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국의 세상만사 인생사]

아주 오래된 예전에, 돈이 너무 궁해 몇 푼 받고 대입 논술을 가르친 일이 있었다. (허나 의심의 눈길을 거두시라. 고액의 개런티를 제의한 학부형에게 나는 그 30퍼센트만을 요구했으니까) 그 두어 명 되는 이 시대의 꿈나무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나의 졸강(拙講)을 시작했다.
“묻는다. 집단의 질서가 우선인가 개인의 자유가 우선인가?”
역시 녀석들은 타협의 귀재요 중용의 전사들이었다.
“개인에게도 스스로의 질서가 중요하고 집단도 자유스러워야 합니다.”
가련한 녀석들... 세상에 자유스런 집단이 있다고 믿는 가련한 녀석들....
가련한 녀석들... 혼자 앉아 짜릿한 전율이 온 몸을 틸업(카메라를 밑에서 위로 훑어가며 찍는 촬영 기법일 거다)하는 배변의 쾌감 속에 코딱지를 후비는 절대 자유의 순간에도 질서를 사고해야 한다고 믿는 가련한 녀석들...


1. 씨름선수들과 민속 씨름...

내가 기억하는 한 최고의 테크니션은 이승삼과 이기수다. 그들의 전광석화 같은 잡채기, 앞무릎 치기, 그리고 그 유명한 뒤집기는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그 하루가 쾌청했다. 시원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하여 씨름이 대중화되기 시작했고 소위 프로 씨름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만기가, 강호동이 출현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재미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사람’ 다웠으니까...
그러나... 슬프게도 그 들 모두는 ‘이겨야’ 했다
씨름 단은 성적을 내야 했고 성적을 내는 것은 이긴다는 것의 다른 이름이고 이기려면 덩치가 커야 했다.
서서히 박광덕이 나오고 김정필이 나오면서 김경수가 나왔다. 150킬로그램이 그들의 대략적 평균 몸무게가 되었고 이제 씨름판에서 ‘기술’은 사라졌다.
민속씨름은 그저 ‘배지기’와 ‘밀어치기’ 두 가지로 연명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인기도 사라졌다. 말하자면 망했다.


2. 연예인들과 방송국 프로그램

작금의 연예인들 이름을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내세울 일도 못된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요즘 연예인들 (젊거나 어린)의 이름을 도통 모른다. 내가 그 연예인의 이름을 안다면 그는, 혹은 그녀는 필시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에서 ‘노인네’ 취급을 받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어떤 연예인을 보고 ‘나 저 사람 알아’라고 얘기하는 것이야말로 그 연예인에 대한 엄청난 실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왜 나는 요즘 연예인들의 이름도 모르고 누가 누군지 구별을 하지 못할까? 아하... 그래... 성형 수술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연예인들의 입을 통해, 텔레비전에서 들은 얘기다. 그러니 거짓말은 아닐 터... 어디, 아까 얘기한 ‘민속씨름 절멸사’에 대입해서 한번 풀어보자.

아... 슬프게도 연예인들은 모두 이겨야 했다. 그런데 이기려면 살아남아야 했고 살아남으려면 남들보다 무조건 ‘예뻐야’ 했다.

쌍꺼풀은 할례 받은 남근처럼 모조리 도려졌다. 턱을 깍고 가슴을 높였다. 미친 듯이 운동하고 그것도 안 되면 살가죽에서 지방을 긁어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미덕’이 되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미덕’은 아름답고 희소한 개념이 아니라 저자거리 개밥그릇처럼 흔한 것이 되고 말았다. (나는 요즘 애니매이션이 뜨고 있는 이유를 거기서 찾는다. 이왕 지사 만들어 붙이려면 인간의 얼굴이나 그래픽의 얼굴이나 다를 게 없다는 것이 애니매이션 축성론의 뼈대 아니겠는가)

허나 다행히 방송국은 망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왜 ‘다행’이지?)


작금의 대한민국을 놀라우리만치 발전시킨 위대한 우리 국민들은 모두 ‘잘 살아야’ 한단다. 뭘 얼마나 더 잘살려고 그러는지 보는 사람마다 주고받는 덕담의 내용은 그저 ‘부자 되세요’다.
허나 재화의 총량은 그 한계가 있는 법, 내가 잘 살려면 저 놈이 못 살아야 한다. 못 살거나 혹은 거지가 되어도 좋다.
그러니 다른 말로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은 ‘저 놈을 못 살게’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못 살게 굴어야만 한다.
그리고 실제로 대개들 그러고 있다. 이게 무슨 짝이냐....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그의 젊은 시절 주연을 맡았던 영화 ‘볼륨을 높여라’가 생각난다. 남들과 다르고 싶은 열망, 남들과 다름을 선언하려는 목숨을 건 용기, 나를 남들과 같은 우리에 집어넣고 사육하려는 권위에 대한 모든 것을 건 도전, 정말이지 기가 막힌 영화였다. 한 개인을 추적하여 잠식시키려는 집단의 권위는 집요했고 결국 스스로 치부를 드러내고 만다. 짱이다.


나부터 우선 집단의 질서가 강요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리라.
나에게는 예수님이 허락하신 ‘절대 자유’가 있다.
이제부터 절대로 ‘집단의 강요, 무력, 말하자면 질서’에 굴복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아무나 대통령으로 뽑아대는, 정신 나간 짓을 하지 않으리라.

/변영국 2007-12-27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