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아마도 그게 맞을 것이다. 뭔고 하니 전라도에서 민주당을 찍는 양반들이나 경상도에서 한나라당을 찍는 양반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생각 말이다. 민주당이 뭘 잘했다고 전라도 양반들이 그들을 찍어줬겠으며 한나라당은 뭐가 다르다고 경상도 양반들이 찍어 줬겠는가. (아, 이 이야기는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고 한나라당이 전국을 휩쓸었던, 지나가던 개가 웃을 근자의 상황을 논함이 아니다. 그저 이제껏 사실로 보여 졌던 우리네 정서와 전통을 얘기함에 다름 아니다)

그건 그냥 기분이다. 선입견이고 감정이다. 타성이며 버릇인 것이다. 지금껏 나를 포함한 우리네 민주시민(?)들은 그저 기분대로, 선입견에 의해, 버릇처럼 그렇게 투표를 해 왔고 죽도록 착취당해왔다. 착취당하면서 서로 반목했고 손가락질했으며 제가 이겼다고 우쭐대기도 했다. 참... 그 지랄들을 했다.


허접한 나라를 물려주어도

그렇게 저열하게 세상을 살았으니 조선일보를 비롯한 몇몇, 전혀 논조도 없고 시국관도, 가치관도 없으며 누리끼리한 식민주의적 발상으로 온 지면을 도배하던 신문들에게 그렇게도 휘둘렸던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생명보다 소중한 것 하나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 세상 모든 인본주의의 기본이 되는 그것은 바로 ‘다양성’이다. 나와 다른 남을 온전히 인정하고 배려하는 정신이다. 그것을 완전히 잃어버린 우리는 그날로 엄청나게 열등한 백성이 되고 말았다. 돈만 아는 백성이 되고 말았으며 백성을 죽여 대는 위정자를 존경하는 백성이 되었고 제 가슴에 총질을 해 대던 인간 둘을 차례차례 대통령으로 뽑은 초유의 허접한 국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허접하고 창피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정서적 전통을 이어받아 우리는 이명박을 또 대통령으로 뽑았으며 그의 당원들을 거의 전부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줬다. 이 대목에서 모든 양심적 지식인들과 민주 인사, 선진적 노동자, 일부 의식화 된 대학생들은 모두 항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대다수 국민이 그를 뽑아대는 마당에 뭘 어쩌란 말인가? 그런데 6월 10일 밤, 나는 완전히 역사 속에 자취를 감춘 줄 알았던 우리들의 무기 ‘다양성’의 싹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보았다.


이젠 우스워진 그네들

맞불을 놓겠다고 옆에서 소시지를 구워먹으며 ‘없어서 못 먹는 거야’ 어쩌구 떠들어대던 보수단체 소속 노인네들의 (허나 어디에선가 관광버스를 타고 함께 도착했을 것이 분명한) 서글픈 퍼포먼스는 이제 예전 같은 광휘를 발하지 못했다. 1980년대의 어느 날 어디에선가 눈에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시위 대학생들을 걷어차던 자유 총연맹, 재향 군인회, 그리고 스포츠머리가 각을 세운 정체불명의 사내들처럼 위력적이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안다. 1980년대 어느 날 그 보수단체들은 시위 대학생들의 ‘적’이었다. 허나 2008년 6월 10일의 보수단체들은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처럼 그저 ‘일부’였다. 누구도 그 노인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 노인네들이 시비를 걸면 그저 웃으며 어르신이 참으시라고 어르고 달랬다. 그저 노인네들이었다. 한 구석에서 서글프게 소시지를 구워먹는 노인네들이었던 것이다. 보수적 노인들이 너무나 불쌍해 보였다. 그 불쌍함은 (노인들에겐 죄송했지만) 횡경막 한 구석을 스물거리게 하는 감동이었고 승리의 안도감이었다.


모두 동의하는 방식의 싸움

모래를 넣은 콘테이너 앞에서 5시간이 넘는 토론회가 벌어졌다는 얘기를 방송에서 들었다. 토론의 뜻이 무엇인가. 소통이다. 그 귀한 소통이다. 컨테이너를 넘어 청와대로 가자는 분노도 정당하고 폭력을 지양하자는 신중론도 의미가 있다. 허나 그 두 가지는 완벽한 상극이요 모순이고 적어도 내 경험상 논투(論鬪), 혹은 어떠한 사투(思鬪)를 거쳐서라도 어느 한 편이 어느 한 편을 눌러야 하는 것이고 대개의 경우 예전엔 주화론(主和論) 보다는 주전론(主戰論)이 대세를 이루었다. 따라서 나는 스티로폼을 밟고 넘어갈 줄 알았다.

허나 그들은 모두 넘어가지 않았고 모두 동의하는 방식의 싸움을 전개할 줄 알았다. 그리고 컨테이너에 바른 구역질나는 기름 덩어리를 바라보며 냉소하였고 그것은 그대로 엄청난 피케팅의 위력을 보여 주었다.

아 현명한 지금의 젊은이들이여.
나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내가 정당하면 남이 부당해야했다.
그렇지 않아도 부당한 넘들이 많은 시국에
같은 백성들끼리 물고 뜯는 세상을 물려줬건만...

그대들은 참으로 현명하구나.
주적이 누군지 알고 친구가 누군지 제대로 아는구나.
진정 쥐구멍을 찾고 싶다.
잘은 모르나 그대들은 승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양성과 긍정의 힘은 무지하게 강하기 때문이다.
그대들의 승리를 축하한다.
그리고 그대들에게 그런 현명함을 허락한 주님께 감사한다.
주님이 이 나라를 아직은 사랑하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울면서 감사한다.

/변영국 2008-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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