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처음에 형님을 만났을 때 나는 세상에 저런 인간이 다 있구나 싶었습니다. 뭘 하고 뭘 먹든 꼭 먼저 계산을 하고, 늦은 시간이 되면 후배 대리 운전비까지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서 솔직히 고마움을 느끼기 보다는 ‘참 저렇게 까지 가오(?)를 세워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횟집에서 소주를 한 잔 걸친 날에는 무조건 그 술값을 다 내고 꼭 우리 마누라가 좋아하는 낚지를 포장시켜서 억지로 내 손에 쥐어주는 모습을 보면서 저 인간 돈이 남아나나 보다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연출한 공연을 보러 오신 형님이 같이 온 일행 6명의 티켓을 다 끊을 때에도, 그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가 10장 가까이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형에게 초대권을 주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 웃으며 그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얘기했습니다.

형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부자인 사람들과 함께 아프리카 세렝게티 평원에 가기 위한 계를 들고 매달 10만원씩 낸다는 얘길 들을 때에는 형이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고 좋아하는 것 같아 속으로 혀를 끌끌 차기까지 했습니다. 정말 죄송하게도 저는 형님의 그 모습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하류 근성’이라고 까지 생각했었습니다. 주는 거 다 받아 처먹고 그런 몹쓸 생각을 했습니다.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술자리에서 좌중을 웃기려고 한 나의 싱거운 얘기들을 외워 뒀다가 다른 자리에서 꼭 써먹곤 하는 형님의 모습을 보면서 형이 나를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술값을 흔쾌히 내고, 그 사랑 때문에 밤 10시가 넘어서 혹시 지금 나와 주면 안 되겠냐고 조금은 취한, 그리고 매우 수줍은 말투로 나에게 얘기했으며 돈 못 버는 후배에 대한 그 사랑 때문에 낚지를 쥐어주면서 속으로 ‘이 놈아 집에 가서 마누라한테 위신 좀 세워’라고 했을 형님의 작지 않은 마음을 진즉에 알았어야 했습니다. 형님.. 너무 죄송합니다.


식도암 3기라는 얘기를 듣고 잠시 멍했었습니다. 이윽고, 어쩌면 요셉 형이 내 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절박함이 밀려왔습니다. 단 것은 삼키고 쓴 것은 뱉어내는 생래의 비천함이 몸에 배어 제 도리 못하고 지내온 시간들이 후회스러웠습니다. 형님 곁에 있고 싶었습니다. 허나 형님은 병상에서도 저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제 할 일 다 하고 남는 시간에 몇 번 간 것을 기억한 형님은 9시간에 이르는 대 수술을 끝내고 저를 찾으셨습니다. 토마스 혹시 안 왔냐고, 토마스를 찾더라고 형수가 얘기할 때 조금 눈물이 났습니다. 도대체 내가 뭘 해 줬다고 그리도 나를 인간으로 대접하는지...

지금에서야 고백합니다. 형님 그 때 입원해 있으면서 입맛이 없다고 투정 부리면서 갈비탕이나 설렁탕이 먹고 싶다고 했을 때, 장안에서 이름이 났다는 종가집 설렁탕을 포장해서 일산 암센타로 차를 몰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형한테 뭔가 해 줄 수 있다는 게 그렇게 기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벌써 반년이 지나갑니다.

그 어려운 방사능 치료도 다 견디고 천근만근 무거울 몸을 이끌고 운동도 열심히 하시는 형님을 보면서 저는 제 생애 처음으로 제 눈에 똑똑히 보이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허나 며칠 전, 저는 형님의 눈에서 눈물을 읽었습니다.

그 전날 가래에 피가 조금 섞여 나온다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다음날 병원에 가야겠다고 하셔서 저도 같이 가겠다고 했습니다. 너무 걱정이 됐습니다. 허나 정작 병원에서 형님은 의사에게 회사에 복직해도 괜찮다는 확인서를 써 달라고 사정하셨습니다. 혈담이 나온다는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회사에 복직할 수 있는 확인서를 써 줄 수 있냐고 했습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이 바보 같은 인간.. 온 생을 다 바쳐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고 먼지 풀풀 나는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이제 병까지 생겼는데 여전히 하는 얘기라고는 복직, 복직, 복직 밖에 없으니 울화통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얘기했습니다. 지금 복직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그 몸으로 무슨 일을 하냐고... 차마 형한테 화는 못 내고 조근조근 얘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참 슬펐습니다.

“토마스. 나는 너하고는 다르다. 나는 출근 안 하면 돈이 안 나와. 큰 놈이 아직 대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어쩌겠니. 일을 해야지.”


그리고 오늘, 형님은 회사에서 출근하지 말라고 했다며 제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노동 전문 변호사를 아냐고 물으셨습니다.

예후가 극히 안 좋다는 식도암을 이겨나가시는 형님이, 그 큰마음을 가진 형님이, 잡스런 회사 간부들에게 안 그래도 굽은 허리를 굽혀가며 사정했을 생각을 하니 울화가 치밀어 미치겠습니다.

진해에 내려가 조용히 낚시나 하며 살겠다는 그 소박한 꿈을 가차 없이 짓밟는 삶의 무게가 안쓰러워 미치겠습니다. ‘그저 치료에만 전념하면 되는 세상’이 따로 있는 이 사회의 칼날이 역겨워 미치겠습니다.

허나 형님. 그래도 죽지만 마세요.
우리 아직 못 가본 데도 많고 못 먹어본 것도 많지 않습니까?
술자리에서 남들을 웃길 수 있는 말들, 아직도 많이 남아 있습니다.
형님. 사랑합니다.

/변영국 2008-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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