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어느 날, 꿈인지 아니면 생시인지 잘 분간이 가지 않는 매우 어정쩡한 컨디션 속에서, 말하자면 라면을 왕창 먹고, 쏟아지는 졸음을 감내하지 못한 나머지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가 휴대폰 벨 소리인지 아니면 우리 집 요비링 소리인지 모를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면서 약간의 두통과 함께, 달아나는 잠의 끝을 붙잡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장판을 내리 긁던 바로 그 시점에 나는 노동한씨를 만났다.


그의 몸은 근육질이었다. 하지만 그 베리 굳 비주얼한 근육질 몸에 어울리지 않게도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괜히 근육질이었다. (분명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가 그의 근육질을 알아본 것이 사실인바 아마도 그는 웃통을 벗고 있었거나 윗도리의 단추들을 풀어 헤치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두 손에는 붉은 코팅이 입혀져 있는 흰 목장갑이 끼워져 있었으며 국방색 건빵 바지에는 시멘트 가루로 보이는 흰 먼지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리고 고동색 안전화는 이미 오래 전에 장만해 신은 듯 너덜거렸다.
그런 채로 우리의 노동한씨는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면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했고 들락날락했으며 갈팡질팡했고 울먹울먹하다가 옴짝달싹 못한 채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뭔가를 중얼거렸다.
아!.....
노동한씨는 계속해서 여섯 개의 숫자를 웅얼대고 있었던 것이다.
곧 나는 그것이 로또 번호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노동한씨가 찢어지게 가난한 나에게 그 번호를 불러주려고 모진 고초를 감내하며 궁극에는 구석에 몰려 구타까지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그 번호를 기억하려 애썼다. 정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그 번호를 들으려고 애썼고 마침내 또렷이 여섯 개의 숫자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숫자는 히브리어로 된 숫자였다.
영어도 버거운 내게 히브리어라니....

당신 말이야 나를 가지고 노는 거야? 이왕 불러줄 거 분명한 어조로 또박또박하게 말이지, 엉? 아라비아 숫자로 말이야, 그렇게 불러주면 어디가 덧나? 그렇잖아도 시방 되는 일도 없고 만사가 생 짜증 투성이인데 말이지.. 어떤 놈은 이영애가 선전하는 쥐기는 집에서 살고 어떤 놈은 쥐 똥꼬 만한 집에서 네 식구가 부대끼며 산다 이런 말이야. 그리고 그 후자가 바로 나란 말이지.. 그런데 그렇게 사람을 놀려? 당신 누구야 엉? 보아하니 남루하기 그지 없는 복장에 표정은 어디서 폭격당한 이라크 난민같이 하고...

노동한씨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 두 손을 잡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맞아요. 바로 지금 거기에서 오는 길입니다. 티벳에도 갔었고요. 아프카니스탄하고 앙골라에도 있었죠. 쓰레기 더미에 살고 있는 아이티의 빈민들하고도 많은 시간을 보냈죠...”
“당신 또라이야?”
“아니요. 저는 노동한입니다.”

나는 순간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그런데... 이렇게 한국말을 잘 하면서 왜 번호 6개는 이상한 말로...”
“언제나 그 곳을 그리워하죠. 왜냐하면 이제 그 곳이 없으니까요.”
“그곳이라면... 그게... 어디...죠?”
“원래는 초원이었던 곳, 그리하여 귀여운 돼지들이 즐겁게 열매를 따먹던 곳, 하지만 인간의 욕심으로 급기야 반사막이 되어가던 곳, 바로 그 사막에서 메뚜기와 야생 꿀을 먹으며 고행하던 성자가 메시아를 기다리던 바로 그 곳이에요.”

나는 심히 전율했다.
“그럼... 부디.... 로또 번호좀.... 제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곳은 참 아름다운 곳이에요. 이곳의 산과 들은 보기에 좋아요. 그러나.. 이곳의 사람들은.... 저를 너무 핍박하고 때리고 못살게 굴지요. 하지만 저는 당분간 이곳에 있어야 합니다. 너무 자주 굴욕스럽고 창피하고 아프고 고단하지만 제 마음대로 이곳을 떠날 수 없거든요. 경우에 따라서는 쓰레기 더미에 던져지기도 하지만 저는 참아야 해요.”

이 대목에서 나는 중요한 것을 얘기했다.
“도대체 누구십니까?”
“두려워요. 제가 누구라고 밝혔다가 정신병원에 감금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거든요. 그곳은 참 무서운 곳이에요. 한두 알만 먹어도 구역질이 나는 알약을 수없이 먹어야 하지요. 조금만 참아주세요.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게다가.... 저는 그리 특별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아무튼 자주 뵙기로 해요.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이미 나는 낮잠의 미망에서 깨어난 지 오래였고, 따라서 판단하고 생각할 수 있었다. 누군가 나에게 마음에 든다고 얘기하는 것은 참으로 즐거운 일이고, 남에게 인정받는 것이야 말로 어쩌면 세상을 살아가는 유일한 목적일 수도 있을 터이니 일단은 무척 즐거웠다.

근데 좀 화가 났다.
저 착하고, 괜히 근육질이며, 울기 잘하는 사람을 도대체 어떤 쳐 죽일 녀석이 쓰레기 더미에 처박았단 말인가.
부화뇌동 잘하는 나는 다음과 같이 다짐하였다.
‘그놈. 잡히기만 해봐라. 그저 다리 몽두라지를 분질러 버릴 테니까.’

 

/변영국 2008-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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