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인권변호사, 닐라니

성공회대학에서 공부하고 귀국을 앞두고 있는 스리랑카의 인권변호사 출신 닐라니(nilani manthrinayake, 40)를 우리신학연구소에서 만났다. 인터뷰는 황경훈씨(우리신학연구소 아시아신학연대센터 실장)가 하고 정리는 한상봉이 맡았다. 그녀는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인권변호사로서 지난 13년 동안 활동해 왔으며, 지난 1년 동안 성공회 대학에서 장학금을 지원하여 Asia NGO Study를 하기 위해 한국에서 생활해 왔다. 이번 성공회대학에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의 1기생으로 스리랑카 이주노동자들의 상황과 교회와 NGO들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들을 돕고 있는지 알아보는 논문을 쓰고 졸업하였다. 

한국 안에서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돕고 있는 기관은 여럿 있다. 나는 의정부, 안산, 서울 등 한국정부에서 재정을 지원하는 ‘한국외국인지원센타’ 소속 3개 센타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는데, 안산이주노동자센타만이 이주노동자들이 실직했을 때나 필요할 때 일시적으로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의정부는 방 1개, 서울엔 아예 그런 시설이 없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런 센타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이주노동자들이 아예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노동자들이 대부분 공장을 바꾸고 싶다고 느끼는 현실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일하는 대부분의 사업장은 노동강도가 너무 세고, 제 때에 임금을 지급하지 않으며, 화학약품을 다루는 등 위험한 일에 종사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말을 잘 몰라서 생존에 위협을 느낀다.

여성 이주노동자의 상황은 어떠한가?

이주노동자 중에서도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이 더 큰 편인데, 내가 논문을 쓰기 위해 인터뷰한 사람 중에 60명이 남자라면, 여자들은 5명에 불과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어려움이 생기면 다른 친구들을 만나서 충분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여자들은 소수인데다 흩어져 있어서 찾아갈 수가 없다. 그래서 남자들과 동거하는 여자 노동자들이 많은데, 혼자 사는 경우엔 다른 남자들이 자꾸 건드려서 위험하기 때문이다. 일부 한국인과 결혼한 필리핀 여성들을 만나본 적이 있는데, 그들은 한국인 남편에게 “빨리 빨리!”하는 잔소리를 들어야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매 맞는 사례도 많다.

스리랑카 교회는 민중을 위해 힘쓰는가?

스리랑카 가톨릭교회는 일반적으로 부자를 위해 존재한다. 리드(Reid)신부와 같은 경우엔 노동자들과 함께 항상 일하면서 신학자로서 제도교회에 도전하기도 하지만 특별한 경우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소수부족인 타밀족이 사는 스리랑카 북부에 있는 자프나 대교구 등 3개 교구에서는 민중의 편에 서서 일하기 때문에 정부로부터 주교가 빨갱이를 돕는다는 항의를 받곤 한다. 즉, 분리주의자인 "타밀해방 엘람 타이거" (타밀족 반군으로 이슬람 국가로 분리 독립을 위해 지난 25년간 스리랑카 싱할리족 정부군과 교전중)를 교회가 돕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돕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이며, 이들은 비록 대부분이 힌두교도들이지만 도움을 청할 곳이 교회 밖에 없다. 이를테면 최근에 만나교구에서 한 여성이 정부군에게 강간을 당했는데 해당 교구 주교가 정부와 군대와 경찰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스리랑카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불교도 중심의 정부는 소수부족인 타밀족의 인권에 관심이 없다. 그래서 예수회에서 파견한 타밀족 출신의 요가스바란(Fr. Yogasvaran) 신부 등이 변호사 일을 하며 타밀족을 돕고 있으며, 나 역시 비록 다수족 출신이지만 이들을 돕고 있다.

스리랑카 교회에서 평신도와 여성의 위치는 어떠한가?

한국처럼 스리랑카교회에서도 평신도의 지위는 낮고, 여성들은 총무나 비서 역할을 맡고 있을 뿐이다. 북부지역은 25년 동안 내전상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큰 교회들은 난민들을 위해 천막을 쳐 놓고 이들을 돌보고 있으며, 그 와중에서 평신도의 위치를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그러나 남부에 있는 콜롬보 같은 도시에는 4-5년 전에 평신도 교육기관이 생겨 리드 신부 등이 가르치고 있다. 이 학교는 정부에서 인정한 정식 학교는 아니지만, 4년제로 4개 학급에 40명이 공부하고 있다. 학생들이 제출한 논문을 가톨릭대학에서 대신 인정을 해주면 사회에서도 학사학위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여전히 설교는 신부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여성문제와 관련해서, 나는 현 교황이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스리랑카에서도 결혼사제는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 생각엔, 사제도 결혼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다른 사람들과 사는 법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사제들은 흔히 가정에 어려움이 생겨도, 혼배성사로 맺어진 것이기 때문에 계속 맞으면서 버티라고 너무 쉽게 말한다. 그것은 결혼생활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사제들도 결혼해 보면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올지도 모른다.

스리랑카에서 JOC 활동을 했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스리랑카에서 CWM이나 JOC가 활발한가?

스리랑카 9개 교구 중에서 3개의 북부 교회를 제외하면 남부의 교구들은 대부분 부자들과 친하기 때문에 CWM/JOC(가톨릭노동청년회) 그룹이나 IMCS(가톨릭학생회) 그룹을 싫어해서 교구에서 이런 활동을 금지시켰다. 나는 지난 1998년부터 지금까지 CWM 활동을 해왔는데, 귀국하면 계속 그 일을 하면서, 내전상황에서 필요한 평화운동을 해보려고 한다. 인권문제가 생기면 교회에 알리고 법적 문제는 법정에서 도울 것이다. 북쪽과 동쪽뿐 아니라 남부에서도 인권침해가 많다. 한국의 우리신학연구소 같은 데에서 스리랑카에 방문해서 인권침해 현장을 보고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해 주면 좋겠다.

/황경훈 한상봉 2008-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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