가들과 지내며 그림을 그리지만 큰 특징 없이 흘러간 시간이었다. 고갱과 만나 우정을 쌓은 흔적만이 뚜렷할 뿐. 그리고 엑쌍 프로방스 지방으로 내려간다. 지중해의 햇빛 쏟아지는 노란색을 고흐는 여기서 만난다.

여름날 남불(南佛)의 태양빛은
그 빛을 생명의 원천으로 삼는 존재들을 태워죽일 듯 작열한다.

짧은 붓터치로 회오리치듯 그려진 나무와 꽃들은 문득 까뮈의 <이방인>에서 총을 겨누던 뫼르소를 떠오르게 한다. 생명의 한 껍질을 벗겨보면 어김없이 죽음과 입맞추고 있는 아이러니-그 모순을 안고 있는 자연을 고흐는 여러 잔의 압쌍트를 마신듯 흐드러져 비척거리는 형태로 그려놓았다. 생과 사, 하늘과 땅이 에너지를 교류하듯 빙글빙글 돌아가는 느낌의 그림들은 규격의 틀을 지닌 입자형의 세계관이 아니라 파동으로 흐름을 이루는 생명체의 근원을 그려놓은 것만 같다. 그의 사후 속속 발표된 양자역학의 논문들은 그의 그림을 참고로 하며 소립자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예술가의 직관의 세계는 과학적 세계를 예견하고 있었다.

전시회를 먼저 보고 온 친구가 고흐의 출신 배경을 보면 집안도 유복했고 뭐 별다른 고통의 실마리를 감지하지 못하겠던데 왜 그는 예술가의 고통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는지 이해가 안가더라는 얘기를 했다. 그의 고통의 근원이 무엇인가, 의아한 관람객이 그 친구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난한 건 그만이 아니었다. 그가 꼭 가난한 것도 아니었고(?).

언제부터 고흐가 병증(病症)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는 간질병을 앓고 있었다.

남불(南佛)에서의 어느 날, 그는 발작이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시간을 보낸다. 그 간격이 너무 길어져 그는 혹시 자신이 병에서 놓여난 것이 아닐까 하여 혼자 기뻐서 흥분한다. 그런 기미를 감추고 그는 카페에서 압상트를 시켜 거푸 마시고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발작에서 벗어나 온전한 정신으로 자기 시간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음을 자축했던 것이다. 그러나 느긋한 행복은 술집에서 집으로 도착하기 전에 끝이 났다. 발작이 일어나 그를 농로의 구렁으로 고꾸라지게 만들었다.

달레 신부님이 집필하신 <조선천주교회사>를 보면 신부님이 간질병을 앓고 계셨다는 기록이 있다. 발작 사이사이, 조선에서 보내오는 자료들을 취합하여 교회사를 완성하신다. 한국천주교회의 역사를 훑어보려면 누구든 먼저 집어드는 책이 바로 달레 신부님이 쓰신 책이다.

작가 도스토옙프스키가 간질병을 앓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지병이 소설작품들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어쩌면 작가 자신도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공연히 그의 고통에 시선을 집중해서 작품분석에 균형을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 다만, 살아가는 순간순간 발작으로 잠시 동안의 죽음을 경험했을 세 사람의 심정을 생각하면 그들이 남몰래 흘리는 눈물이 많았을 것 같아 숙연해진다.

세 사람의 병이 같은 간질증상이어서 나란히 적어보았을 뿐, 이 고통이 그들의 작품을 물들였다는 이야기를 하긴 어렵다. 다만 느닷없는 발작이 일으킨무의식의 순간들을 반추하며 그들은 건강한 사람들보다 좀 더 삶 너머의 영원을 응시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뿐이다.

덧붙이자면 세 사람 모두 역사속의 예수와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일생을 건 관심을 보였다. 그 마음의 기울어짐이 다가오는 고통을 외면하거나 다른 이들에게로 돌리지 않고 스스로 감당하였을 것이고 그로 인해 그들의 인생은 언뜻 예수를 닮아 보인다. 또한 어제 만난 고흐는 그의 선배 밀레를 아버지처럼 존경했다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은 어디서나

전시실 안은 너무 많은 인파로 인해 제대로 그림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 엄마들의 욕심과 콤플렉스로 끌려온 아이들이 많았다. 나도 그 중의 하나였고. 전시실에는 고흐의 유명한 그림들만으로 채워진 화집이나 매스컴의 뉴스에서 보지 못한, 낯선 (습작으로 여겨지는) 그림들이 많았다. 천재 화가의 진면목을 보는 기분이었다. 에디슨도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1800번이나 실패하는 실험을 했다고 한다.

고흐 作 <면직공>










 

 

 

 

 

 

 

 


 

 

 

 


산업혁명 전(前)의 유럽은 동아시아와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두 지역이 산업혁명을 거쳐 21세기에 들어선 지금 또 한 국가 안의 다른 도시를 가는 것만큼이나 비슷하다. 지상에서 삶을 꾸려가는 모양새는 별 다를 게 없나보다. 잠시 새로운 동력이 조금 다르게 발전하는 양상을 보여주었을 뿐.

19세기 후반, 고흐가 살던 북유럽 네덜란드의 농가들은 김정희 그림 <세한도>에서 보여주는 소나무가 있는 집과 다를 바 없었고, 밭에서 감자를 캐는 아줌마들은 19세기 세도정치의 그늘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 하던 우리 할머니들이 밭에서 일하던 모습과 겹친다.

고흐의 그림은 북유럽의 척박한 토양과 그들의 삶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덴마크를 배경으로 했던 영화 <정복자 펠레>의 주인공 아버지와 아들은 고흐의 그림이 그려지던 시기의 인물들이다. 더 나은 삶을 찾아 헤맸지만 늙고 병든 아버지, 아버지는 힘세고 당당하다는 자부심을 갖고 존경하던 어린 펠레는 어느 날 작업감독에게 비굴하게 의지하는 아버지를 훔쳐보다 침대로 돌아와 몸부림치며 운다. 부모의 나약함을 목격하는 순간 아이들은 어른이 된다. 그 부자(父子)로 착각을 일으킬만한 사람들을 고흐의 그림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찐감자 냄새가 나는 그림도 있었다

그런 허무한 한 사람의 일생이 그림으로 남겨져 한 폭 한 폭이 그의 신주(神主)로 그의 시신이 누운 무덤으로 다가오며 도수 높은 술을 마신듯 작품의 기운이 실핏줄까지 전해졌다.

선생님 때문에 생고생을 했다는 표정으로 어서 먹을 것을 사 내라는 아이들을 데리고 근처 음식점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주고 그 어머니들과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는데 한 녀석이 일기를 썼다며 보여주었다. 고흐전에 다녀온 감상을 적으며, "...찐감자 냄새가 나는 그림도 있었다"고 써놓았다. 초등학교 1학년 남자아이가.

고흐 그림의 핵심을 아이가 파악한 것만 같아 나는 흥분을 느꼈다. 감자 같은, 찐감자 냄새를 풍기는 땅의 사람들을 그린 화가를 아이는 알게 된 것이다.

프로이드의 예술가에 대한 평은 온당한 것인지 고흐는 예술가로서 당당히 부활하고 있었다. 고흐의 이름은 사람들을 불러들여 정동 시립미술관에서 시작되어 꼬불꼬불 지그재그를 그리며 법원골목을 꽉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한 편린이 초등학생 아이의 일기장 속에서 그의 부활을 증명하고 있었다.

/이규원 2008-03-10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