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지난 달, 베란다를 치우면서 나는 엄청 놀랐다. 버리려고 쌓아 놓은 쓰레기가 산을 이뤄 어림잡아도 1톤 트럭 한 대 분은 충분히 될 듯했기 때문이었는데 20평을 간신히 넘는 아파트에, 그것도 베란다에 쌓여 있었다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쓰레기를 보면서 나는 최대한 참고 참았다가 한꺼번에 해결한 인분을 보는 것처럼 조금 역겨웠다.

버리는 것을 몹시 저어한 나머지 그 모든 것을 쌓아 두었던 장모님은 고개를 푹 숙이고 계셨는데 아마 당신이 시집오실 때도 그렇게 다소곳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이 되었고, 성질 급하기로 소문난 마누라는 연신 투덜대고 있었다. 장모님과 마누라의 선문답은 대충 이랬다.


베란다 텃밭 만들기

“이게 뭐야. 무슨 놈의 비닐봉지는 이렇게 많고 뭔 놈의 박스는... 그리고 전기 프라이팬이 4개나 있는 줄 나 처음 알았네. 어휴... 엄마...”
“아이! 요것을 다 치우고 고추를 심는다냐? 고것이 잘 클까?”
“아 그건 왜 감춰 엄마. 그것도 버리란 말이야.”
“요것을 상영이가 준 것인가? 아니면 상진이가 준 것인가? 워메 헷갈리는 거” (상영이는 큰 처남이고 상진이는 작은 처남이다)
“상영이고 상진이고 당장 버려. 버리라구...”
“아이! 변 서방. 저녁을 쪼까 묵으야 안 되겄는가?”

장모님의 필사적인 폐기물 수호 전략도 마누라의 강력한 포스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바야흐로 우리 베란다는 다른 아파트의 베란다처럼 ‘베란다의 꼴’을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그 전에는 다른 사람들이 의아스런 눈초리로 쳐다볼 정도로 지저분했었다.)

각설하고 우리가 베란다를 치운 이유는 언젠가 시골에 내려가서 살게 되면 텃밭이라도 가꾸어야 하니 고추와 방울토마토와 오이 정도는 심어봐야 하지 않겠냐는 전 식구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그 합의가 있기 전에 식구들의 나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이 먼저 있었다. 말하자면 어린 시절을 완벽한 시골에서 보낸 내가 농사라면 자신 있다는 얘기를 (말하자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매우 비주얼하게 설파했고 마누라와 딸네미는 두 손을 모아가며 내 얘기를 경청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마땅히 베란다에 오이와 방울토마토와 고추를 심어서 키워 내고도 남음이 있는 가장이요 아빠였고, 수정처럼 빛나는 눈빛으로 두 여자가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그 세 가지 식물의 분갈이를 할 막막한 임무를 띠게 된 것이다.


누구 없을 때 빨리 해 치우자

마누라가 출근하고 딸네미의 학교 수업이 공강 없이 꽉 찬 어느 날을 택해 나는 미친 듯이 서둘러 스티로폼 박스를 구하고 비료와 유기물이 다량 함유된 양질의 흙을 성당 형수님의 텃밭에서 구해와 이미 마련해 두었던 모종들을 옮겨 심었다. 왜 서둘렀냐고? 그 서툰 솜씨를 마누라와 딸네미에게 들켰다간 향후 나의 인생이 매우 꿀꿀해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실이야 어찌 되었건 겉보기에는 그럴 듯한 베란다 텃밭이 완성되었다. (인터넷은 뒀다 무엇에 쓰랴. 컴퓨터 방에 딸네미나 마누라가 들어오면 바로 원고를 쓰는 척 하는 수법으로 나는 식구들 모르게 꽤 많은 분갈이 정보를 인지해 두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두 여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요놈의 딸네미가 말썽이었다.

“어험. 지연아. 아빠가 모종 분갈이 다 했느니라. 너는 걱정말고...”
“그런 게 어딨어. 나 수업 없는 날 같이 하기로 했잖아.”
“여자가 흙 묻히고 손톱에 때 잔뜩 끼고 하면 좋을 게 뭐 있냐. 허허”
“뭐야. 남자하고 여자는 아무 것도 다르지 않다며.”
“그렇더라도 공부하느라고 힘든데...”
“됐어. 나 수업 끝났으니까 바로 갈 거야.”

집에 오자마자 베란다를 열어본 딸네미 왈

“너무 얕게 심었잖아. 그리고 바닥에 구멍은 뚫었어?”

금시초문이었다. 내가 인터넷을 덜 뒤졌나? 바닥에 구멍이라니? 그리고 깊게 심으라는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나는 나를 방어해야 했다.

“그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다. 바닥에 구멍을 뚫으면 흙이 흘러나와 베란다가 더러워진다구. 다른 사람들도 다 안 뚫어. 임마 그리고 식물의 뿌리가 아래로만 뻗냐? 옆으로도 뻗잖아. 따라서 깊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
“정말이지?”
“정말이다”
“죽으면 어떻게 할 거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나는 조금 치사하지만 비장의 한 방을 날렸다.

“야. 임마. 너는 아빠가 중요해 그까짓 식물이 중요해.”
“아무튼 두고 보겠어...”


영민하고 자상한 우리 딸네미

딸네미는 정말 지극 정성으로 아침마다 물을 주고 ‘고추야 고추야’ ‘방울토마토야 방울토마토야’ 어쩌구 해 가면서 묘목들을 키웠다. 허나 어쩌랴. 자연의 섭리는 몹시 냉혹한 것.. 서서히 오이가 먼저 시들어가더니 방울토마토도 비실대기 시작했다. 매우 강인하기로 소문난 청양 고추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내게 딸이 다가왔다.

“아빠. 모든 것을 용서 할 테니까 빨리 흙 좀 더 구하고 저 박스 구멍 뚫어서 다시 심어. 내가 도와줄게. 괜히 고집 부리지 말고. 저러다가 다 말라 죽겠어”

고맙게도 내게 기회를 한 번 더 준 딸을 위해 나는 마누라가 잘 안다는 장호원의 어느 화원에 가서 식물 키우는 법을 배우고 뚫린 구멍으로 물이 새지 않게 할 수 있는 땅콩 껍질 한 포대와 마사토, 그리고 진짜 비료를 구해다가 30본에 이르는 아기 식물들을 모두 다시 심었다.

그리고 녀석들은 (오이만 제외하고) 그런대로 생기 있게 잘 크고 있다.
그리고 오늘 아침이었다. 줄무늬 파자마를 맞추어 입은 마누라와 딸네미가 일어나자마자 베란다에서 소곤 거렸다. 2층 밖에 안 되는 데서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어쩌려고 그러느냐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다음과 같은 말소리가 들려왔다.

“지연아. 저것 봐. 벌이 날아들었어.”
“정말이야? 어디 어디”
“저어기. 고추나무 위에서 앵앵대잖아”
“어? 정말! 야 이쁘다.. 근데 벌이 조금 작지 않아 엄마?”
“아기 벌일 거야”
“벌도 아기 벌이 있나?”
“있겠지 뭐”
.........................
“엄마 저거 파리야”

이불 속에서 히죽대면서 한참을 웃다가 가슴 한 켠이 뭉클해졌다.
사랑하는 내 식구들...
정말 생명을 사랑하는 예쁜 내 식구들......
걱정 마라. 아빠가 죽어가는 오이도 다 살려낼 테니 아빠만 믿어라.

 

/변영국 2008-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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