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원의 초록별 이야기]

대선주자들의 정책 중의 핵심은 빵을 무한정 맘 놓고 먹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경제만능, 경제통이 자신임을 밝히는 데 있는 것 같다. 특히 개신교의 장로님이신 한 분이 더 빵 문제의 해결사로 자처하신다. 지난 대선에서는 청렴결백하기가 대쪽 같다는 분과 민중의 대표로 지목되는 분이 대결하다, 청렴결백한 분이 살고 있는 호화 빌라가 문제가 되면서 낙마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올 해는 대선 후보나 유권자 모두가 경제에 시선이 꽂혀있다. 도덕성 여부는 지난 대선만큼 중요변수가 아닌 듯하다.

힐튼호텔에서의 하룻밤이나, 떠돌며 친구 집에 붙여 자던 하루를 별 차이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요즘, 건강에 자신이 없어지며 미혹된다, 지상의 양식에. '무얼까? 단군 이래 가장 잘 먹고 잘 사는 요즘에 더욱 경제를 부르짖고 그에 응답하는 이가 많으니... . 정말, 경제개발에 한 몫 했던 분을 뽑는다면 이태백의 상당수가 월수 백만 원을 받는 정규직에 취직이 될 수 있을까...? '

청년시절, 지구에서 달나라까지 이어지는 다리를 놓으려, 그에 필요한 온갖 제재를 모으던 이들이 중년이 되면, 그 제재로 자신의 곳간을 짓거나 증축한다고 한다.

오랜만에, 초등학교 교사직에 있는 친구언니를 만났다. 자료를 찾으러 도서관서가 사이에서 보내던 어느 날, 나는 서가에 기대여 시집을 읽으며 눈물을 훔치는 언니를 만나게 된 것이다. 20여 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하다, 우연히 다시 만났다. 언니는 롱 펠로우의 시집 <인생예찬>을 읽고 있었다. “...말 못하고 쫓기는 소떼처럼 몰리지 말고, 삶의 장에서 싸워라. 그리하여 영웅이 되어라...”는 구절을 짚으며 자신의 삶이 말 못하고 쫒기는 소처럼 살아왔다며 눈물을 흘렸다.

소녀에서 중년여인으로 탈바꿈의 세월이 흘렀건만, 예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언니도 나도.

한때, 친구 집에 머물며 친구와 친구언니 그리고 나, 셋이서 자취생활을 했다. 친구와 나는 중학생이었고 언니는 막 대학에 입학한 처지였다. 우리 셋은 시장 모퉁이 싸구려 방에서 살았는데, 어떻게 밥을 먹고 살았는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신기할 정도로, 기본 식생활조차도 꾸려갈 수 없는 형편이었다. 어느 날 밤, 친구와 나는 저녁을 굶고 언니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늦게 돌아온 언니는, 시장에서 파는 찐빵을 사오겠으니 기다리라며 나갔다. 김이 오르는 빵을 그리며 기다리던 우리가 지쳐갈 무렵, 언니가 돌아왔다. 그런데 언니의 손에는 문고판 시집 <풀잎>만이 달랑 들려있었다.

그녀는 휘트먼은 자신의 시집을 출판해주는 곳이 없어, 브루클린의 어느 인쇄소에서 자비로 출판하여 집집마다 들고 다니며 팔았었다며 일장연설을 하였다. 그녀가 막 시장 모퉁이에서 휘트먼을 만나 빵 값을 지불하고 시집을 사오듯이. 그러나 빵을 먹지 못하는 배고픔에 친구와 나는 낯선 시인 휘트먼과 언니를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유교문화 속에서 살아온 후예답게, 언니와 친구 그리고 나는 유난히 책에 집착했다. 라면 하나를 혼자 먹을 여유가 없었던 우리는, 국수를 사다 넣어 먹으며 꼬불꼬불한 라면을 더 먹고자하였다. 더러, 라면 하나를 넣고 물을 3인분으로 붓고는 왕소금을 뿌려 라면국물을 마시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책을 사서 읽었고, 서로 돌아가며 서점에서 훔쳐오기도 하였다. OO문고에서 학원사에서 출판한 <죄와 벌>을 읽다, 나는 그냥 들고 나왔다. 새롭게 발견한 도스토예프스키를 잠시라도 내 곁에서 멀리 두고 있을 수가 없었다. 꼬질꼬질한 현실에 쫒겨 헤어진 혈연을 다시 만나는 듯한 기쁨과 회한, 아니 사람이기에 생겨나는 사람을 향한 모든 감정들이 이 대작가를 만나며 내 안에 고여들었다.

그랬었는데...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나는 열정을 잃고 해묵은 그러나 늘 다급한 현실인 빵 문제에 휘둘려 있다. 신문을 아예 경제신문으로 바꿔볼까도 생각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매혹도 사그러들었고, 설령 죽음 이후의 내 존재가 소멸된다 하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으면서, 그저 감각이 살아있는 한 편안하게 살다 죽고 싶다는 지친 갈망이 고집스럽게 실체를 키워간다. 현실에서 만나는 석연찮은 불신이 와락 현실감을 키워줬다. 현실과 비현실이 주어지면, 비현실을 선택하던 자신을 배반하고 싶어진다.

...그럼에도 오래된 신자의 관성에 이끌린 행동인지, 성경을 펴놓고 광야의 유혹을 읽어 보았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영에 의해 광야로 인도되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리하여 밤낮 사십 일을 단식하시니 마침내 허기지셨다.
그러자 유혹하는 자가 다가와서 예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이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성경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지 못하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

사십일 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에서 빵을 거절하시는 예수님...?

"구원(求援)받았다"는 언술은 적어도 처한 현실을 초월할 수 있는 힘을 지녔다는 걸 가리키는 수사일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받으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그 분은 최후의 만찬이 된 마지막 밤, 손수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준다. 그리고 부활하여 갈릴래아 바닷가에서 다시 만났을 때, 숯불에 생선을 구워놓고 빵을 준비하고서 제자들을 부르지 않았던가. 왠지 굶주려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다감한 행동을 거기서 보게 된다.

유혹하는 자가 예수님을 시험한 세 가지는, 지상왕국을 건설하겠다는 대선주자들이 혈안이 되어 찾는, 요즘 말로 한 나라의 왕이 될 자가 구비해야 등극할 수 있는 "神物"들이다. 그런데 이 신물들이,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바꾸는 구원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을까...? 가치의 혼란과 무지, 문화적 빈곤이 자꾸만 꼬이는 선택을 하는 건 아닐까...?

천체물리학자 칼 세이건은, 광활한 우주공간 어딘가에 생명체가 살고 있으리라는 희망을 믿으며, 연구소를 세우고 프로젝트를 진행시켰다. <콘텍트>라는 영화로도 잘 알려진, 그의 일련의 행동을 나는 그가 하느님을 찾아 헤맨 게 아닐까라고 해석한다. 생명체를 찾는 일이나 생명의 근원을 모색하는 일은 같은 일일테니(?).

그러나 그는 골수성 백혈병에 시달리는 중에도, 가족과 지인들이 권하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불행한 가정생활이었고 마약중독자라는 설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죽음 앞에서도 끝내 신앙을 거부한 그의 단호함은, 믿지도 못 믿지도 못하는 신앙에 오랫동안 몸담고 있는 내게 다르게 보인다.

서산대사도 <선가귀감(禪家龜鑑)>에서 "참선에는 반드시 세 가지 요긴한 것이 있으니, 첫째는 도를 이루겠다는 원의를 발하는 큰 신심이요, 둘째는 도를 깨우쳐 가는 중에 부딪치는 커다란 분심으로, 원의가 흐려지는 지경에 이르는 혼란된 마음이요, 셋째는 "도"의 깨우침에 대한 근원적 의심이라. 만약 그 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다리 부러진 솥과 같아서 아무 소용없이 되고 말 것이라."고 적어놓고 있으니... .

칼 세이건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부하는 마음속엔 "사이비"로 뭉뚱그릴 수 있는 거짓됨에 미혹되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성실함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청년시절, 지구에서 달나라까지 이어지는 다리를 놓으려 애써 모은 온갖 제재가, 요즈음 빵에 휘둘리는 눈으로 바라보니, 허름한 창고를 짓기도 부족할 듯하다는 조급한 생각이 든다.

비상하는 독수리의 눈으로 이 가을엔 성경을 더 읽어야겠다.

지상의 내가, 하느님 계신 그 곳까지 이르는 (사)다리를 놓으려면, 성경 행간에 담긴 그 분의 마음을 읽어내야 가능하리라. 허기진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을, 허기진 눈의 소유자가 초월하긴 어려울 테니... .

/이규원 2007-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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