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오랜만에 TV를 켰는데 뭔 붉은 색의 행렬이 도로 곁을 지나가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게였다. 말하자면 ‘홍게’라는 것인데 색이 붉어 홍게라고 불리는 듯 했다. (우리나라 동해안에서 잡히는 홍게와는 그 다리 길이에서 차이가 났고 일단 먹음직스런 게가 아니었다)

하단에 대충 ‘크리스마스 섬의 홍게’(?) 라는 내용의 자막이 깔려 있는 것으로 봐서 아마 자연 다큐멘터리 정도 되는 듯 했다. 아무튼 그 홍게들은 도로 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일부는 도로를 점거하고 있었다. 말이 좋아 ‘일부’지 수십만 마리가 이동하는 중의 일부였으니 도로 역시 붉은 빛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이윽고 그 도로 위로 자동차가 하나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으악. 저 게들 어떻게 해. 불쌍해.” 라고 딸네미가 한 마디 했고 나 역시 곧바로 벌어질 참상을 생각하고는 조금 몸서리를 쳤다.

서서히 게들을 밟고 자동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당연히 게들은 내용물을 드러내며 여기저기서 부서져 갔고 그 소리는 엄청 강한 임팩트로 내 귀에 부딪쳤다. (나는 게가 자동차 타이어에 밟히는 장면을 처음 보기도 했지만 그 뿌걱거리는 소리는 정말이지 난생 처음 들어봤다.)

그리고 장면이 바뀌었다.


CLOSED

CLOSED

CLOSED......


그 섬의 모든 도로가 통제된 것이다. 환경 미화원으로 보이는 남자들은 마치 당연한 것인 양 매우 조심스럽게 게들의 통로를 다시 세우고, 게를 밟을까 조심하며 그들이 가야 할 곳, 말하자면 바닷가로 그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통제 안내문을 미처 보지 못한 한 운전자는 너무나 미안한 모습(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온 정성을 다해 차를 후진 시켰고 또 다시 바뀐 장면에서는 아이들이,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마다에, 게를 보호하자는 내용이 씌어 있는손바닥만한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다른 아파트 단지에 잠깐 주차했다가, 누군가가 친절하게 붙여준 내 얼굴만한 노란 딱지를 어쩌지 못하고 조수석 앞 유리에 방치하고 나와야만 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 아이들이 염려됐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차의 차주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 나타났다. 이제 그 아이들은 혼나야만 했다.

“누가 이렇게 스티커를 붙였지?”
“제가요” (자식... 남의 차를 지저분하게 만들어 놓고 당당하기는)
“왜 붙였지?”
“게들이 밟혀 죽으니까요.”
“고맙구나...”

허걱... 아니 고맙다니? 허락도 없이 남의 차에 스티커를 붙이고도 오히려 당당한 녀석들에게 고맙다고? 이거 내가 미친 거야, 저 여인이 미친 거야? 그리고... 그리고 말이지... 게가 좀 밟혀 죽는다고 도로를 통제하다니... 도대체 저 섬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제정신이야? 게를 밟을까봐 바삐 가야 할 곳을 걸어 다닌다는 게 말이 돼? 경제 개발... 경제 개발을 모르는 인간들인가? 세상에 그런 인간들이 아직도 있단 말인가?...

허나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런 합리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자본스럽지’ 못해서 그 섬의 ‘게를 보호하는 인간들’이 너무나 반가웠고 기뻤고 감격스러웠다.

또 장면이 바뀌었다.

20일 째 계속되고 있는 고온과 건조함으로 인해 게들이 바다로 내려가지 못하고 여기저기서 죽어나가자 사람들은 그들에게 호스로 물을 뿌려 주었고, 사무실 현관문의 틈새 바로 앞에 모여 에어컨의 냉기를 쐬려는 게들을 위해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으며 집안으로 들어온 게들을 밟지 않으려고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엄청난 공덕을 쌓고 있었고 이슬람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게들을 친구로 맞이했으며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가없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아... 허벌나게 부럽다.

게는 고사하고 사람을 치고도 뻔뻔하게 제가 안 그랬다고 잡아떼는... 입으로는 환경을 외치면서 자동차를 포기하지 못하는... 돈 버는 것을 방해하는 그 모든 것을 향해 분노의 표정으로 일그러져 있는... 무엇보다도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 못하고 ‘한반도 대운하는 좋은 것이여’하고 떠드는 그 군상들 속에서, 역시 별다르지 않은 한 개체가 되어 서식하고 있는 내가 볼 때에는 그 곳이야 말로 진정한 파라다이스였다.

/변영국 2008-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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