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영화 <시민 케인>은 영화학도들의 교과서이다. 영화는 언론재벌 찰스 포터 케인이 죽으면서 남긴 '로즈버드'라는 말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로즈버드'의 의미가 명료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케인의 유품을 정리하다 그가 유년시절 타고 놀던 썰매 밑바닥에 '로즈버드'라고 새겨진 문구를 발견한다. 케인이 잠시 어머니와 행복하게 지내던 때에 타던 썰매였다.

유년 시절, 같이 놀던 친구의 할머니는 무당이었다.

친구 집에서 놀다보면 점을 보러 오는 이도 많았고, 늘 떡이 있었던 걸 보면 굿을 많이 맡았던 것 같다. 친구네는 딸만 다섯을 둔 딸부자집이었다. 오매불망 아들을 원하여 그 어머니가 나이 쉰에 아이를 낳았건만 그 아기도 여자아이였다. 그런 경우, 옛날 시어머니들은 며느리를 구박하며 비난하는 게 다반사였건만, 이 집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 할머니는 나이든 산모를 걱정하며 미역국을 끓였고 스산한 집안 분위기에 기가 꺽인 어린 손녀들을 위해, 텃밭에서 자주감자를 캐다 밥솥에 넣어 밥그릇마다 한두 개씩 넣어 아이들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초여름, 친구집의 어수선함에도 불구하고 버릇대로 놀러가면 할머니는 내 밥 속에도 어김없이 자주감자를 넣어주었다.

우리 부모님은 서로 못마땅해 하시며 사이가 좋지 않으셨다. 두 분 사이에서 일어나는 불안은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할 것을 들고 친구집으로 갔던 기억이 많다. 친구가 없을 경우에도 그냥 그 집 마루에 누워 숙제를 하고 있으면, 무당 할머니는 어느 집 굿을 하고 얻어온 커다란 떡을 한 덩어리 내 옆에 가져다주시곤 했다. 무당 할머니는 민간신앙을 전승하신 분이건만, 돌이켜 추억을 펼쳐보면 유가(儒家)의 어질 인(仁)이 인격 속으로 스며든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탓인지 중고등학교에 다니며 한국소설에서 만나는 무당들의 혼잡한 남녀관계나 운명에 사로잡힌 이미지는 낯설었다.

후일, 대학에서 예수회 키스터 신부님이 쓰신 한국의 굿에 대한 글과 국문과 교수님의 무속에 대한 책을 읽으며, 나는 귀신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늘 귀신들을 불러들이고 떠나보내시던 친구 할머니를 생각했다. 지상에서 다하지 못한 생(生)에 대한 미련에, 홀홀 영원으로 떠나지 못하는 방황하는 영혼들을 불러내 산 사람들과 화해를 주선하는 굿마당이 용서(容恕) 장(場)으로 여겨져 아름다웠다.

이승에서 저승의 삶을 살아가신 분들

과거, 연륜이라는 권위가 살아있어 노인들이 안방을 차지하며 집안 대소사에 결정을 내리던 때가 가끔은 그리워진다. 연륜, 종교, 그 외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떠한 것도 몰가치한 것으로 내다버리려는 요즈음, 우리는 현세만을 의식하는 눈먼 자가 되어간다. '현세적'이라는 우리 민족의 유전자가 양성인자로 드러나는 때인 것만 같다.

아는 감독 한 분이 자신은 나중에 손자 손녀를 직접 키우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자녀들이 커가는 과정을 살펴줄 여유가 없었던 게 아쉽다면서. 요즘은 조부모 세대가 아이를 키우는 걸 그리 좋게 여기진 않는다. 아이들 학습정보에 느리고, 과거의 메카니즘에 맞추어 아이를 길러내어 좀 뒤처지게 만든다는 게 불만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부모보다 더 고양된 사랑을 전달해줄 수 있는 분들이 바로 조부모님들일 것이다. 구체적인 기능이야 좀 허술하더라도.

외할아버지 김시헌 선생은 청양 장곡사에서 잠시 불도를 닦으셨다고 한다. 어쩌다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셨는지 모르지만, 외할아버지가 우리집에 오시면 나 스스로 그리했는지 어머니의 부탁이었는지 외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외갓집에 가서 지내곤 했다. '탑골'이라는 동네이름 그대로 그 곳은 불교의 세계였다. 아침마다 외할아버지와 집근처 냇물로 세수를 하러 가면, 할아버지는 바위에 앉아 잠시 동안 말없이 눈을 감고 계셨다.

외조부 김시헌 선생도 당신의 자녀들을 키우면서는 터득하지 못했거나 전달할 여유가 없던 따스한 감정을 손자 세대를 향해서는 많이 베풀고 떠나셨다. 나이가 드시며 세월 속에서 건져올린 보물이었으리라.

새벽에 들일을 나갔다 들어오시며 들꽃이나 산열매들을 따다 머리맡에 놔주면 아침부터 그것을 먹어 치워 입안이 산열매 빛깔로 물들었던 추억, 들꽃을 손에 쥐고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던 길을 냇물을 따라 달려가던 일, <박씨전>을 구수하게 들려주시며 세상의 보이는 것들 너머에 인간의 삶을 주관하는 섭리의 그물망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케 해주던 순간들은 늘 사는 일에 정신이 없던 부모님을 통해서는 감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부모님들이 싸우던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집에 들어선 할아버지는 어떤 말씀도 없이 내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느 고즈넉한 산사였다. 먼 길을 걷느라 지쳐 잠이 들어 버렸지만, 외조부 김시헌 선생의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쳤을 자식의 안위와 손자들의 앞날을, 늙어가는 자신은 감당치 못한 채 부처님께 부탁하던 밤이었음을 돌이켜 새겨본다.

80년대, 귀신들린 책으로 불리던 <장길산>을 읽다, 머릿속이 갈라지는 충격을 받았던 장면이 있었다. 그 중 하나, 관노비였던 길산의 생부 생모가 도망쳐 임진강 나루에서 만나기로 한다. 만삭이 된 생모가 겨울바람을 맞으며 나루터에서 기다리지만, 끝내 길산의 생부는 오지 않았다. 임진나루 포졸들의 눈을 피하느라, 심신이 지쳐버린 데다 오지 않는 길산의 생부를 기다리다 그만 그녀는 들판에서(?) 아이를 낳는다. 마침 지나던 해주 광대 우두머리가 핏덩어리 길산을 받게 되고 길산의 생모는 그 자리에서 죽는다. 알고보니, 길산의 생부는 먼저 임진나루에 도착해 길산의 생모를 기다리다 쫓기는 관노비의 한 생을 홀연히 묘향산 보현사에 던져버린 터였다.

외조부 김시헌 선생, 무당할머니, 그리고 소설 속 길산의 생부는 세상의 가치와 인간관계의 어지러움에 가타부타하지 않으셨다. 망연히 애지중지하던 모든 걸 이승에 버리고 저승으로 가버린듯, 이미 이승에서 저승의 삶을 살아가신 분들이었다. 버스를 타고가다 혹은 친구들과 차를 마시다, 느닷없이 눈물이 솟구치는 순간이 있다. 이 세상과의 만남은 이 분들과의 만남이었는데 그 만남의 유한성에 회한이 스며드는 순간들이다.

사랑-생명에 대한 경외가 어디서 생성되어 우리들 숨결을 타고 끊김없이 흐르는지 헤아리기 어렵다. 하느님이 부어주신 것이라고 단문으로 설명하면 중간 과정이 너무 생략된 느낌이 들고... .

소금 같은 정(情)을 기꺼이 손주들을 향해 풀어내신

친구 할머니의 초반부의 삶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분이 어떤 과정을 겪고 무당이 되었는지 짐작할 뿐이다. 다만, 당신의 손녀들만 해도 다섯이나 주렁주렁한데 남의 집 아이까지 싫다는 내색 없이 아껴주는 마음이 저절로 솟아난 건 아닐 것이라는 추측뿐. 외할아버지 김시헌 선생 역시, 어머니에게 건네들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편집해보면 오사카에서 어느 일본인 밑에서 일 하느라 온갖 설움을 당하시며 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와 형제들에게 논을 사주었다. 그리고 당신은 청양의 구봉광산에서 금을 캐다 갱도가 무너져 고생을 하신 적도 있었다. 분야는 다르지만 열심히 사셨던 분들이다. 시대가 고통스러웠고 개인적인 입지도 열악했으리라. 그러나 두 분은 고달픈 여정을 걷다 당신들도 어디서 생겨난지 모르는 소금 같은 정(情)을 기꺼이 손주들을 향해 풀어내신 것이다.

구약성경 <호세아 書>속의 아내 고멜은 유흥가에서 지내던 날들이 그리워 정결하고 성실한 남편 호세아 곁을 답답해한다. 그래서 감각적인 사랑이 명멸하는 유흥가가 그리워 연거푸 가출을 실행한다. 그러면 하느님은 호세아에게 아내를 찾아 집에 데려오라고 명하신다. 그 명에 따라 호세아는 바람난 아내를 찾아 분냄새 그득한 유흥가를 헤맨다. 호세아서는 물질로 구성된 쾌락의 세상만이 전부인 양 살아가는 사람(바람난 고멜)과 그런 우리들을 부르시는 하느님과의 숨바꼭질 과정을 보여준다.

손가락을 펴면 다섯 손가락이 다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실존의 밤, 하느님은 무당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김시헌 선생을 통해 나를 부르셨던 것일까...?

자주감자를 밥 속에 넣어 생을 보랏빛으로 물들여 주었다

친구의 아버지-무당 할머니의 아들은 일제시대 일본에 징용갔다 돌아오며 큰 병을 얻었다. 그래서 그 분은 끝내 집안을 벗어나지 못한 채, 사람노릇(?)하기를 되찾지 못했다. 무당 할머니는 부실한 아들을 대신하여 며느리와 다섯 손녀를 금쪽 같이 돌보았는지 모른다. 기집애들, 쓸데없는 조갑지들, 밥이나 축내는 것들... 벼라별 별칭을 붙이며 아들은 쌀밥을 딸들에겐 보리밥을 주며 여자들을 허술히 대하던 시절이었다. 이 황폐한 자리에서 할머니는 자신의 숙명을 거룩하게 완성하는 마지막 굿마당인양, 어린 우리들에게 초여름 저녁마다 자주감자를 밥 속에 넣어 생을 보랏빛으로 물들여 주었다. 그 굿의 효과는 지금도 발휘되어 자주감자를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9일이 지나자, 어머닌 허전함을 달래보려 이 무당할머니를 찾아가 점을 보셨다. 어떤 모습으로 환생하셨는지 알고 싶으셨던가 보다. 밥상 위에다 하얀 쌀알을 던지곤 짝을 맞춰 헤아리다, 주문을 외우며 혼백을 불러본 무당 할머니는 외할아버지 김시헌 선생이 수국꽃으로 환생했다고 말해주었다. 초여름 장독대나 우물가에서 피어나는 하얀 꽃덩어리가 그 날 이후 어머니와 내겐 특별한 꽃이 되었다.

자주감자와 수국꽃에 대한 추억은 세상에 던져져 불쑥불쑥 휘몰아치는 부조리의 아픔을 겪어야만 하는 현실을 감당하는 에너지가 되어준다. 누군가에게 나 자신이 내 이름이 그런 마법을 일으키는 꿈을 꿔본다. 그야말로 대망(大望)이다.


감자씨는 묵은 감자, 칼로 썰어 심는다.
토막토막 자른 자리, 재를 묻혀 심는다.

밭 가득 심고 나면, 날 저물어 달밤
감자는 아픈 몸, 흙을 덮고 자네.

오다가 돌아보면 훤한 밭골에
달빛이 내려와 입 맞춰 주네.

-이원수 <씨감자>

 

/이규원 2008-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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