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의 나는 분명히 욜라 즐거운 육아일기를 썼다. 실은 매우 괴로운 처지를 반어적으로 나타낸 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아이를 셋 키우게 되었는데 아이는 내 인생의 침입자라고 해도 맞는 말이었다. 순화하면 손님 정도일까. 물론 미화하면 선물이나 축복이 된다. 선물이나 축복이면 답이 없고, 손님이라고 해도 그 손님은 새로운 세상이 태어난 것이라서 자기 생각밖에 안 한다. 저 밖에 없다. 나를 변방으로 밀어내고 주인이 되고자 한다. 그 손님 눈치를 보고 쩔쩔매다 주인 자리를 내주어야 하나 고민도 했고, 다 함께 잘 살아 보자고 평화협정을 맺기도 했지만 결국 그들은 현재 나의 큰 부분이 되었다. 엄마가 되면 당연하다지만, 잘 모르고 겪는 일이다. 아이를 낳기 훨씬 전에 이런 희한한 상황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면 방어 내지 준비를 했을 텐데, 진짜 몰랐다. 대비고 뭐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신이 그러도록 길을 터주었다고 할 밖에. 신은 사람의 이성을 살짝 탈색한 다음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 자기 앞의 현실을 선명하게 보여 주는 방식으로 인간이 세대를 잇길 조치해 놓은 것이다.

나는 세 번의 출산과 육아를 하면서 줄곧 뿌연 세상을 살다가 가끔 정신이 들었다. 그럴 때면, 나의 이곳이 나의 상상력이 펼친 세계-이를테면, '만약에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어땠을까?'와 같은 가상의 세계가 아닌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에 매우 놀라곤 했다. 수많은 길 중 하나로 온 것뿐인데, 가 보지 못한 길 중 내 길이 있는 것 같았다. 진짜 현실은 어느 순간 한 지점에 놔 두고서 이 아이들의 엄마로 임시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과거에 선택했던 수많은 길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메리와 욜라, 로가 태어나 지금까지 자라고 있는 걸 보고서도 말이다. 현실과 감각이 따로 노는 이런 일이 어찌해서 일어나는지, 나는 아직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알까? 선명히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엔 사람들은 참으로 대단하다. 그래서 어제까지는 아이였는데 오늘 갑자기 어른이 되고, 내게도 엄마가 있는데 나도 엄마가 되곤 하는 것도 그러려니 하는 거다. 약간 어리둥절하지만 결국엔 그러려니 하면서 잘 살아간다. 되도록 기뻐하고, 감사하며 현실에 서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인간적 순응이 생각난다. 부럽기도 하고 거룩해 보이기도 하다.

동네 봄 소풍 중인 메리, 로, 욜라. ⓒ김혜율
동네 봄 소풍 중인 메리, 로, 욜라. ⓒ김혜율

요즘엔 이전과는 달리 육아에서 많이 벗어났다. 단순해졌다. 배꼽이 떨어지느냐 마느냐 노심초사했던 일, 젖 먹고 난 아이 트림할 때까지 등을 쓸어 주느라 집중했던 일, 또래들이 이유식을 120밀리 먹는데 내 아이는 200밀리를 먹어 치운다고 기뻐했던 일, 아이 엉덩이 피부를 최선으로 보호해 주며 흡수력과 디자인이 뛰어난 천 기저귀를 찾기 위해 몇 날을 고민했던 일, 유치원 친구가 내 아이더러 떡볶이 사 먹게 500원을 갖고 오라 했다는 말에 충격받았던 일 등도 다 옛날 얘기다. 이제는 유치원 학부모 모임에서 아이들의 이모저모를 거론하며 같이 심각해지고 고민하며 말 많던 그런 일이 시시하게 느껴진다. 물론 나는 이제 그렇지 않다는 것뿐 그들의 고민은 무게가 상당하겠지. 선배님들이 그랬듯 몇 년간의 육아로 나도 무엇을 내려놓게 된 것일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 같은데 그것을 빼고 이야기하자니 그것대로 허전하고 의미 없는 이상한 시절.

7년이 넘는 시간 동안 휴직을 하며 아이들과 보낸 일은 참 잘한 일이다. 일했으면 뭐 했을 거야. 일만 했겠지. 돈 벌면 뭐 할거야. 더 많이 썼겠지. 뿌연 혼돈의 세상 속에서 그날그날의 무게감을 갖고 헤맸던 일은 그때 아니면 언제 해 보았겠나 싶다. 복직을 해서 일과 육아를 병행한지도 어언 3년차다. 막상 해 보니 일과 육아에 베테랑이란 또 다른 신화인 듯하고, 일도 육아도 근근이 아마추어같이 하며 살고 있다. 맘만 먹으면 더 잘할 수 있겠지만, 내가 잘해야 하는 것은 희미하고 뿌연 그 세상을 좀 더 들여다보는 일이다. 아이들과 소풍을 가고, 잠자리에 같이 누워 노래를 부르는 일.

소풍 가는 길에 개울물 얼음깨기 중. ⓒ김혜율
소풍 가는 길에 개울물 얼음깨기 중. ⓒ김혜율

세상 물정은 매우 가파르고 분주하다. 메리가 올해로 5학년에, 욜라는 3학년으로 올라가고, 로가 7살이니, 아이들이 꽤 나이를 먹었으니 이제는 공부를 봐 줘야 된다고 주변에선 다 그런다. 내 친동생도 주변에 나처럼 손 놓고 지내는 엄마는 없다며, 왜 아이에게 선행을 안 시키냐, 영어수학 특별 수업 안 시키고 어쩔거냐고 한다. 또 어떤 이는 메리가 피아노를 곧잘 친다면 초등학교 3학년, 적어도 4학년에는 피아노 전공으로 진로를 결정하고 본격적으로 준비해야지 안그러면 피아노 전공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지방이라서 깜깜이라고. 그런데 나는 메리가 영어수학 학원 보내 달라고 졸라도 놀 시간이 부족할까 봐 겁나고. 피아노 전공을 위해 다른 거 안 하고 하루에 10시간 이상 레슨받아 가며 피나게 피아노만 치면 딴 거 재밌는 거 못할까 봐 싫었다.

애들이 영 바보는 아닌 것 같으니 자기들이 하고자 한다면 하면 되지 엄마가 앞서서 끌어 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애들이 잘되길 바라고 그래서 아이들을 너무 닥달하지 않으려고 한다. 심심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늘어진 시계처럼 소파에 반쯤 누워 걸쳐있거나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몸을 비틀고 괴성을 지르는 모습을 보면 매우 흡족하다. 벽지 무늬를 3D로 떠올려 보다 가끔은, 햇살을, 텅 빈 마당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피어오르는 먼지 입자를 보기를 바란다.

올해 5학년이 된 메리, 3학년이 된 욜라, 7살 된 로. ⓒ김혜율
올해 5학년이 된 메리, 3학년이 된 욜라, 7살 된 로. ⓒ김혜율

아이들이 별 탈 없이 잘 커 주고 있어서 다행이다. 아이 키우는 것은 신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도저히 자기 힘만으로 자기 의지만으로 아이들이 크는 것이 아니다. 메리는 크면 클수록 좋아지고 있다. 자기 생각을 가지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나처럼 진지한 엄마 밑에서 메리처럼 유쾌하고 단순하게 즐거운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이 놀랍다. 반면 욜라는 커 갈수록 묵직해지는데, 자신만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말수가 적고 신비적인데 선한 품성이 신뢰가 가는 아이다. 중간에 끼여서 상처를 받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이부분을 잘 다독이는 게 내 몫인 것 같다. 로는 어릴 때 욜라처럼 세상을 좋게 바라보고 있다. 내가 저 귀여워하는 줄 안다. 막내다운 천진난만함으로 아마 앞으로 세상을 제 방식대로 멋지게 살아갈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 아이들 곁에서 잘 살아가려고 애쓸 것이다. 그중 하나가 아이들에 대한 기록일 터.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인터넷 지면을 통해 다시 육아일기를 연재할 수 있게 되어서 영광이고 감사한 마음이다. 앞으로 글을 좀 성실하게 쓰고 싶고, 그 글이 나를 위로하고 좀 더 나아가 즐거운 일이 되기를 바란다.

김혜율(아녜스)
(학교에서건 어디에서건) 애 키우는 거 제대로 배운 바 없이 얼떨결에 메리, 욜라, 로 세 아이를 낳고 제 요량껏 키우며 나날이 감동, 좌절, 희망, 이성 잃음, 도 닦음을 무한반복 중인 엄마. 워킹맘이다. 다행히 본인과 여러 모로 비슷한 남편하고 죽이 맞아 대체로 즉흥적이고 걱정 없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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