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브라질 출신의 아우구스토 보알이라는 무지하게 똑똑한 연출가가 있다. 우리나라에는 ‘억압 받는 자들을 위한 연극(?)’인가 하는 이름으로 그의 책이 출판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 역시 그 책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딱하다 못해 처참한 기억력을 가지고 그 책의 내용을 세세하게 되살리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공연스레 인터넷을 뒤져 가면서 뭔가 써 보려고 애쓰는 것은 모름지기 비겁한 일인 듯 하여 그냥 되는 대로 주워 섬겨 보려 하니 내가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여도 무방하다.


아무튼 그 양반의 ‘거리 연극’을 얘기해 보려 한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보알 교수가 서식하고 있던 당시의 브라질은 다소 폭압적인 정권이 들어서 있었는지 공안당국의 서슬이 시퍼렇고 경찰들이 백성들을 잡아가는 광경이 자주 포착되는, 말하자면 유신, 혹은 5공 때의 우리나라와 매우 흡사한 실정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인플레이션이 극심하여 살인적인 물가에 허덕이는 민중들의 한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이런 때에...

보알의 배우들은 슈퍼마켓이나 혹은 식당에 들어가서 무슨 물건값이, 혹은 밥값이 이렇게 더럽게 비싸냐고 호통을 치는 거다. (그러니까 이게 바로 연극이다) 그러면 계산대의 점원, 혹은 카운터의 주인은 뭔가 반응을 할 것이고 그 반응에 대해서는 또 다른 배우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 집어 치우라고 고함을 치고, 결국은 슈퍼마켓이나 식당에 와 있던 다른 손님들 역시 이 급작스러운 사단에 참여하게 되는 것인데 그러면서 손님들은 자연스럽게 정부의 폭력과 실정을 비판하게 되는 식이다. 물론 경찰이 출동할 테고 산전수전 다 겪은 보알의 단원들은 다른 무대를 찾아 자리를 옮긴다.


아마 우리나라도 이런 식의 거리 연극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될 때가 곧 올 것 같다. 아무튼 각설하고....

나는 바로 어제 전철 2호선에서 단독으로 활약하고 있는 거리연극인을 봤고 엄청난 고민, 말하자면 상황윤리의 판단 기준을 도저히 잡아낼 수 없는 막막한 고민에 빠졌었다.

그는 대략 30대 후반 쯤으로 보였고 자주 머리를 감지 않았는지 목덜미 쪽의 두발이 기름지고 들떠 있었다. 처음 그의 존재를 확인했을 때 나는 전철 안에서 구두약을 파는 사람인 줄 알았다. 왜냐하면 앉아 있는 사람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뭔가 열심히 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예전에 작은 플라스틱 속에 기름 먹인 스펀지가 들어 있는 구두 세정제를 파는 사람들이 더러 다른 사람의 구두를 거의 강제로 닦아 주는 광경을 자주 목도한 바 있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풍기는 정체불명의 냄새를 확인하는 순간, 그가 뭔가 거북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는 손수 만든 종이 봉투 안에 가지런히 접혀 있는 천 원짜리 지폐를 보이면서 말하자면 구걸을 하고 있었다. 곁눈질로 세어본 결과 적어도 삼 만원은 넘어 보였다. 순간, 나보다 더 많은 현금을 보유한 그가 조금 밉살스럽기는 했지만 까닭모를 우월감으로 인하여 나는 몇 개 안 되는 나의 천 원짜리들을 주머니 속에서 어림해 보았다. (왜? 그 중에 한 장을 마땅히 그에게 줘야 했으니까)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그는 남자들은 그냥 지나치고 여자들 앞에서만 그 집요한 구걸 행위를 하고 있었다. 그는 상대를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 돈을 주거나 두려워서 그 여자가 자리를 떠날 때 까지 그러고 앉아 계속 무릎을 두드리고 뭔가를 했다.

어떤 아주머니는 그의 그 집요함 앞에서 눈이 찢어져라 감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다. 어떤 처녀는 악 소리를 질렀다 (왜냐하면 미니스커트를 입은 그 처녀의 허벅다리를 계속 건드렸으니까). 그리고 아무도 그 상황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본 훼퍼 목사님께서는 미치광이 하나가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면 마땅히 그 미치광이를 없애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물론 그 미치광이는 히틀러였다) 또한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남미의 한 신부님은 군부와 미국 때문에 죽어가는 민중을 위해 총을 들지 않는 사제는 사제가 아니라고 하셨던 걸 어렴풋이 기억한다.

한 사람의 목숨과 많은 이의 목숨
단죄 받아야 하는 폭력과 정당한 폭력... 그리고 전철 안에서
심하게 고생하는 여성들과 심하게 일그러진 30대 후반의 사내...
이제는 그 누구도 거들떠보려 하지 않는 상황 윤리....

/변영국 2008-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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