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서울 대교구에서 ‘가톨릭 시니어 아카데미’라는 일종의 노인 대학 강좌를 마련했고 그 중 한 강좌인 연극 두레를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 아마 한 두 달 전인 듯하다. 그 때는 그저 별 생각 없이, 아주 의미 있고 재미있는 일이 될 것이라는 생각만으로 흔쾌히 응했던 것인데 날짜가 다가오면서 바야흐로 고민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얘기를 듣자 하니 교장 선생님으로 정년퇴임 하신 분에다가 금융업에 종사하시는 분, 사장님... 뭐 이런 분들, 혹은 그런 부류의 분들이 많이 모이셨고, 평균 학력이 대졸이시라는데 60대의 분들이 대졸이라면 이미 이 사회의 상부 구조를 점하고 계신, 혹은 계셨던 분들임에 틀림없으니, 최소한 경제적으로는 단 한 번도 윤택한 시절을 보낸 바 없는 나로서는 우선 그 분들의 정서 자체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을 어쩌지 못했다.

게다가 강사진을 훑어보니 무슨 대학교 교수에다 이러저러한 전문가, 내노라할만한 예술가들이 다 모여 있는 듯 했는데 생전 ‘내놔’ 본 적이 없는데다가 외려 그 ‘내노라 할 만함’을 비아냥거리며 질겅질겅 씹어대기 일쑤였던 나로서는 이제 싫든 좋든 같은 강사로서 함께 일해야 할 그 분들을 ‘존경’할 수도, 그렇다고 ‘씹어댈’ 수도 없는 진퇴유곡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머리통을 한 대 맞아도 쌀 인간아.. 그러게 뭐 하러 남들을 괜히 씹었냐 씹기를...)

그도 그럴 것이 대학로에서 내가 한 연극이라는 것이 좋게 얘기해서 ‘사회 비판적인’ 연극이었고 좀 격하게 얘기하자면 위악적인 요소를 배제하지 않고 날것으로 토해내는, 말하자면 비주류의 연극이었으니 어쩌면 그 분들의 디딤판과 나의 자리 사이에는 심연이 하나 가로 놓여 있을 법도 했다.

요컨대 나는 부자연스럽고 겁이 났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오늘 나는 첫 수업을 했다.

나는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평수와 최종학력을 얘기하지 말고 자신을 소개하라는 미션을 주었다. 우리를 치장하는 모든 요소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나 자신을 드러내자는 의도였다.

우선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셨다는 형님께서 자신의 연극관을 피력하셨다. 이미 연극의 중요성을 간파하신 그 형님께서는 자신의 수업에 연극을 수없이 접목하셨고 이름만 대면 알만한 배우들이 자신의 제자였음을 말씀하셨다. 하... 이거 야단났다. 평생을 바쳐온 교단에서 수없이 많은 고민과 연구를 거듭하여 ‘연극’을 기저로 교육을 하셨을 저 형님을 내가 무슨 수로 가르친다는 말인가? 뒤이어 말씀하신 누님께서도 역시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셨단다. 사회적 치장을 제하고 알몸으로 서로 만나자는 나의 의도는 이미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아뿔싸... 직업도 얘기하지 말라고 할 걸...’

허나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이제는 한 술 더 떠서 교장으로 정년퇴임하셨다는 형님의 재직 당시 학부형이었던 누님까지 가세하셨다. 그 두 분은 오늘 우연히 처음 만나셨단다. (이 무슨 짓궂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러니까 그 녀석 이름이 아무개지요?”
“예 맞아요 선생님. 지금 의사가 됐지요.”
“그 녀석 동창 중에 누구누구 기억나세요?”
“누구누구는 기억 안 나고 아무개 아무개가 기억납니다.”
“아하 그 녀석들 저도 기억납니다.”

이미 강사인 나의 존재는 형님, 누님들에게서 잊혀져 갔다. 그리고 그 누님께서도 연극을 하셨단다. 은행에 다니던 부군을 따라 홍콩에 가서도 그 곳 성당에서 연극을 했고, 지금 살고 있는 강남의 모 본당에서도 연극을 하여 좋은 평을 받았단다. 아 나 원 참... 이 양반들에게 뭘 가르친단 말인가? 허나 형님 누님들의 그런 얘기들이 단지 자기를 내세워 보려는 어설픈 과시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숙연해졌다.]

“큰 아이는 의사가 됐지요. 헌데 작은 아이는 다운증후군이예요..”

나는 맹세코 그런 얘기를 그렇게 별 일 아닌 것처럼 화사하게 하는 분을 만나본 적이 없다. 엄청나게 다른 두 아이를 수십 년간 바라보며 삼켰을 눈물을, 남들의 시선 때문에 한없이 졸아들었을 가슴을, 남편이 출근하고 없는 자리에서 혼자 감당해야 했을 모든 절망과 모든 한계상황을, 그 누님은 이미 마음 한 구석, 두터운 굳은살로 간직하고, 밝게 웃는 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누님이 자랑했던 ‘성당 연극’은 말하자면 그 누님을 비극의 심연에서 끌어내 준 유일한 생명줄이었음을 나는 깨달았다.

누님들의 얘기가 이어졌다. 시어머니의 얘기가 나왔고, 오빠 얘기가 나왔다. 어렸을 때 품었던, 그러나 결코 이룰 수 없었던 꿈 이야기가 나왔다. 그 비극적인 얘기들이 누님들의 입에서는 해학이 되어 그렇게 흘러나왔다. 모두들 웃었고 나 역시 겉으로는 웃었다. 허나 속가슴에서는 나를 용납하기 어려웠다. 나의 치졸함을 놓아두기 어려웠다.

가르치려는 강박관념으로 귀를 닫고 앉아 있던 나의 모습이 쪽팔렸다. 내가 뭐라고 감히 인생을 살아내고 황혼기에 이르신 어르신들을 가르치겠다고 설쳤는지 모를 일이다. 그저 겉모습, 말하자면 경제적 능력, 학력, 사회적 위치 등등이 화려하다고 해서 무조건 그것을 죄악시하다 못해 우습게보면서 또 하나의 도그마를 만들어가던 나 스스로를 문득 깨달았다.

그들은 사람을 죽인 정치인이 아니다. 그들은 세금을 포탈하는 재벌이 아니다. 그들은 권력과 결탁하여 국회의원 입후보나 하는 파렴치한이 절대로 아니다. 물론 그들이 노동해방의 전선에 설 수는 없겠으나 그들 역시 나름의 고충을 안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저 한평생 교단에 섰고, 아이를 키웠고, 사업을 했고, 자주 울음을 삼켜야 했던 우리 선배들인 것이다.

참가하신 분들의 얘기를 다 듣고 나서 연극은 인간해방의 원리를 가지고 있으며 나는 형님 누나들이 그 원리를 체험하시고, 나아가 가능하다면 양질의 공연을 한 번 만들어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라고 말씀드렸다. 너무들 좋아하셨다. 나도 좋다. 모쪼록 그 분들이 지금처럼 건강하시기를 빈다.

 

/변영국 200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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